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못난 임금’이 머리 아홉 번 조아린 치욕의 나루

송파구 삼전나루 터

등록 : 2018-02-22 14:43 수정 : 2018-02-23 14:50
병자호란 때 인조가 백기투항한 곳

수항단이 차려진 곳에서 삼배구고두

삼전나루엔 청 황제 기리는 삼전도비

그러나 푯돌은 비와 멀리 떨어져

푯돌을 삼전도비 옆으로 옮기고

김창희 교수 청동 부조물도 모아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서울 송파구 잠실로 148 석촌호수 서호언덕 위로 옮겨진 삼전도비의 본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폐쇄회로텔레비전이 철제 구조물 안 비석을 24시간 감시한다.


지금으로부터 382년 전 병자호란이 터지자 남한산성으로 몽진 가던 인조의 행렬은 겨우 나룻배 한 척을 얻어 타고 한강 건너 삼전나루에 닿았다. 항전 47일 만에 인조는 푸른색 죄인 옷을 입고, 백기투항을 상징하는 백마를 타고,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왔다. 수항단(항복 의식이 열린 제단)이 차려진 삼전나루에서 치욕의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의식)를 행했다.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삼전나루에 세웠다. 높이 5.7m, 무게 32t짜리 비석에는 ‘대청황제공덕비’라는 황금 글자를 새겼다. 사람들은 이를 ‘삼전도비’라고 일렀다.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로 197 삼전나루터 푯돌을 향해 길을 떠난다. 치욕과 수난의 땅 삼전도는 섬(島)이 아니라 나루(渡)다. 세종 때 생긴 삼전나루는 한강나루, 노들나루와 함께 3대 나루 중 하나였다. 한강을 건너 경기도 광주와 여주 방면으로 나가거나,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고산자 김정호의 ‘경조오부도’에는 도성에서 중랑천을 건너 동쪽으로 나아가는 길이 두 갈래 그어져 있다. 광나루~남한산성 구간이 광진간로이고, 삼전도~남한산성이 광주로이다. 삼전도는 한양의 동쪽 진출입로였다. <동국여지비고>와 <대동지지>에도 “삼전도와 신천(새내) 사이에 뽕나무밭이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오늘의 잠실이다. 한강 흐름이 가끔 둘로 갈라졌는데 송파강 본류는 삼전도 앞으로 빠르게 흐르고, 신천 지류는 가물면 모래밭이요, 물이 넘치면 강이 됐다고 했다.

땅의 명멸에서 세월 무상을 느낀다. 17세기까지 위명을 떨쳤던 삼전나루는 왕조의 굴욕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져갔다. 삼전나루는 ‘삼밭나루, 삼밭게’라고 했는데 밭이 셋 있다는 뜻이다. 서해 바닷물이 미치지 않는 땅을 갈아 삼(대마)을 심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세밭나루, 뽕밭나루, 삼전나루를 거쳐 삼전도로 굳었다. 병자호란 이후 욕된 삼전나루와 삼전도비를 피해 옆 마을 송파나루로 사람과 물자가 옮겨갔다. 인지상정이다.

겸재 정선이 1741년에 그린 진경산수화 ‘송파진’. 오른쪽 초가집 위로 보이는 단칸 기와 건물이 삼전도 비각으로 추정된다.

삼전나루의 명성을 이어받은 송파나루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겸재 정선의 ‘송파진’은 검단산 능선 위를 병풍처럼 둘러싼 남한산성 성채가 인상적인 진경산수화이다. 1741년에 그려진 그림 오른쪽 마을 위쪽에 높다랗게 그려진 비각에 주목해야 한다. 말로만 듣던 삼전도 비각이다. 삼전도비의 존재와 비의 위치를 알려주는 증거이다. 진경산수화는 시선 속에 들어오는 제한적인 경물만을 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장면을 압축적으로 그려넣거나, 강조해서 재구성했다. 그래서 송파나루와 삼전나루가 한 폭에 담겼다. 가운데 관아의 왼쪽 마을은 송파, 오른쪽 비각 아랫마을은 삼전이다. 삼전나루와 송파나루의 위치를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딱이다.

송파나루터. 노주석 제공

1938년에 간행된 <속경성사화>의 경성 부근 명승사적 안내지도에서도 비석의 위치가 확인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이 거의 다 떠내려갔지만 비석은 건재했다. 수항단이 세워졌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번지가 비석의 옛터고 비석 앞이 삼전나루였다. 지금의 석촌호수 서호다.

그러나 그림이나 지도와 달리 삼전나루터 푯돌은 석촌호 서호사거리 조금 못 미친 인적이 드문 보도 위에 호수를 등진 채 덩그러니 서 있다. 삼전나루터 푯돌과 삼전도비가 석촌호 서호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헤어져 있는 게 우스꽝스럽다. 푯돌은 그동안 한강시민공원 잠실지구 동쪽 신천의 헬기장과 서호사거리 화단을 전전하면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삼전도 수난의 상징 삼전도비는 수장되고, 매몰되고, 훼손되는 모진 풍파를 겪었다. 한때 국보 164호로 지정됐다가 지금은 사적 101호로 내려앉았으며, 비각은 옛말이고 지금은 철제 건조물에 가둬진 모양새다.

오늘의 잠실 지형에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반세기 만에 휘몰아쳤다. 1971년 잠실 공유수면 매립 공사에 따라 광진교와 청담대교 사이 풍납동~송파동~석촌동~삼전동을 지나던 한강의 본류 송파강이 메워지고 모래벌판 신천 일대가 한강의 본류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때 잠실섬이 뭍으로 변했다. 서울의 유일한 호수 석촌호는 이때 막은 한강 본류의 흔적이다. 삼전도의 수난사는 간데없지만, 나루의 흥청거림은 여전하다. 송파강의 매립으로 생긴 땅 100만 평을 비롯한 340만 평에 들어선 잠실아파트 단지는 아파트 문화사 측면에서 우리나라 최초, 최대, 최고의 단지로 평가받는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고사가 실현됐다. 뽕밭이 아파트의 바다로 둔갑했다.

푯돌 답사 때 석촌호수 주변의 삼전나루터 푯돌(석촌호수로 197)과 삼전도비(잠실로 148) 그리고 송파나루터(신천동 32)를 돌아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아볼 여유가 있다면 잠실역 3번 출구를 나와 잠실 자전거대여소~석촌호수교~석촌사거리 이원(E1) 엘피지(LPG)충전소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서호사거리 카페 고고스 정문 앞까지 가면 된다. 그곳에서 푯돌을 확인하고 서호 끝자락 삼전도비를 구경한 뒤, 동호로 되돌아가 송파나루 푯돌을 보면 된다. 송파강이라고 했던 한강의 흐름과 삼전나루의 존재감을 느껴볼 수 있는 코스이다.

바쁘면 잠실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삼전도비를 먼저 보고, 석촌호수교를 건너서 직진하다가 석촌호수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동호 동남쪽 끝에 있는 송파나루공원 안 송파나루터 푯돌과 송호정, 송파유래비를 훑어본 뒤 다시 길을 건너서 서호사거리 쪽으로 직진해 삼전나루터 푯돌을 찾아 400여m 걸으면 된다. 세 곳 모두 옛 지번이 잠실동 47번지여서 도로명으로 찾아야 구별된다.

불과 40여 년 전 잠실은 섬이었으며, 석촌호수가 한강 삼전나루와 송파나루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나마 송파구의 유래가 된 송파나루는 알지만 송파나루의 원조 삼전나루는 알지 못한다. 삼전도는 부끄러운 과거사의 장소라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왜 삼전나루터 푯돌과 삼전도비는 호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할까?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의 2008년 고증 결과 삼전도비의 원위치는 지금 자리에서 30여m 아래 서호 물 속인 것으로 조사돼, 불가피하게 비석을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고 한다. 본래 삼전나루터에 항복의 제단과 삼전도비를 세웠다. 나루터 푯돌 따로, 삼전도비 따로가 아니다. 삼전나루터 푯돌을 삼전도비 옆으로 옮겨야 마땅하다. 푯돌에도 자존심이 있다. 또 1982년에 제작된 서울시립대 김창희 교수의 청동 부조물 ‘삼전도의 수난’도 삼전도비 옆에 가져다놓았으면 한다. 만 마디 말보다 한 장면이 더 웅변적일 때도 있다. 2010년 석촌동 289의3 어린이공원에 있던 비석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조물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 어린이공원에 있었던 김창희 교수의 ‘삼전도의 수난’ 동판.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노주석 제공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l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