안준석의 좋은 건축 나쁜 건축 이상한 건축

휴스턴의 ‘메닐 컬렉션’ 포용력을 닮을 수 없을까?

리움 삼성미술관 ㉻

등록 : 2017-10-19 14:28 수정 : 2017-10-20 12:05
서울의 풍경이 된 사설 미술관

미술관 주변 도로 더 넉넉했으면

미술관에 필요한 것은

건물과 소장품만이 다는 아니다

마리오 보타의 제1전시관

리움 미술관이 우리 곁 풍경으로, 문화적 역할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개개의 내용과 모여 만드는 화음이나 배려에는 이랬으면 싶은 여지도 남는다.

미술관 주변의 도로 너비는 6m 남짓. 여유롭게 차들이 지나기엔 좁지만, 걷는 사람 피해 조심스레 다니면 그리 나쁘지도 않다. 하지만 동네 한 구역을 다 차지한 미술관의 규모를 생각하면 다소 격이 맞지 않는다. 건물들을 대지 경계로부터 넉넉히 떼서 들여앉히고 그 테두리를 곱게 다졌더라면 길을 다니기에도, 언덕 어귀에서 미술관 건물을 감상하기에도, 건물들 사이를 통해 서울 구경을 하기에도 훨씬 더 여유로운 캠퍼스가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적인 주거지역 한복판에 주변의 맥락을 거스르며 대중을 불러모으는 공공시설을 들이면서 그런 배려를 놓친 점은 못내 아쉽다.


여백의 미를 내지 못하는 외부 공간

참여 건축가들이 하나같이 건축계의 중요한 상도 여럿 받고, 각자 일가를 이루었다 인정받는 세계적 건축가들이기에 리움의 건물들은 배울 점도 많고 감탄스러운 그림도 넘쳐난다. 그러나 잘생기긴 했지만 동네에 빼곡한 주택에 비해 덩치가 월등한 건물들이 서로 바짝 붙어서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해대니, 독사진이면 빛이 나겠지만 서로가 선 자리에서 남겨진 여백으로 이루어내는 외부 공간의 가치를 찾기란 쉽지 않다. 미술관 앞에 마련된 언덕 위의 넓은 플랫폼이 동네의 지붕인 양 전체를 조망할 멍석을 깔고 숨통을 틔워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고미술 전시관(제1전시관)은 마리오 보타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벽돌 외장을 테라코타 패널로 구현했다. 뒤켠으로 한 수 접힌 위치에서도 밝은 오렌지색의 역으로 세운 원추 형태로 자존감을 마구 드러낸다. 건물의 모양이 나름 우리네 도자기와 닮은 구석도 있고, 휘휘 돌아서 들어가는 맵시도 옛 건물들의 겸양을 따르니 고미술 전시장으로는 딱이다. 역원추형 로톤다(원형 건물)의 속을 파서 만든 아트리움은 천창을 타고 쏟아지는 빛으로 가득하다. 아트리움이 고미술관의 중심을 잡으니 전시장도 따라 돌고, 계단도 따라 돌며 풍부한 공간감을 만끽한다. 또한 이들이 이루는 동심원의 중심은 전체 단지의 중심으로 역할 범위를 넓히고 넘치는 자연광을 로비 바닥에까지 쏟아놓으며 사람들을 모은다.

로톤다 내부의 아트리움

아트리움, 고미술관에 비해 과한 크기

공간감 넘치는 아트리움의 시각적 중요성이 워낙에 확연하니, 기대감 없는 입장 데스크는 메인 요리로 배부른 뒤 늦게 나온 애피타이저처럼 열적다. 전체 캠퍼스의 축을 세운 아트리움의 중요성은 이해하나, 고미술관의 여유 없는 전시장을 생각하면 단일 건물 내부를 관통하는 아트리움으로는 크기가 과해 보인다. 그 풍성한 아트리움 중앙을 따라 드리워진 기다란 전시품을 잡아당기면 오렌지색 전등갓에 가득하던 빛이 깜빡 꺼질 것만 같다.

장 누벨은 언제나 놀라운 건축적 아이디어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곤 하지만, 창의성 내세우는 건축가들이 흔히 그렇듯 아름다운 개념에 취했을 때는 눈에 띄지 않던 문제들이 뒤늦게 발견되고는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만 입는 그답게 현대관(제2전시관)은 검은색 산화철 상자들을 쌓아올려 구성된 모양이다. 건물 외곽에 놓인 각각의 상자들이 개별적인 전시실을 이루어낸다는 아이디어가 흥미롭다.

하지만 다양한 전시를 위한 공간이려 애쓰다 쉽게 한계를 드러내는 상자의 규모에 허탈해진다. 오목한 전시 상자는 집중을 위한 감상 공간이기에는 방해가 너무 쉽고, 미술품의 안전을 보장하기에는 사각이 너무 많다. 상자의 크기가, 전시실들이 만들어내는 미로 같은 느낌이, 크지도 않은 미술관에서 흰 셔츠에 검은 정장 입은 이들이 왜 이리 자주 눈에 띄는지 그 이유를 짐작게 한다.

언덕을 파고 들어앉은 미술관 뒤의 대지를 구조적으로 보강하며 쌓아올린 개비온(돌을 담은 철 망태)에 대비되는 검은 상자의 풍경과 그 사이의 계곡 같은 외부 공간이 연출하는 긴장감도 볼거리다. 하지만 먼지로 얼룩진 뿌연 유리창이 앞을 가로막아 감동을 반감시킨다.

개비온과 산화철 상자의 대비가 만들어낸 계곡.

렘 콜하스의 존재감? 기시감!

현대건축의 한 획을 그었다 평가되는 렘 콜하스의 아동교육센터는 경사로를 이용해 층간의 경계를 허물어내고 있다. 근사한 공간에 세련된 동선 처리는 여전하지만, 좋은 노래도 삼세번이라 했던가? 콜하스의 건물마다 느껴지는 기시감(데자뷔) 역시 여전하다.

콜하스의 어깨에는 자신의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전체 단지의 매끄러운 마무리도 얹혔다. 그런데 입구로부터 관람객의 진행을 한 걸음씩 따라가다 보면, 제각각 개성으로 무장된 건물들을 하나로 이어붙이는 와중에 남긴 성긴 이음매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천의무봉이기보다는 수고로운 과정이 눈에 선한 조각보 이불이다. 납작하게 넓은 홀에는 뚱뚱하고 시커먼 기둥이 가득하고, 인상적인 존재감의 아트리움도 개성 넘치는 세 건물을 하나로 잇기엔 역부족이다. 거기에다 한갓진 데 있어야 할 식당마저 존재감을 세우며 덤비니, 넘어지지 않고 2인3각 마치려면 호흡 고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차라리 제멋대로 뽐내는 건물들 그냥 내버려두고 밖에서 부드럽게 이었으면 어땠을까?

휴스턴의 ‘메닐 컬렉션’, 최상의 사설 박물관

미국의 휴스턴 시에도 주택가 한가운데 조성된, 리움과 도시적 맥락이나 수장품 성격이 유사한 ‘메닐 컬렉션’이라는 사설 미술관이 있다. 지금은 타계한 실업가 존과 도미니크 드 메닐 부부가 생전에 가꾸어낸, 개인 소장품들로 이루어진 미술관인데, 놀라운 것은 소장품 목록이 웬만한 국립 미술관도 혀를 내두를 수준인 정상급 예술품의 보고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미술관이 이탈리아의 거장 렌초 피아노가 탄생시킨 진정 최상의 건축 작품이라는 것이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예술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기본 요소라 믿는 메닐의 뜻으로 입장료가 무료라는 것이다. 더더더욱 놀라운 것은 부근에 메닐 집안이 시민들을 위해 제공한 마크 로스코 채플, 사이 톰블리 미술관, 비잔틴 프레스코 채플 등 개별적 존재만으로도 전 세계 방문객을 끄는 굉장한 전시시설만 네댓 개가 더 있다는 것이다.

아직 놀란 가슴 쓸어내리기엔 이르다. 탐욕스런 부동산 개발을 우려한 메닐 집안은 미술관 일대 주거 블록들을 몽땅 사들여 녹지와 아름드리나무들이 어울린 합리적인 월세의 임대주택 지역으로 묶었다. 이 구역은 미국 4대 도시의 한복판에서도 고유의 아름다움과 한가로움을 꿋꿋이 지켜내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메닐 부부의 빛나는 지성과 사회를 향한 뜨거운 포용력, 도시의 미래까지 헤아리는 통찰력이다. 그들의 고귀한 뜻은 휴스턴 시민을 넘어 미국과 세계의 방문자들을 통해 영원한 울림으로 전해지고 있다.

뛰어난 건물에 걸맞은 친절함이 아쉬워

현재 리움 미술관은 시대교감과 동서교감이라는 주제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옛 물건들과 요즘 물건들이 한 지붕 아래 있으니 시대교감이고, 동양 예술과 서양 예술이 한 방에 놓였으니 동서교감이라나 보다. 일렬로 세우기 힘든 다양한 소장품들을 엮어놓을 아슬한 명분에 마음 졸였을 큐레이터들이 애처롭다.

관람객 넘치는 복잡한 공간에서 귀중한 것 지키느라 힘든 직원들, 엄한 짓 하는 관람객에게도 밝은 낯빛에 부드러운 목소리면 좋겠고, 로비의 일부인 안내원들도 손님 뒤돌아섰다고 속마음 드러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설 미술관으로는 국내 으뜸이고, 아무나 엄두 내지 못하는 역할 맡아준 것이 고마우며, 저물녘 미술관 마당에 앉아 한가한 시간 만끽하는 행복을 나눔에 감사한다. 하지만 고마움은 고마움이고, 미술관에 필요한 것은 건물만이, 소장품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시민들에게 훈장처럼 자랑스러우려면 철저한 관리 못지않은 친절함으로 다가서고, 뛰어난 건물이니 더 닦으며 아끼고, 문화적 가치 넘치는 서 말 구슬 꿰어서 보배로 만들어내는 재주까지 함께 부리면 금상첨화이겠다. 머리 좋은 학생이 농땡이 치면 더 안타까운 법이다.

글·사진 안준석 공학박사·건축가(AIA)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