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개국 일등 공신의 고대광실, ‘참수’ 이후 잘게 쪼개져
종로구 삼봉 정도전 집터
등록 : 2018-03-08 14:46 수정 : 2018-03-08 15:51
유학도 으뜸, 공적도 으뜸이라는
태조의 어필 하사받은 정도전
1차 왕자의 난 때 참수당한 뒤
조선 말 467년 만에 ‘신원’돼
풍수에 따라 명당자리에 집터 잡아
풍수도참설을 부인하며 뒤로는
무속 찾은 당시 사대부 모습 그대로
산소 터, 봉분 없고 작은 푯말 고작
서울 종로구 수송동 147 종로구청 정문 앞에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서 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에서 가까운 대한민국 심장부이다. 조선 후기 대표적 서울 인문지리지 <한경지략>에서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수송동)에 있었는데 지금 중학(서울에 설치된 국립 중등교육기관)이 자리잡은 서당 터는 정도전가의 서당 자리요, 지금 제용감(왕실용 옷감과 의복의 염색·직조를 담당한 관청) 터는 정도전가의 안채 자리요, 사복시(궁중에서 사용한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관청)는 정도전가의 마궐(마구간) 자리인데 모두 풍수설에 맞춰 지은 것이다”라고 소개한 바로 그 집터이다.
태조가 ‘儒宗功宗’(유종공종·유학도 으뜸이요 공적도 으뜸이다)이라는 어필을 내린 개국 일등 공신 정도전의 옛집은 종로구청·종로소방서·서울지방국세청·코리안리재보험·석탄회관·이마(利馬)빌딩에 걸친 드넓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삼봉의 비참한 최후 이후 고대광실도 잘게 쪼개졌다. 서당은 중학당이 되었다가 일제강점기 수송초등학교를 거쳐 종로구청으로 흘렀다. 마구간은 궁중 마구간 사복시가 되었다가 경찰기마대를 거쳐 이마빌딩으로 맥이 이어졌다. 안채는 제용감에서 불교관리기구인 사사관리서, 황성신문 사옥, 농상공학교, 수진측량학교 등 수많은 기관과 단체가 지문을 남겼다. 목은 이색의 영당(영정을 모신 사당)이 제자의 집터 옆에 자리잡은 것도 이색적이다.
태종은 계모(신덕왕후)의 능(정릉) 병풍석을 헐어 청계천 광통교 아래에 깔아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듯이 만고역적 삼봉의 집도 말발굽이 짓밟게 했다. 집터를 스쳐 간 숱한 역사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있다. 땅의 유전(流轉)이다.
‘풍수설에 맞춰 지었다’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정도전은 이른바 풍수명당이라 일컬어지는 집터를 고르고, 땅이름을 지었다. 한성부 중부 8방 중 ‘수진방’(壽進坊)이라는 지명은 ‘장수하는 동네’라는 뜻이다. 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 일부이다. ‘백자천손’(백 명의 아들과 천 명의 손자를 본다)의 명당으로 꼽힌다. 조선 초 경복궁 앞 육조대로변 의정부와 이조, 한성부 바로 뒤편이고 지금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대사관, 케이티(KT)가 뒤를 이었으니 관청이나 상업지구로는 복지(福地·집터의 운이 좋아 운수가 트일 땅)임에 틀림없다.
거주지로는 어떨까? 1398년 8월26일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방원 일파에게 급습을 당한 정도전은 남은·심효생과 함께 집 근처 송현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아들 넷 중 맏아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세종 때 형조판서에 올랐는데, 양택의 음덕으로 멸문지화를 면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삼봉이 ‘수명을 다했다’는 의미로 수진방(壽盡坊)이라고 동네 이름을 바꿨다. 정도전의 최후 현장은 김수근이 설계한 중학동 옛 한국일보사 어림이다.
<불씨잡변>(불교 교리 비판서)을 지어 조선의 국시 ‘숭유억불’을 실현했고, 도선에서 무학으로 전해지는 전통 풍수도참설을 부인한 정도전이 자신의 집터 입지는 풍수에 따랐다는 얘기다. 선비도 뒤로는 불교와 도가, 무속에 심취하는 게 당시의 풍속도였다.
삼봉이 처형된 날 <태조실록> 졸기(卒記)에 사관은 “고려사를 왜곡 폄하한 불충과 조선 왕실을 해친 천하의 간적이자 역적이며… 도량이 좁은데다, 시기와 겁이 많았다”라고 적었다. “승려가 종의 아내와 간통해 낳은 딸이 정도전의 외조모”라는 미천한 출신 성분도 빠뜨리지 않았다.
땅속에 묻혀 있던 삼봉이 명예를 회복한 것은 400년이 흐른 뒤였다. 정조 15년(1791년)에 <삼봉집>을 수정·편찬토록 했고, 고종 2년(1865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도성 건설의 공을 인정해 시호(문헌)를 내렸다. 무려 467년 만의 공식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버림)이다.
승자의 역사인 <태조실록>에 묘사된 정도전의 최후는 드라마처럼 장렬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예전에 공(이방원)이 이미 나를 살려주었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주소서”라고 목숨을 구걸했으나 정안군(이방원)은 가차 없이 목을 쳤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23의 1에 삼봉의 산소 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실학자 유형원이 펴낸 <동국여지지> 과천현 편에 “정도전의 묘는 과천현에서 동쪽으로 18리, 양재역에서 동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후손들은 우면산을 뒤진 끝에 묘를 발견했고, 1989년 한양대박물관에 의뢰해 묘 3기를 발굴했다. 1호분에서 몸통이 없는 머리 부분 유골이 나왔는데 왕자의 난 때 참수됐다는 실록 기록과 일치했다. 2호분은 부인 최씨의 묘로 추정됐다. 조선 초기의 고급 백자도 함께 출토됐지만, 결정적 물증인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가 도굴된 상태여서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마무리됐다. 유골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189 정도전의 사당 문헌사 부근에 모셨다.
삼봉의 서울 산소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양재역 3번 출구로 나와 서초구청과 국립외교원 사잇길로 걸어 올라가다 양재고 정문 앞 쌈지공원 안 서초동 산 23-1에 있다. 봉분은 사라지고 쌈지만 한 푯돌 하나가 전부다. 산소를 생각하고 찾다보면 지나치기 쉽다. 2013년 건립하면서 ‘삼봉 정도전 산소 터’라고 세웠다. 길섶에 있고 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공원 가운데로 옮기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크기는 작지만 오석 두 개로 세 봉우리 모양을 흉내냈다. 정도전의 호가 삼봉(三峯)이라는 것을 기린 것 같다. 그런데 정도전의 호가 왜 삼봉이며 어디를 일컫는지 알고나 세웠을까? 삼봉의 호는 외가가 있던 충북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땄다는 설과 서울 삼각산이라는 설 등 두 가지가 있다. 도담삼봉설에 대해서는 단양군에서 전설까지 곁들여 연관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삼봉집>에 전해지는 ‘산중에서’ 등 시조와 정도전이 30대에 떠돈 곳이 개성에서 멀지 않은 부평, 김포였다는 점에서 시조에 등장하는 삼봉의 옛집 ‘삼봉재’는 삼각산에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지금은 북한산이라고 통칭하지만 백운대·만경봉·인수봉 세 봉우리를 삼각산 혹은 삼봉이라고 일렀기 때문이다. 또 정도전이 거주한 삼봉은 깊은 산이고, 강이 등장하지 않는 점도 삼각산설에 힘을 싣고 있다.
삼봉은 한양천도 이후 ‘신도가’에서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라며 서울의 정체성이 한강과 삼각산에 있음을 드러내 보였다. 삼각산에 살았고, 삼각산을 칭송했다. 호도 삼봉, 집도 삼봉재, 문집도 <삼봉집>으로 지을 만큼 애착을 보였다. 그러나 삼각산에는 정도전의 족적이 없다. 삼봉 정도전을 위로해주고 싶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l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서울 종묘공원 안에 1995년 정도600주년 기념으로 세운 삼봉정도전시비에는 그의 시 ‘진신도팔경시’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 정도전의 초상 부조도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 23의1 양재고등학교 정문 앞 쌈지공원 안에 서초구청이 2013년 세운 ‘삼봉 정도전 산소터’푯돌. 1989년 유족의 의뢰로 발굴한 결과, 정도전의 묘로 추정됐으나 묘지가 도굴돼 확인은 불가능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