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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깊이를 더한 품새…내부 공간 흐름도 물 흐르듯
올림픽공원 안 소마미술관
등록 : 2017-11-30 14:26
우연히 들른 미술관에 감탄
단정한 외관, 리듬감 있는 내부
대책 없는 노후에 안타까움
세상을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난다. 그 일이 고약하거나 손재수라도 안기면 궂은 마음이 여러 날 계속되기도 한다. 하지만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 기쁘고 따뜻한 일이 생기면 어깨는 가벼워지고 하루는 한층 풍부한 시간으로 채워진다.
연전에 북촌 부근을 배회하다 우연히 벽에 붙은 포스터에 끌려 만난 최영실 작가의 작품 <천 개의 바람들>. 화폭 가득한 푸른 선들이 불어 내던 서늘한 바람이 내 삶의 무게를 한 덩이 덜어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과 제목이 같아 우연히 봤다가 열 번 이상 다시 본 영화 <토니 타키타니>(감독 이치카와 준, 2005). 혀끝을 적시는 찻물 같은 담백함이 과장 없이 깔끔했고, 얕고 가벼운 기운은 공부 삼아 꼭 봐야 했던 깊은 영화들의 작위적이고 무거운 뒷맛보다 더 오래 나를 채웠다.
짜장면 먹으러 갔다가 진수성찬 대접받은 기분
‘평화의 문’을 찾아 올림픽공원에 갔다가 씁쓸한 마음을 안고 나오는 길에 소마미술관에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의 소장품들이 왔다 하여 들러보았다. 88서울올림픽 이후로 처음 방문해 올림픽공원에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큰 기대 없이 짜장면 한 그릇으로 요기나 하려 했던, 다음날이면 기억도 나지 않을 동네 중국집이라 여겼는데, 세상에. ‘만한전석’(滿漢全席, 며칠에 걸쳐 먹는다는 중국 황실의 코스 요리)을 요리하는 고수가 거기 있었다.
‘소마’(SOMA)라니…. 이렇게 희한한 이름의 미술관도 드물 것이다. ‘서울올림픽미술관’(Seoul Olympic Museum of Art)의 약자란다. ‘미술관 옆 동물원’도 아니고 체육관 옆 미술관이다. 뜻을 모르고 불렀을 때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고, 세련되고 귀여운 글씨체의 간판을 보았을 때도 나쁘지 않았는데, 그 뜻을 알고 나니 무언가 이상하다. 철자도 뜯어보고 발음도 다시 해본다. 줄리엣이 그랬던가. 장미는 그 이름이 아니어도 여전히 향기로울 거라고.
소마미술관 터는 재미있다. 체육 공원이 아닌 복잡한 서울의 다른 어딘가로 미술관을 그대로 옮겼으면 좋겠다. 물론 올림픽공원도 좋지만, 그 넓은 땅을 쪼개 종로, 동대문, 강남 등의 적당한 부지와 맞바꿔, 부담스럽지 않은 문화시설이 도시의 한 모퉁이를 차지해 이런 울창한 녹지가 여러 곳에 생겼으면 좋겠다. 용도도 확실치 않은 거창한 문화시설 대신, 쓸모없이 흉하고 값만 비싼 공공미술품 대신, 짓눌린 서울의 꽉 막힌 숨통을 터줄 녹지들이나 풍성했으면….
공모전으로 탄생한 건물답지 않게…
미술관 전면은 나지막하고 다소곳하다. 건물 주변을 가리려 발뒤꿈치 들어 키 세우지도 않았고, 자신을 돋보이려 요란한 치장도 하지 않았다. 설계 공모전으로 탄생한 건물임에도 상당히 조용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몸을 낮춰 땅으로 파고든 모양새는 주변 몽촌토성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하겠지만, 겉은 지나치지 않으면서 속으로는 깊이를 더한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일본에 남긴 작은 미술관들이 그랬고, 북촌의 현대미술관 서울관도 이 길을 따랐다. 높낮이 있는 대지의 흐름을 순순히 따른 배치로, 2층으로 들어가 구경하며 내려가다 아래층 출구로 나서면 또 다른 지세를 이어 타며 순순히 걷게 된다.
짙은 갈색 목재로 정갈하게 만든 납작한 상자 모양인 전시장의 2층 쑥 들어간 곳에 입구가 있다. 안내데스크를 지나면 아래로 깊이 뚫린 우물 같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전시장이 보인다. 이 미술관에는 낮은 층들을 관통해 수직으로 엮는 이런 장치가 여럿 있다. 얕다가 깊어지고 다시 얕아지는, 이쪽 공간과 저쪽 공간 사이에 다른 공기가 흐르는 빈 상자가 끼어든 음악적 배치와 리듬이 발걸음을 가벼이 만든다. 몸을 낮춘 미술관 외부에서는 읽히지 않게 숨겨서 쌓은 수직적 켜는, 느릿한 미술관 여행의 즐거움이다.
입구 오른쪽에는 회색 아연 강판으로 마감한 또 다른 상자 하나가 물 위에 떠 있다. ‘백남준 아트홀’이라 이름 붙인 높은 천장의 전시 공간이다. 복도는 좁고 긴 유리 상자로 된 느긋한 경사로라 수면을 가로지르며 건너는 것 같다. 수많은 건물과 지하철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그늘도 못 만들면서 쌓이는 더러움은 악착같이 보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유리 지붕이 한둘이었나. 건축가는 사진으로만 그럴듯해 보이는 유리 지붕 대신 물결무늬가 일렁이는 하얀 천장과 벽을 마련했다. 유리벽 밖으로 펼쳐지는 조각공원 풍경이 배경으로 둘러서니 먼 길도 잠시고 오르는 수고도 느낄 틈 없다. 노출된 회색 콘크리트와 흰색 면의 만남은 평범하지만 조화롭다. 하지만 비좁게 늘어선 원형 기둥과 유리 창틀은 한가로운 오솔길 한편에 엉겨 선 괜한 울타리 같다.
넉넉지 않은 공간에도 충분히 훌륭한 전시
한정된 공간에 넘쳐나는 전시물 때문에 그 어울림이 최상이었다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훌륭한 소장품들을 한가득 빌려 공간에 꾹꾹 눌러담았다. 분주히 배치하면서도 감상의 흐름을 유지하느라 애쓴 점과 학습 효과가 높은 전시라는 점을 높이 산다. 내용 없이 부풀리고 노래 순서만 바꿔 들려주는 다른 미술관의 허튼 전시에 비하면 소마미술관의 <테이트 명작전>은 충분히 훌륭했다.
미술관은 전시 내용이 주는 즐거움을 주된 목적으로 하지만, 건물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그에 못지않아야 한다. 건물은 감흥을 즐길 만한 공간이 되기도 하고, 작품과 호흡을 맞춰 또 다른 작품을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욕심이 지나쳐 전시된 작품들을 밀치고 앞에 나선 꼴이 흔하다. 그러나 소마미술관을 감싼 외피는 차분하고, 품은 공간은 풍부하다. 흥미로운 동선을 따라 사뿐사뿐 걷는 내부 공간 흐름이 물 흐르듯 연결되고 결코 지나친 제스처로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새로운 풍경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며 미술관을 나설 때까지 지루할 틈이 없다.
근사한 그림을 만드는 조각공원
마지막 전시관을 나오며 눈에 들어오는 외부 공간은 새로이 시작될 이야기의 기대를 한껏 부풀린다. 출구를 나서며 부드럽게 이어지는 조각공원은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기에 더없이 평화롭다. 고운 녹색 언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시선과 그 외곽을 한정지으며 오르내리는 무채색의 콘크리트 경사로, 그리고 이들 구조물을 지지하는 열주와 벽들은 어디서 보아도 근사한 그림이 된다.
나무 상자 건물과 금속 상자 건물 사이의 비밀스러운 좁은 경사로를 타고 지하로 꺼지듯 내려가 어두운 터널을 지난 후에 밝은 빛 가득한 자그마한 잔디 광장이 나온다. 관람객을 위한 문화교육 공간에서 뭔가를 만드느라 즐거운 어린이들의 웃음 섞인 손놀림이 한창이다. 이 공간은 다시 경사로를 따라 출구 쪽 조각공원으로 연결돼 오른다. 여기서도 콘크리트가 만드는 선들이 힘차게 공간을 가른다.
이렇게도 소박한 정신적 유희와 즐거움으로 가득한 공간이 세공 덜된 거친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세월 지나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나이 듦 자체가 슬프거나 늘어나는 주름살이 두려운 게 아니다. 대책 없이 무너지는 노후가 민망한 것이다. 온갖 잡지 표지를 장식하며 그리도 자신만만하던 노출 콘크리트 건물들은 고작 몇 해를 못 넘기고 때 끼고 갈라지며 피곤하게 스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건축은 재기 넘치는 지음도 중요하지만 긴 호흡의 보살핌이 한 뼘 더 소중하다.
글·사진 안준석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l건축가(AIA)·공학박사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소마미술관 수공간
‘평화의 문’을 찾아 올림픽공원에 갔다가 씁쓸한 마음을 안고 나오는 길에 소마미술관에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의 소장품들이 왔다 하여 들러보았다. 88서울올림픽 이후로 처음 방문해 올림픽공원에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큰 기대 없이 짜장면 한 그릇으로 요기나 하려 했던, 다음날이면 기억도 나지 않을 동네 중국집이라 여겼는데, 세상에. ‘만한전석’(滿漢全席, 며칠에 걸쳐 먹는다는 중국 황실의 코스 요리)을 요리하는 고수가 거기 있었다.
소마미술관 전경
소마미술관 내부
조각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