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운세 산업의 산 역사, 시각장애인 역술가의 터전
미아리 점성가촌 since1966
등록 : 2018-02-08 15:38
한때 백여 곳 성업한 점술거리 대명사
미래유산 지정…외국 관광객도 찾아
60~70년대 도시계획에 따라
도심에서 밀려난 역술가들 터전 찾아
하나둘 미아리에 모여들어 점술촌 형성
지금은 규모 줄어 30곳 정도 명맥
전체 운세시장은 성장…4.6~6조원
“한국 영화산업보다 규모 크다” 평가
오래된 가게 이야기에 웬 점집이냐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점을 미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거론 자체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과 대학로, 신촌 대학가 주변에 사주카페, 타로 점들이 번성하고 역술학원에 점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세계 9위의 한국영화산업 규모보다 “한해 시장가치가 4.6조에서 최대 6조원으로 평가된다”는 운세 산업 규모가 더 큰 사실(논문<일상생활의 위기와 운세 산업의 사회적 의미>, 정승안, 2011)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부에서는 여전히 미신으로 치부하는 점술·역학이 언제부터인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접근하기 쉽고 경제적 부담도 적은 형태의 심리치료사나 상담원(카운슬러)처럼 우리 곁에 자리잡고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웬만한 운세와 명운은 컴퓨터가 다 풀어주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역술가와 마주 앉아 점괘를 뽑고 사주를 풀어 운명을 엿보는 일이 퇴조하기는커녕 오히려 호황을 누리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점술 거리는 미아리 점성가촌이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는 6·25의 비극에 얽힌 노래로 널리 알려진 지명이다. 미아리 점술가촌은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나와 길음동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고갯길 양쪽에 형성돼 있다.
이곳에 모여 사는 점술인은 모두 시각장애인(맹인) 역술가들이다. 시각장애인 역술가가 오늘날의 점술과 운세 산업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지만, 고대 이집트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맹인은 점술가의 상징이었다. 미아리 점술가촌이 같은 문화권인 일본과 중국, 타이완의 점복 애호가들이 찾아오는 ‘명소’로 알려진 것도 이런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시도 이 유서 깊은 미아리고개의 점술가 마을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해 시민들의 관심과 응원을 유도하고 있다.
#고갯길 어귀에는 안내 표지석이 서 있다. 시각장애인 전용으로 고안된 8각 산통(점괘를 뽑는 통. 통 안에 산가지 8개가 들어 있다) 모양의 표지석 상단에 쓰인 ‘무슨 고민 있나요? 점 보고 힘내세요’라는 문구가 이곳이 점집 거리임을 알리고 있다.
표지석 중간에는 손으로 돌릴 수 있는 원통이 있다. 64괘 점괘가 적혀 있는 원통을 돌리면 그날의 점괘를 뽑아볼 수 있다. 기자도 한번 돌려보니 ‘일이 커질 수 있다. 방심하면 실패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점괘가 나온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마침 폭설이 내린 다음날 아침, 방심하다 눈길에 미끄러져 일이 커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조심조심 고개를 올라가게 만든다. 길을 따라 천도화여성예언가, 김익중철학관, 흑진주여성역학사, 철원철학관 등 간판들이 즐비하다. 골목 안쪽으로도 개나리여성역학사 등이 보인다. 건너편 길에는 매화부인예언가 등 사주풀이를 잘한다는 점집들이 들어서 있다.
30곳 남짓한 점집들이, 많으면 하루 2~3명 정도의 손님 운세를 보며 살아간다. 복채는 사주와 점을 모두 볼 경우 5만원. 간단한 점이면 2만원이나 3만원을 받고도 봐준다. 강남이나 신촌, 대학로 등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주카페보다는 비싼 편이지만, 이곳 역학사들은 적게는 30~40년, 많게는 60년 이상의 오랜 경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어 점의 수준(맞을 확률)이 높다고 자부한다.
#성북문화원 백외준 연구원과 함께 찾은 개나리여성역학사는 부부가 모두 시각장애인 역술가다. 남편 이수남(74)씨는 3~4살 때 천연두를 앓아 시력을 잃고, 9살부터 점술을 배워 14살 때 노점을 차려 점을 치기 시작했다. 올해로 60년 경력이다. 미아리에는 1976년에 들어왔다고 한다.
“본래 우리 맹인들은 전통적으로 점괘를 뽑아 점을 치는 육효가 중심이나, 요즘 사람들은 점과 사주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아 사주도 풀어준다. 나는 독경도 잘하는 편이다.”(주문을 외는 맹인 독경은 서울시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문화적 가치도 높다.)
점과 사주의 차이는?
“육효점이나 주역점은 괘를 뽑아 판단을 구하는 것이다. <삼국지>의 제갈량이나 이순신 장군도 이런 점을 쳤다. 사주는 음력 생년월일시를 음양오행 이론을 바탕으로 풀어 운명이나 운세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점은 특정한 시점이나 상황을 판단하는 데 유리하다. 보통 신수점이라고 한다. 연초에 보는 토정비결은 1년 신수점에 해당한다. 사주는 이미 정해진 운명을 밝혀서 미래를 예측해보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초·중·말년으로 나눠 평생운을 살필 수 있다.”
역술가들은 “점괘는 뽑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지만, 제대로 풀면 궁극적으로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판사가 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사의 상반된 주장을 듣고 최종 판단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취지다. 이수남 역술가 역시 점의 정확성을 확신한다. “문제는 점치는 사람과 점 보는 사람 사이의 믿음이다. 점 보는 사람이 점치는 사람을 믿고, 점치는 사람이 점 보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만큼 정확도도 높아진다. 점 보는 사람이 장난삼아, 심심풀이로 임하면 점치는 사람의 점괘 역시 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기만의 노하우라면?
“노하우란 게 있다면 오랜 경험일 것이다. 오래 하다 보면 보이지 않아도 괘를 뽑을 때 어떤 감 같은 것이 온다. 음식을 오래 한 사람이 빛깔과 모양만 보고도 맛을 알아채는 이치와 같다.”
그는 “역술업이 번창한다니 반가운 일이지만, 문제도 있는 것 같다. 학원에서 몇 달 공부한 것 가지고 점을 친다는데, 남의 운명을 살피는 일을 그렇게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며 말끝을 흐렸다.
#미아리고개에 점술가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철원철학관 이도병 역술가가 노점을 시작하면서부터라는 것이 정설로 돼 있다. 전통적으로 종로3가 일대에 모여 살던 서울의 역술가들은 6·25 이후 남산 일대로 터전을 옮겼다가 1960~70년대 초반 도시정비계획으로 쫓겨난 뒤 하나둘 미아리고개로 모여들면서 집단거주지를 이루기 시작했다. 당시 미아리는 공동묘지 터였던 서울 외곽 지역이라 집세가 싼데다, 전차종점이 있어서 오가는 인파가 많아 점집을 차리기 알맞은 지역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미아리 점성가촌은 1980~90년대 역술업이 활황을 맞을 때는 일반인 역술가들도 가세해 점집이 100곳이 넘을 정도로 성업했다.
그러나 지금 미아리에는 일반인 역술가들은 떠나고 고령의 시각장애인 역술가들만 남아 있다. 운세 산업이 영화산업보다 더 큰 ‘문화 산업’으로 자라는 동안 전통의 미아리 점집들은 오히려 쇠퇴 일로를 걸어 지금은 30곳 안팎으로 규모가 줄었다. 연소한 시각장애인들도 안마업 진출을 선호할 뿐 “배우기 어렵고 시간 많이 걸리는” 역술업을 더는 선호하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의 미아리를 배경으로 한 윤대녕의 단편소설 에는 ‘국화’라는 31살의 운동권 출신 여성 역술가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그는 “미아리에서 내세의 업장을 풀고나면 다시 ‘운동’으로 돌아갈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 속의 국화는 어떨까? 아마도 번창하는 운세 산업의 확장선을 따라 미아리를 나와 강남이나 신촌의 사주카페 거리로 진출하지 않았을까? 외환위기 이후 고학력자들이 대거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역술업은 현재 종사자 숫자가 공식적으로 50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미아리 점성가촌’은 그렇게 수많은 국화들에게 밀려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할지 모른다. 16살 때부터 점을 치기 시작했다는 매화부인예언가의 송오순(77) 역술가는 “신체적 핸디캡으로 인터넷 등에 능동적이지 못해서 그렇지, 실력 면에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곳이 미아리”라며 최근의 쇠퇴를 아쉬워한다. 연로해지면서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생활하는 송 역술가는 “나이가 들어 언젠가는 영업을 못 하게 되고, 점성가촌도 사라지게 될지 모르겠지만, 정신력이 살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손님을 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유서 깊은 점술 거리 이름이 왜 점성가촌인지 알 수 없다. 점성(占星)은 말 그대로 별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인데 미아리고개에 별점을 치는 사람은 없다. 미아리 점술가촌이나 점복가촌으로 고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취재 협조: 성북문화원,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자료: <미아리고개 이야기 자원 모음집(2014)>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의 미아리 점성가촌은 60여 년 역사를 지닌 점술가 마을로,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한창때는 점집이 100여 곳에 이를 만큼 규모가 컸으나 지금은 30여 곳이 남아 단골들의 운세를 열어주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중국·타이완 관광객들이 점을 보러 오는 국제적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왼쪽 사진) 점집들은 보통 점괘가 잘 나오도록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신장들을 모신다. 복식과 머리색까지 다양하다.(오른쪽 사진)
미아리 점술가촌에는 여성 점술가가 많아 가게에 꽃 이름을 많이 쓴다. 개나리여성역학사의 이수남·박정란씨 부부(왼쪽)와 송오순씨가 운영하는 사주전문 역술원도 그중 하나다.
미아리 점성가촌 역술가 들이 점치는 데 쓰는 산통과 산가지
손을 흔들 때 나는 청량한 종소리가 잡생각을 떨쳐버리게 한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