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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느린 자전거길, 생각의 속도를 담다

서울시 ‘가족 함께 길’에 20명 인도 8~12㎞ 속도로 한강의 풍경 담아

등록 : 2017-11-02 14:55 수정 : 2017-11-02 17:39
김훈 작가가 10월20일 오후 ‘한강 자전거 여행 코스 개발’을 위한 시민 체험단 20여명과 함께 여의도 샛강 한강생태공원을 지나고 있다. 김 작가는 이날 여의도에서 반포 한강공원에 이르는 13㎞ 자전거길을 대부분 8~12㎞의 ‘생각의 속도’로 달리며 시민체험단을 이끌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자전거 여행>과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이 지난 10월20일 오후 여의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저어’갔다.

느리다. 속도계는 주로 시속 8~12㎞ 주변을 맴돈다. 간혹 시속 15㎞로 ‘빨리 달릴 때’도 있지만, 그의 자전거는 금세 ‘길을 음미하는 속도’로 돌아온다.

지난 1999~2000년 ‘온갖 정한(情恨)을 나눈’ 자전거 ‘풍륜’(風輪, 김훈의 자전거 이름)과 함께 전국 산천을 누빈 느낌을 베스트셀러 <자전거 여행>에 담았던 ‘김훈의 속도’가 왜 이렇게 느려진 것일까? 이유는 김 작가의 뒤를 자전거로 따르는 20여명의 남녀노소 서울시민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서울시 한강사업본부가 올해 말까지 개발할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 함께하는 한강 자전거 여행’ 사전 체험행사에 나선 참이다. 참가한 자전거들도 대부분 엠티비나 사이클 등 고급 자전거가 아니라 핸들 앞쪽에 바구니를 단 ‘마실용’ 자전거다. 당연히 김 작가도 ‘질풍 같은 속도’를 잊고 ‘가족과 연인의 속도’로 체험단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한강의 자전거길은 똑같은데, 어디가 라이더의 자전거길이고 또 어디가 가족 여행을 위한 자전거길이겠는가. 그렇지만 둘은 같은 길이기도 하고, 다른 길이기도 하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게 바로 ‘속도’와 ‘이야기’다.

“오랜만에 한강에 나와 보니 우리나라가 평화롭고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이가 뛰어놀고, 여고생이 웃음 짓는 이런 평화를 결코 양보하거나 짓밟혀서는 안 됩니다.”

김 작가가 오후 2시 마포 쪽이 바라다보이는 여의도 녹음수광장에서 출발 직전에 한 말이다. 김 작가의 말이 페달을 밟으며 샛강생태공원 끝자락에 있는 여의교 아래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4년 남짓 잠실에서 마포까지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있는 기자가 간혹 빠른 속도로 한강을 달릴 때면 머릿속엔 겨우 ‘추월하는 자’와 ‘추월당하는 자’, 그리고 ‘안전 확보’라는 생각만이 남는다. 하지만 이날은 김 작가의 자전거 뒤를 따르면서 천천히 달리는 ‘가족의 속도’는 ‘생각의 속도’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가족의 속도’는 또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게 한다.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을 지날 때, 단풍 든 잎새들의 각기 다른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속도가 조금이나마 빨라지면 ‘라이더’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녀석들이다. ‘저놈은 남들보다 좀더 붉어져버렸네’ 하며 여유로운 웃음 한번 던지고 계속 페달을 밟는다.

샛강생태공원 끄트머리 여의교 그늘에 도착한 것이 오후 2시45분. 김 작가는 “여기 오는 동안 너무 좋았다. 자연은 역시 내 집 옆 자연이 제일”이라고 말문을 뗐다. 이어 김 작가가 지나오면서 살펴본 밤섬 이야기를 펼치자 여의교 아래는 어느덧 문화교실이 됐다.

“제가 어렸을 때 밤섬에는 산이 있었습니다. 홍수 때만 되면 그 산에 물이 부딪쳐 여의도로 범람하곤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 그 섬을 까부수고, 주민 400여명을 마포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때 사업 이름이 ‘한강정복사업’이었습니다. 그 사업으로 마포 일대는 홍수를 면할 수 있었지만, 밤섬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게 됐습니다. 자연은 한번 부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시원한 강바람을 안고 방금 지나쳐온 밤섬 얘기를 들으니 섬의 역사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다시 바퀴를 굴려 30분 정도를 달리자 흑석동 ‘이야기 정거장’이 나타났다. ‘이야기 정거장’은 서울시가 2008~2010년 흑석동과 난지·뚝섬 등 6곳에 설치한 것으로, 그 장소에 얽힌 이야기 안내판과 함께 지도 등을 갖추고 있다.

흑석동 이야기 정거장에서 김 작가가 펼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흐르는 한강’에 대한 것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이 흐르는 것을 보면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쉬임없이 흐르는 한강은 ‘우리나라가 아무리 어려워도 길이 열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김훈 작가가 10월20일 오후 시민 체험단과 함께 ‘한강 자전거 여행 코스 개발’을 위한 행사에 나서기 전에 출발지인 여의도 녹음수광장에서 메모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김 작가가 이끄는 체험단의 자전거들도 한강을 옆에 끼고 ‘한강 물과 함께 흐르듯’ 마지막 목적지인 반포 한강공원으로 향한다.세빛섬과 잠수교가 반기는 공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30분. 휴식시간까지 모두 포함하면 시속 5㎞ 남짓의 느린 자전거 여행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남긴 인상은 몇 시간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전거 질주 여행 이상이었다. 빠른 자전거 여행의 경우 오직 출발점과 도착점만 머릿속에 존재하는 반면, 느린 자전거 여행은 지나가는 모든 길을 기억속에 살아 있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제가 어렸을 때는 한강에 설치된 다리는 한강 인도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철교를 포함해 모두 31개가 됐습니다. 옛날에 건설된 한강 다리일수록 기술이 부족해 교각이 많고, 최근에 세운 것은 교각 숫자가 적습니다. 교각의 모양도 모두 다르지요. 다리마다 표정이 다릅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그 다름을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자전거 여행이 주는 즐거움에 대한 김 작가의 얘기와 함께 이날 체험행사는 마무리됐다. 이날 체험단은 20명 남짓이었지만 속도에 대한 체감은 상당히 달랐다. 사이클 2대와 엠티비 1대를 가지고 있다는 디자이너 한태경(49)씨는 “이렇게 느린 속도로는 처음 자전거를 타봤다”며 “평소 빠른 속도에서 보지 못했던 세부적인 풍경 감상이 오늘의 포인트인 것 같다”고 말한다. 반면 자전거를 1년에 한 차례 정도 탄다는 김보름(38)씨는 “흑석동 이야기 정류장 직전의 고개는 무척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는 김훈 작가가 인도한 속도가 가족과 친구들과 하는 자전거 여행에 알맞은 속도라고 평가했다. 체험행사 뒤 ‘사전 체험 코스를 자전거를 이용하여 누구와 함께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23명의 응답자 중 11명이 친구, 9명이 가족을 꼽았다.

서울시는 이런 결과 등을 바탕으로 올해 말까지 △한강공원을 기준으로 한 단거리 코스 △공원과 공원을 연결한 중거리 코스 △한강 전역을 대상으로 한 장거리 코스, 그리고 △청계천 연계 코스 등 모두 20여개의 코스를 가족·친구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이야기 콘텐츠’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김 작가는 2000년 <자전거 여행>의 첫 문장에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온다’고 적었다. 이어 ‘자전거를 저어갈 때 25000분의 1 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지방도·소로·임도·등산로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나간다’고 고백했다. 기자가 이 날 함께한 경험으로는, 그로부터 17년 뒤 김작가가 인솔한 ‘가족의 속도’는 자전거길은 여전히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나가지만, 여행의 추억만은 더 강하게 몸속에 남게 만들었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