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뜨거운 현실, 남영동 대공분실·이한열기념관
전현주 기자의 ‘1987년 열사의 흔적’ 따라가기
등록 : 2018-01-25 14:05
영화 개봉 이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
하루 100여 명씩 사람들 몰려
마포구 이한열기념관도 방문객 몰려
2월9일까지 토요일 연장 개관
영화 <1987> 개봉으로 6월 항쟁과 ‘그 시대 그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일상을 살다가 시간에 묻어버린 기억도 하나둘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다. 짧은 젊음을 시대에 쏟았던 박종철과 이한열 그리고 시대의 당위를 좇아간 무명씨들의 흔적을 따라 ‘1987년 서울’을 걸어본다.
“남영동 무서운 줄 몰라?”
지난 수요일 오전 방문한 옛 남영동 대공분실 박종철 기념전시실에는 스무 명 남짓의 남녀노소 시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관람하고 있었다. “많이들 오시죠. 영화 개봉하고선 하루 100명은 넘게 와요.” 방문객 접수를 하던 관계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의 1층과 5층을 한 번에 잇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다보면 내가 어디쯤 왔는지 위치 감각을 잃어버린다. 앞뒤로 함께 걸은 대여섯 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완전 어지러워!” 외치며 “이걸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의문을 뱉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1976년 당대의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완공한 검은 벽돌의 남영동 대공분실은 ‘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을 달고 은밀히 운영됐다. “남영동 무서운 줄 몰라?” 하는 영화 속 대사처럼, ‘남산'으로 상징된 옛 국가안전기획부와 ‘서빙고호텔'로 일컬어지던 국군보안사령부 대공분실과 더불어 고문수사기관으로 악명이 높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경찰청 산하 대공수사기관으로 지었다. 2005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와 과거사위원회가 입주한 뒤, 2007년 박종철 기념전시실과 인권교육 자료실을 열어 과거사를 돌아보는 자성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계단으로 5층까지 오른 뒤 내려오면서 보면 보기 수월한 동선이다.
5층 15개 조사실 중 14개실을 돌아볼 수 있다. 509호실은 1987년 1월14일 사망한 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현장이다. 서울대 언어학과 2학년 박종철은 시국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받으며 물고문당하던 끝에 숨졌다. 4.09평 비좁은 공간에 책상과 의자, 침대, 욕조, 변기가 붙박이로 보존됐다. 복도 왼쪽 끝 515호실은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김근태 의장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고문을 받았던 조사실이다.
4층 박종철 기념전시실에서는 책과 옷가지 등 소박한 유품을 두었다. 관람객들 발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고인의 친필 편지 앞이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고문 은폐 시도, 6월항쟁,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 등 역사 맥락을 알리는 신문 기사들이 연대별로 정리됐다.
1층 정문은 30여 년 전과 달리 활짝 열렸다. 누구든 이름과 연락처 등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은 뒤 방문증을 목에 걸면 들어올 수 있지만, 중장년층 중에는 쭈뼛거리는 이들이 더러 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주소: 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 | 운영: 월~금 9:00~18:00 | 문의: 02-3150-1950, 1951)
박종철 거리와 이한열기념관
지난 13일 서울 관악구에서는 ‘박종철 거리’ 선포식이 있었다. 관악구는 박종철 열사가 살았던 관악구 하숙집 일대를 ‘박종철 거리’로 지정해 기념동판과 벽화를 설치했다. 또 근처 도덕 소공원을 ‘박종철 공원’으로 만들고, 내년 상반기 준공을 목표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박종철 기념관’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주소: 관악구 신림동 대학5길 9 | 문의: 02-879-5000)
마포구 이한열기념관은 방문객 증가를 고려해 2월9일까지 토요일 연장 개방을 시작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1987년 6월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유품과 영화 <1987>에서 쓴 수류탄, 의복 등을 함께 전시한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보고 싶은 얼굴’을 주제로 1987년 이후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의 사연’을 돌아보는 전시도 열리고 있다. (주소: 마포구 신촌로 12 나길 26 | 운영: 평일 10:00~17:00, 주말과 저녁은 예약 후 방문 | 문의: 02-325-7215)
무명의 시민들을 기억하는 ‘민주올레길’
한편 기록 없이 사그라진 무명의 청춘들과 시민들을 추모하는 길도 있다. 2010년 구성된 민주올레운영위원회는 해마다 ‘함께 걷는 운동’을 주제로, 시대의 분기점이 된 사건 지역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걷는 행사를 마련해왔다. 그중 ‘6·10민주유적 현장 탐방’ 코스는 6월항쟁과 기억의 공간을 돌며 이전 세대의 자취를 돌아볼 수 있게 했다.
코스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인권센터/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장소), 서울역 광장(6·26 국민평화대행진 장소), 한국은행 앞 분수대(6월 항쟁 때 격전지), 명동성당(6월 항쟁 농성·조성만 열사 투신 장소), 옛 성모병원(전태일 열사 임종 장소, 1987년 당시 정의구현사제단 입주), YWCA(YWCA 위장 결혼 장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장소), 백병원(김귀정 열사·조성만 열사 임종 장소), 남산 옛 국가안전기획부 건물(최종길 교수 의문사 장소, 민주인사 고문 장소)을 잇는다. 약 5㎞ 길이로 천천히 걸으면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남짓 걸린다.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실. 1987년 1월14일 사망한 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현장이다. 영화 개봉 후 하루 100여 명 넘는 방문객이 찾아오고 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 전경
옛 남영동 대공분실 내부
신림동 박종철 거리
이한열기념관 상설전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