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석의 좋은 건축 나쁜 건축 이상한 건축

단순한 교감의 에너지 넘치는 VS 세련되지만 복잡 미묘한

인사동 안의 두 건물 ‘쌈지길’과 ‘인사동 마루’

등록 : 2017-12-14 14:07 수정 : 2017-12-14 14:13
나에겐 장터에 가까운 인사동

문화적이고 전통적인 장터

인접한 두 건물을 보면

시골 쥐와 서울 쥐가 생각나

쌈지길 전경

인사동을 걷는 것은 언제나 흥겹다. 어릴 적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도 하고 맛난 것도 얻어먹던 즐거운 시장통이 떠오른다. 누구는 인사동을 문화나 전통의 거리라고 말하지만, 내 머릿속 인사동의 이미지는 장터에 더 가깝다. 문화적이고 전통적인데다, 사람 물결 끊이지 않는 장터이니 더 좋다.

인사동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쌈지길’


인사동 길 중간쯤에 이제는 이 동네의 완전한 터줏대감이자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쌈지길’이 있다. 처음 오는 이는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칠 수 있게 도로변에서 뒤로 숨어, 가게들 어깨너머로 빼꼼히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해리포터가 호그와트로 떠나는 킹스크로스 역의 9와 3/4 플랫폼을 찾듯 잘 찾아 들어가기만 하면 생각지 않은 풍경과 즐거움이 왁자하다. 혹 이 동네가 익숙하지 않다면 한눈팔지 말고, 길을 마주 보고 넙데데하게 선 커다란 회색 전벽돌 벽 중앙에 붙은 커다란 노란색 쌍시옷 글자를 찾으면 된다.

김용옥 선생은 <아름다움과 추함>(통나무, 1987)에서 마당을 하늘과 땅이 교감하여 만물의 생성적 변화가 일어나는 ‘장’으로 설명한다. 그 마당을 채우는 교감의 ‘힘’이 사라지면 마당은 죽는단다. 참으로 근사한 얘기 아닌가? 그러니 마당은 결코 특정한 무대의 형태가 아닌 교감의 힘이다. 그런데도 흔히 건축가들은 자신의 설계안이 가운데를 비우고 에워싸는 형태를 하고만 있으면 디자인 개념을 마당이라 디민다. 그 교감의 힘을 만들려는 별다른 노력이나 장치도 없이 말이다.

쌈지길 내부 풍경

쌈지길은 마당을 가득 채울 교감의 에너지를, 마당을 둘러싸고 경사로를 오르는 사람들의 운동감으로 만들어냈다. 건물 안에 널찍하게 펼친 마당은 일부러 애써 뭘 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약장수가 자리잡던 어느 장터의 빈터같이 그냥 비워두고 건물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 건물에 인사동 길을 끌어들여, 연속해 이으며 마당 가장자리에 둘러 붙였다. 길은 다른 길 위에 또 다른 길 아래 놓여 눈도 피하고 비도 긋는다. 이 길을 따라 걸어오르면 마당과 건물의 경계를 따라 오르는 것이다. 마당에도 속하고 건물에도 속하니, 반은 바깥에 반은 안쪽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돌담에 얹은 초가지붕처럼…

마당에 비하면 건물의 외관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속으로 들어가고 식물로 숨겨져 있기도 하지만, 건축가는 애초에 외관으로 승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듯하다. 다른 길들은 모두 안마당을 보고 있지만, 도로 쪽은 바깥으로 길을 내 큰 부피를 나눴다. 시골 마을 솜씨 좋은 이가 근처 자연의 재료를 모아 정성스레 올린 돌담에 얹은 초가지붕처럼, 주변에서 제일 큰 덩치가 슬쩍 묻어가는 걸 보니 카멜레온의 교묘한 보호색이 따로 없다.

쌈지길 직통 계단실을 통해 마당으로 나가는 길

예전에 이 건물이 있는 지역의 개발 일을 했다는 어느 도시전공 교수 한분이 술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본인이 도시설계 차원에서 규모와 중정(집 안의 건물과 건물 사이 마당) 배치까지 다잡고 각이 딱 나오게 해서 넘겼는데, 건축가가 주변에 비해 큰 땅에 앉은 건물 볼륨을 분절하지 않아 도시적 맥락을 해쳤다며 혀를 차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가 사실인지, 자신의 역할을 어디까지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니 뭐 어쩌겠는가. 웃을 수밖에…. 돼지고기 한 근 떼어주고 튀김가루 사줬으니 그 탕수육은 내가 한 요리라 떼쓰는 것 같았다. 중정을 둔 결정만으로 교감을 자신하는 단순함도, 분절이 건물을 물리적으로 잘게 저며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란 일차원적 사고도 안쓰러웠다.

이 건물은 전체로 보면 차지한 면적도 넓고 물리적 덩어리도 크지만, 각 방이 독립된 가게를 이루며 개별적 삶의 행태를 꾸리고 있다. 말하자면 시장의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위로 감아올린 것이다. 그걸 하나의 거대한 건물이니 떼어내 작은 건물 여러 개로 나누어야만 주변 건물들과 어울린다고 주장한 것이다. 현재 쌈지길의 모양과 사용 행태를 보면서도 그리 말하니 그 생각에서 빠져나오긴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건물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게 깊은 마당으로 들어가 길에서 한 걸음 물러앉아 있으니 그 주장은 본인도 기억 못 할 취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분명히 깨닫는 것이 있다. 도시, 조경, 건축, 미술 등 연계 분야들은 모두 도시의 작동을 위한 기계적 개선과 사람이 느끼는 미적·공간적 질의 향상을 위하고, 때론 모호한 경계를 서로 넘나들지만 엄연히 서로 존중해야 하는 선이 있다는 것을. 수백명분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취사병의 밥 푸는 삽과 자취생의 밥주걱이 같을 수 없고, 소 잡는 칼과 닭 잡는 칼이 같을 법 없음을. 하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니, 함께 도닥이며 노력해야만 멀리까지 갈 수 있다는 것도.

복잡한 구성의 ‘인사동 마루’

쌈지길 건너편 지척에 다른 버전의 마당과 길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건물이 하나 있다. ‘인사동 마루’라는 건물이다.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마당보다 ‘마루’라 붙인 이름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루는 마당보다는 작고 땅으로부터 떠 있는 정제된 공간으로 여겨진다. 마루는 밥상 놓으면 식당, 목침 베고 누우면 침실이어서 여전히 다양하고 복합적이긴 하지만 마당보다 선택의 폭은 좁다. 그 이름 때문인가? 아니면 더 깊이 숨었기 때문인가? 쌈지길보다는 자유로운 재료 선택과 한결 복잡한 구성으로 주변 현황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매끈하려 애썼다.

인사동 마루 전경

구성의 복잡함에는 두 건물을 마루와 길로 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입주한 점포의 층고도 제각각에, 마루의 크기와 높이도 제각각이며, 길들이 이어지는 방향도 여럿이다. 마루의 크기나 위치에 따른 성격을 주려 했지만, 공연이나 연주가 이루어지는 어귀의 큰 마루 외에 이렇다 할 존재감은 없다. 다양하려 했지만 헷갈리기 일쑤라, 이 가게에 왔었는지 아리송하고 빼먹고 못 본 가게 보러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한다. 바로 눈앞의 장소를 휘휘 둘러 건너가야 하고 햇볕도 들지 않아 항상 썰렁하다. 처음부터 여기를 장터로 만들 셈은 하지도 않았다.

시골 쥐와 서울 쥐 연상시키는 두 건물

‘쌈지길’과 ‘인사동 마루’는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서울 쥐'를 생각나게 한다. 떨어진 곡식이나 먹고 짚더미에서 자지만 속 편하고 친근한 환경의 시골 쥐와 세련된 음식에 깔끔한 환경에 살지만 불안하고 쫓기는 삶을 사는 서울 쥐.

쌈지길의 길과 마당은 부풀린 주장도 없고, 오래되고 편한 티셔츠를 입은 듯 편하며, 단순하고 명쾌한 교감 에너지가 넘친다. 반면 인사동 마루는 도시 쥐가 쏘다니는 빌딩 숲처럼 마루도 길도 많거니와 미로처럼 연결돼 세련되지만 복잡하고 불편하다. 도시 쥐네 마루에선 건물의 얼굴들 한번 보여주지 않고 요지경 넘기듯 발걸음을 옮기면 한 장면씩 드러난다. 하지만 시골 쥐네 마당은 네모난 터가 한눈에 보이고 건물의 모든 입면이 하나의 렌즈에 담긴 채 움직임에 따라 각이 달라지는 ‘키네틱 아트’(움직임이 있는 예술) 같은 광경을 선사한다.

어떤 쥐의 동네가 좋을지는 취향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인사동을 지나친 깔끔함으로 도시처럼 꾸미는 것은 밑지는 장사고 괜한 수고다. 또한 쌈지길 마당에 사시사철 꽉 채워 널려놓은 지붕 씌운 가판대도 편안한 시골 마당에 서울 쥐들을 풀어놓은 듯해 불편하다. 쌈지길은 마당과 길이 사람과 함께 만들어내는 교감이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 ‘인’(人) 자 두 개 쓴 쌍시옷 아닌가?

글·사진 안준석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l건축가(AIA)·공학박사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