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 되기

“나에게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세요”

18년차 주부 “결혼 전 자상했던 남편, 결혼 뒤 비난만 해요”

등록 : 2016-04-28 20:52 수정 : 2016-05-20 12:12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 중·고등학생 아이가 둘 있는 18년차 주부입니다. 결혼은 저의 삶을 순식간에 바꾸어 버렸습니다. 결혼 일주일 전 남편은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를 지키느라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충격적인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자살 충동과 심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나 이젠 다 나아서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결혼 전 남편은 나를 보석처럼 여겼고 뛰어난 유머 감각과 섬세한 배려심으로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전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한 상태였고, 부모님과 사는 삶이 편안해서 결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내게 부드럽게 접근하는 남편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은 변했습니다. 신혼 시절 임신을 해서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논문도 써야 했던 저에게 남편은 늘 불만을 말했습니다. 음식 못한다, 청소도 못한다, 결혼을 잘못했다며 집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남편을 위해 각종 요리를 했지만 형편없는 음식이라고 먹지 않고 나가 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여름에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며 코를 막고 날 더러운 벌레 보듯 했던 기억이 납니다. 출산 뒤 아이가 울면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결혼한 지 1년쯤 되던 날, 그는 내가 싫어서 직장을 멀리 있는 곳으로 간다며 내 곁을 떠났고 아이와 나를 남겨두고 한달에 한두번 집에 왔습니다.

남편에게 수시로 이혼하자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남편과 헤어지지 않은 이유가 남편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어서는 결코 아닙니다. 아이에게 좋은 가정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뭔가가 잘못이라면 나만 잘하면 이 가정은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내 삶에서 물러설 수 없다고, 그리고 부모님께 아픔을 안겨 주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잘못되면 동생들도 결혼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버텼습니다. 남편 앞에서 무릎도 꿇고 잘못했다고 늘 빌었습니다.

외국에서 같이 살 때도 남편은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었고, 다른 주부들과 비교했습니다. 제가 무능력자인데다 제 스스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며 그걸 사람들에게 말하겠다며 협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부부에게, 이웃에 사는 주부들에게 자신의 가족사며, 내 흉을 시시콜콜 늘어놓았습니다. 내가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 울기도 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직장 관계로 주말부부를 하고 있고, 남편은 많이 변했지만 아직 저는 남편을 좋아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남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저의 문제는 무엇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요? 나무

A. 고통의 시간을 꿋꿋이 견디고 감내하며 저력을 키워온 사람들을 저는 존경합니다. 그사이 그들에겐 고통을 직면할 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상처로 생긴 굳은살이 훈장처럼 보입니다. 나무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문제와 제대로 직면해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남편이 왜 그랬을까, 내 문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내용의 질문은 사실 문제를 회피하는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것들이죠.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 결혼하는 게 아니고, 결혼해서 어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무님 부부도 그랬을 겁니다.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어린, 그래서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소녀와 소년이 만난 것이지요. 부모님의 지지와 사랑에 보답하려는 착한 소녀와 엄마를 지키느라 유년기를 잃어버린 소년이 결혼했습니다. 소녀는 인간의 삶에서 밝음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소년은 세상의 어둠을 너무 많이 지켜본 아이였습니다.

특히 소년은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엄마를 지키면서 격심한 분열을 겪게 됩니다. 하나는 엄마의 시선이고, 하나는 아빠의 시선이지요. 엄마와 동일시됐을 때 소년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아빠의 시선으로 보면 엄마는 혐오스럽고 답답한 사람이었겠지요. 소년의 마음속에도 무능력한 엄마에 대한 분노가 자라고 있었을 겁니다. 어린 아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그 보호가 필요했으니 말이지요.  

엄마에 대한 염려와 분노는 그대로 아내에게 향했습니다. 소년은 아내가 엄마처럼 노력하지도, 문제를 직면하려고 하지도 않고, 무능력하다고 길길이 뜁니다. 늘 술취한 아빠가 집에 들어올 때 아들이 느꼈던 심정으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엄마, 피해요. 아빠에게서 도망쳐요. 그렇게 무기력하게 굴지 말고, 혼자 나가서 씩씩하게 살아 보란 말이에요!  

반면에 소녀는 세상의 어둠이 두려웠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건 옳지 않고 나쁜 것이니까요. 그래서 소년이 하는 말이 아득하게 느껴졌고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소년도 자신이 왜 아내를 괴롭히는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몰랐을 거예요. 알았다면 그렇게 오래, 자기 아내를 비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상대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끝없이 상대를 비난합니다. 불편한데 그 불편함을 해소할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상대에게 그 책임을 떠넘깁니다. 자신의 문제가 자기 안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튼 착한 소녀는 수많은 시간을 남몰래 울었을 겁니다. 자기희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굴욕도 감내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문제와 직면할 힘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특유의 강한 힘과 저력으로 소녀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어느덧 어른이 되었습니다.  

나무님, 우선 남편의 말을 들어 보세요. 그가 당신을 비난하거든 말을 중단시키세요. 나를 비난하지 말고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게 뭔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말해 봐요 하고 말하세요. 그의 말을 충분히 듣고, 당신이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당신도 이야기하세요.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외롭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그 많은 시간들을. 그에 대해 길고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으세요. 그리고 그를 더 지켜보세요. 그가 진짜 변한 건지 아닌지.  

그다음 전적으로 당신의 판단으로 미래를 결정하세요. 그가 요구한 것들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와 기꺼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롯이 당신의 행복과 존엄을 위해 결정하세요. 이제 남편의 불행한 과거도, 당신의 부모님도, 자식도 그 결정의 주요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박미라 심리상담가·<천만번 괜찮아> <치유하는 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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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