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석의 좋은 건축 나쁜 건축 이상한 건축
‘이미지 소비자’ 겨냥한 듯한 도서관…귀한 디자인 자료는 강점
종로구 북촌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등록 : 2017-11-16 14:07
현대적 세련미와 섬세한 디테일
달리 보면 건물 기능과 무관해
상업공간 냄새 짙게 풍겨
소소한 디테일까지 신경 쓴 디자인 도서관.
안국역에서 헌법재판소를 끼고 오르면, 온갖 리노베이션(개보수)으로 법석인 북촌 한자리에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가 있다. 차분한 진회색 전벽돌과 철재로 이룬 외관은 한눈에 보기에도 디자인과 연관 있는 건물로 보이도록 소소한 디테일까지 신경 쓰며 태를 냈다. 옥상에는 작은 한옥을 얹어 ‘기오헌’(寄傲軒)이라 이름했으니, 호화롭지는 않으나 세자가 쓰던 공부방의 이름을 따른 것에서 이 건물이 가고자 하는 지향점이 짐작된다.
현대카드 고객임을 증명해야 입장
이 건물은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이끈 토끼의 굴처럼 진입 과정부터 남다르다. 전벽돌과 회벽, 철판과 콘크리트로 마감된 통로를 돌며 입구를 지나면, 중정을 배경으로 앞으로 펼쳐질 공간의 힌트가 나온다. 극장 매표소 같은 로비에서 신분증과 건물주네 신용카드로 본인의 신상과 고객임을 증명해야 한다, 반드시! 운이 없거나 어중간한 시간엔 자리가 날 때까지 애매한 기다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면접 대기실 같은 뻘쭘한 기분 들 수 있다는 점 유의하시라. 보안카드를 계단 입구에서 찍고, 희미한 자연광이 벽을 타고 흐르는 곧은 계단을 한 칸씩 오르면, 입구에서 예고편으로 보았던 선택된 자들의 공간이 드러난다. 드디어 하찮은 일상을 뒤로하고 ‘기존을 재해석해 자신을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든다’는 철학으로 무장한 직관적 공간, 이상한 나라에 입장한 것이다. 별 내용 없는 도서관 입장 풍경을 나도 장황하게 한번 부풀려보았다. 디자인 관련 귀한 자료 다수 소장 도서관은 책을 소장하고 열람하는 것을 일차 목적으로 한다. 이곳에는 디자인과 관련된 귀한 자료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어 그 방면의 연구자들이나 특정 자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자료를 통해 눈을 높이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차곡차곡 쌓고 싶은 이들에게도 참으로 귀하다. 하지만 꼭 자료가 아니더라도 다리 꼬고 비스듬히 앉아 자신이 속한 세련된 공간에서 풍기는 문화적 냄새 자체를 향유하기도 한다. 이 공간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자료 목적의 방문자들이라면, 이 공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문화적 준거집단을 바라는 이미지 소비자들이지 싶다. 이곳은 도서관 간판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존 버거의 말처럼 광고 메시지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문화를 이용한 이미지를 파는 상업시설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인 듯 전시장 또는 쉼터 같은…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건물 자체로 보면, 주변 맥락과도 큰 문제가 없고 나름의 이야기를 이끄는 에너지도 충분하며 구성 요소들의 결합과 마무리에도 볼거리가 많다. 하지만 앨리스가 경험한 이상한 나라처럼, 멀쩡한 듯한데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고 일관성을 잃은 부스럭거리고 찌그덕거리는 적절치 않은 불편함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
이 건물은 도서관이기도 하고 전시장이기도 하며 동시에 도심공원 같은 쉼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건물은 도서관이라기에도, 전시장이라기에도, 쉼터라기에도 애매하다. 이 건물은 현대적 세련됨과 좋은 재료로 빚은 세심한 디테일에 전통적 소박함과 투박한 멋이 함께 어우러진 문화적 공간이다. 허나 달리 보면 이 건물은 기능과 무관한 세련됨, 설득력 부족한 재료와 디테일에, 뜬금없는 전통 조각이 찢어진 깃발처럼 갑판에 걸린 상업공간, 플래그십 스토어(브랜드 홍보매장)다.
두 사람인 양 행동하곤 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두 사람인 척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그래, 지금 난 멀쩡한 한 사람이 되기에도 모자라잖아!’ 하고 자신에게 말했다.
3층 상상력 넘치는 다락
가운데 잔디 깔린 마당에 긴 나무벤치 하나 놓인 미니멀한 중정을 중심으로 건축물이 둘러서 있다. 벽으로 막지 않고 빈 몸으로 가볍게 방문객을 맞는 출입구도 중정으로 열려 있다. 진입부에는 입장권 배부라는 단순한 업무를 처리하기엔 다소 비대한 로비가 있고, 그 옆에는 전시장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갤러리가 있다. 그리고 더 돌아가면 차를 마시며 중정을 바라볼 수 있는 카페가 나온다. 디자인 라이브러리의 일층에, 도서관은 없다.
계단을 오르면 책의 갤러리, 테이블 위에 전시된 아름다운 책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펼쳐진 중정을 내려다보며 햇빛 쏟아지는 유리창 앞에 근사하고 편안한 안락의자가 일렬로 놓여 있다. 여기 앉아 책을 든 사람의 여유로운 모습은 일층 입구에서 멋진 이미지로 투사된다.
동쪽으로 이어진 긴 칸에는 하얀색 얇은 판으로 접은 박공지붕 모양 박스가 건물 속 건물을 구획한다. 서쪽엔 널찍한 콘크리트 테이블과 잘생긴 나무의자들 곁을 책장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그 끝에 측면 한칸짜리 가늘기가 가래떡 같은 ‘기오헌’이 있다. 좁긴 해도 한지 바른 창으로 스미는 볕은 좋다. 이층이 도서관이다!
3층은 좁아서 상상력 넘치는 다락이다. 구석지고 괴상한 공간이 쓸모는 적지만 흥미롭다. 띠처럼 두른 창도 재미있는 풍경을 담아낸다. 이 건물 통틀어 도서관 용도로 쓰이는 면적은 채 반이 안 된다. 중정은 건물의 모든 부분에서 조망되는 시각적 중심이고, 하늘과 소통하는 외부 공간으로 멋스럽고 한가하다. 하지만 제대로 도서관이고 싶었다면, 명품 숍마냥 입장객 숫자 헤아리며 기다리게 말고, 중정이나 전시장을 아껴 열람 공간으로 할애했으면 도서관 소리 듣기 부끄럽지는 않았겠다.
내부의 철재는 반들거리지만 바깥 대문 이마빡은 얻어맞은 듯 볼썽사나운 뻘건 물이 흘러내린다. 반사 없이 진열장 속을 잘 들여다보려는 용도의 철분 적은 유리도 썼다 한다. 상업공간에 쓰는 비싼 유리를 도서관에 썼다기에 의아해 들여다보니 그래야 마땅한 쇼케이스(진열장)다. 중성지를 사용해도 종이는 햇빛에 쉬 산화되고 손상된다. 이미 자외선의 칼날에 누런 상흔이 드러나는 <도무스>(이탈리아 건축·디자인 잡지) 같은 희소한 백전노장 자료들이 고작 어설픈 블라인드 한 장으로 쉴드를 치고 밀려드는 직사광선과 맞장을 뜨고 있다.
도서관으로서 과한 세련됨에 집착
도서관으로서는 과한 세련됨을 보이고자 한 노력도 기능적인 열람 테이블과 번잡스런 책의 배치만은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남겼다. 대신 평범함을 남김없이 지우지 못한 아쉬움을 실내에 펼친 박공지붕과 세자의 책방이고 싶은 한옥으로 풀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포장한 차가운 면들은 재주를 다해 만든 실내장식가의 무대장치 같아서 일부 입장객의 행태는 그에 맞는 연기를 하는 것처럼 어울린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에는 ‘범 가죽을 쓴 노새’의 우화가 나온다. 한 욕심 많은 인간이 자신의 노새에게 범 가죽을 씌워 남의 밭에 풀어놓자, 노새는 주인이 무서워하는 틈을 타 실컷 곡식을 훔쳐 먹는다. 하지만 도리어 노새로 변장해 다가간 사냥꾼을 암노새로 알고 덤비다 정체가 들통난 가짜 범은 결국 사냥꾼 화살에 맞아 죽는다. 이 우화는 서로가 원하는 욕망된 진실은 숨긴 채 다른 겉모습으로 위장하여, 이득을 얻으려는 대상을 현혹하는 중첩된 상황을 보여준다.
도서관으로 위장한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뜨거운 상업적 욕망을 차가운 문화적 건축의 외피로 숨기려 했다. 건축주도 설계자도 심지어는 이용자들도 모두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 누구도 괘념치 않는다. 서로 다른 가죽을 쓴 욕망을 해소하기엔 이런 상태가 차라리 더 나은 해결책일 수도 있으니.
이 공간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설계자가 뽐내려는 건축적 세련됨도, 시설 운영자가 떠벌이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제안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기 쉽지 않은 귀한 자료를 한곳에 모아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한다는 단순한 공공성이다. 도서관이라는 답은 명확하기 그지없는데도 다른 욕심으로 에두르고 흐리니 오해는 커지고 갈 길은 아득하다.
길을 묻는 앨리스에게 이상한 나라의 고양이는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려 있어’라고 대답했다.
글·사진 안준석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l건축가(AIA)·공학박사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전경
이 건물은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이끈 토끼의 굴처럼 진입 과정부터 남다르다. 전벽돌과 회벽, 철판과 콘크리트로 마감된 통로를 돌며 입구를 지나면, 중정을 배경으로 앞으로 펼쳐질 공간의 힌트가 나온다. 극장 매표소 같은 로비에서 신분증과 건물주네 신용카드로 본인의 신상과 고객임을 증명해야 한다, 반드시! 운이 없거나 어중간한 시간엔 자리가 날 때까지 애매한 기다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면접 대기실 같은 뻘쭘한 기분 들 수 있다는 점 유의하시라. 보안카드를 계단 입구에서 찍고, 희미한 자연광이 벽을 타고 흐르는 곧은 계단을 한 칸씩 오르면, 입구에서 예고편으로 보았던 선택된 자들의 공간이 드러난다. 드디어 하찮은 일상을 뒤로하고 ‘기존을 재해석해 자신을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든다’는 철학으로 무장한 직관적 공간, 이상한 나라에 입장한 것이다. 별 내용 없는 도서관 입장 풍경을 나도 장황하게 한번 부풀려보았다. 디자인 관련 귀한 자료 다수 소장 도서관은 책을 소장하고 열람하는 것을 일차 목적으로 한다. 이곳에는 디자인과 관련된 귀한 자료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어 그 방면의 연구자들이나 특정 자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자료를 통해 눈을 높이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차곡차곡 쌓고 싶은 이들에게도 참으로 귀하다. 하지만 꼭 자료가 아니더라도 다리 꼬고 비스듬히 앉아 자신이 속한 세련된 공간에서 풍기는 문화적 냄새 자체를 향유하기도 한다. 이 공간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자료 목적의 방문자들이라면, 이 공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문화적 준거집단을 바라는 이미지 소비자들이지 싶다. 이곳은 도서관 간판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존 버거의 말처럼 광고 메시지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문화를 이용한 이미지를 파는 상업시설이기 때문이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중정
2층 책 전시장
3층 책 열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