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년 된 은행나무·강감찬 나무가 숨 쉬는 동네

서울 오래된 동네나무 순례기

등록 : 2018-02-08 14:00
수백 년에 걸쳐 동네를 지키며

사연과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동네 보호수·천연기념물 나무

서울 신림동 굴참나무

생명이 있는 것 중에 나무처럼 오래 사는 게 또 있을까? 대를 이어 수백 년에 걸친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자라는 나무가 있어 옛이야기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그 나무 옆을 지날 때마다 옛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살펴보면 서울에도 오랜 세월 간난신고를 견디며 동네를 지켜온 나무 이야기들이 전승돼오고 있다. 장태동 여행작가가 서울의 오래된 동네나무 중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나무를 순례했다.

은행나무가 있는 오거리

금천구 시흥5동 범일운수 종점에서 서쪽으로 약 300m 거리에 은행나무 오거리가 있다. 그곳에 ‘시흥동 은행나무’로 알려진 88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 그루는 도로 가운데 있고 다른 한 그루는 조금 떨어진 인도에 있다.


도로 가운데 있는 은행나무 옆에 선정비가 있다. 인도에 있는 은행나무 앞에는 조선 시대 동헌 관아 터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묻힌 능을 찾아갈 때 행궁으로도 사용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 중 도로 가운데 있는 나무는 높이 8.5m 둘레 6.1m다. 다른 한 그루는 높이 14m 둘레 8.6m다. 두 나무가 있던 곳은 조선 시대 금천현(시흥현) 관아가 있던 곳이라고 전한다. 관아 터가 현재 어디쯤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은행나무 두 그루가 관아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은행나무 주변에 ‘마방’ ‘아전 골목’ ‘비석거리’ 등과 같은 관아와 관련된 지명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곳에 관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시흥동 은행나무

시흥동 은행나무가 있는 도로 한쪽에 은행나무시장 들머리가 보인다. 긴 골목에 장터가 형성됐다. 공식적인 시장 이름도 없었다. 골목에 시장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냥 ‘골목 시장’이라고 일렀다. 골목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가 몇 해 전부터 ‘은행나무 시장’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알려준다.

은행나무 시장 옆에 원래 큰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빌딩이 들어서서 시장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골목 시장으로 시작해서 현재 은행나무 시장이 된 곳이 옛 시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커다란 짐받이가 있는 낡은 자전거를 끌고 시장 골목을 지나던 할아버지를 만났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할아버지는 왁자지껄했던 옛 시장의 이야기 끝에 옛날에는 은행나무 사이로 도랑이 흘렀다는 말을 곁들인다.

겨울나무가 있는 난곡 마을

신림동 골짜기 ‘난곡’을 지키는 터줏대감 ‘서울 신림동 굴참나무’가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 삼성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 끝부분에서 북서쪽으로 터진 골짜기에 들어선 마을이 ‘난곡’이다. 난곡 마을은 현재 난곡동이 된 신림3동과 함께 신림7동(난향동) 신림12동(미성동)을 아울러 이르는 이름이었다.

난곡 마을 뒷산의 옛 지명 중에 호랑이골이 있다. 실제로 호랑이가 살던 골짜기였다고 한다. 그만큼 골이 깊었다는 얘기다.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에 사는 호랑이에 의한 피해가 심해서, 호랑이를 누른다는 의미로 호랑이골에 절을 짓고 ‘호압’(虎壓)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게 바로 호압사다.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는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함께 내려온다.

신림동 굴참나무가 있는 곳은 현재 난곡동(신림3동)이다. 신림건영2차아파트 한쪽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아파트 건물 앞 움푹 파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다. 아파트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골짜기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아파트단지 옆에 남아 있는 산에서 옛 골짜기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음습한 북서향 골짜기를 지키며 서 있는 신림동 굴참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71호로 지정됐다. 높이 17m 가슴 높이 둘레 2.5m 밑부분 둘레 2.9m에 이른다. 나무의 수령이 천년이라는 설과 250년 정도 됐다는 설이 있다. 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면서 자신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것이 자란 나무라는 전설과 그 나무는 죽고 그 나무가 남긴 후계목이라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굴참나무 아래 떨어진 마른 잎이 지난해 무성했던 초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잔설 남은 땅 위 낙엽들 사이에 굴참나무 열매 껍데기가 보인다. 알맹이는 그 어떤 생명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나무 꼭대기 앙상한 가지에 새가 둥지를 지었다. 얼기설기 지은 새 둥지에 겨울 찬바람이 숭숭 들이칠 것 같다. 그러나 그곳도 생명이 깃들어 사는 보금자리다. 옛날 난곡 마을 산골짜기에 살던 사람들에게 난곡 마을 또한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굴참나무가 있는 마을에서 옛날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를 올렸다고 한다.

절에서 자라는 나무 세 그루

서대문구 안산 남쪽 기슭에 있는 봉원사에는 오래된 나무 세 그루가 자라고 있다. 봉원사의 역사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현재 연세대 터에 창건하고 ‘반야사’라고 이름을 지으면서 시작된다.

봉원사 느티나무

조선 시대 영조24년(1748년)에 찬즙, 중암 스님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영조는 봉원사라는 이름을 써줬다. 한국전쟁 때 영조의 친필 현판이 소실됐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삼봉 정도전의 글씨다. 1908년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가 창립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지냈던 공덕동 별장 건물 부재를 그대로 옮겨 지은 건물도 경내에 있다. 한국전쟁 때 미군과 국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봉원사에 있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두 그루는 조선 시대 영조 임금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느티나무 한 그루는 340년이 조금 넘었다. 높이 18m 둘레 4.3m다. 다른 느티나무는 440년이 조금 넘었다. 높이 14.5m 둘레 3.9m다. 440년 된 느티나무가 볼만하다. 넓게 퍼진 거북이 등에 혹이 난 것 같은 밑동에서 여러 줄기가 옆으로 뻗으며 자라는데 여러 마리의 용이 몸통을 뒤틀며 자맥질을 하는 모양이다. 줄기 하나가 건물 옥상 난간으로 뻗었는데 난간의 일부분을 부수고 나무가 편하게 자라게 했다.

두 느티나무의 배웅을 받으며 절 아랫마을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가는데, 마을 어느 집 지붕 위로 가지를 퍼뜨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약 200년 정도 된 회화나무다. 높이 18m 둘레 3m다. 그 나무는 절 아랫마을 옹기종기 모인 집들 사이에 있다. 집을 지을 때 나무를 자르지 않고 줄기와 닿는 지붕에 홈을 파서 나무를 살렸다. 나무가 집을 보호하고 집이 나무를 지켜주는 것 같다. 서로서로 그렇게 얽혀 살고 있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