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이괄 반란군 주둔지·일본 공사관 자리…역사의 소용돌이 터

서대문구 경기중군영 터

등록 : 2018-03-22 14:33 수정 : 2018-03-23 14:05
청수관 터·천연정 푯돌과 나란히

한양~중국의 출발지·기착지

경기감영 소속 병력 주둔지

한양 최고 명소의 하나

조선 첫 외국 공관인 일본공사관이

임오군란 때까지 쓰던 장소

고종이 청수관 터 일본에 내줘

학교 이름에 역사적 장소 못 남겨


서울 금화초등학교 정문을 기준으로 왼쪽에 청수관 터, 오른쪽에 경기중군영과 천연지 푯돌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단위면적당 최대 푯돌 집결지. 제자리에 옮겨야한다는 지적이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무슨 사연일까.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13의1 금화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푯돌 3개가 나란히 있다. 어른 걸음으로 30보 안에 푯돌 3개가 있으니 아마 서울 시내에서 단위면적당 최대 개수일 것이다. 장소의 역사가 중첩된 사대문 안도 아니고, 서대문 밖 옛 의주로(통일로)의 길목에 이렇듯 푯돌이 몰려 있는 이유가 심상찮다. 세상은 옛 풍광을 가늠할 단서조차 없이 변했다. 금화초등학교를 둘러싼 재개발 아파트 숲이 인왕산과 안산(무악산)을 가릴 듯 치솟았고, 도로를 오가는 차량의 물결이 숨 가쁘다. 금화초등학교 주차장과 농민신문사 신축건물 사잇길로 올라가면 감리교신학대학교 정문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동명여자중학교가 금화초등학교와 등을 맞대고 있다. 역사의 흔적인 푯돌이 3개나 있을 만한 장소로 보이지 않는 예사로운 풍경이다.

푯돌부터 찬찬히 살펴보자. 5호선 서대문역 2번 출구에서 독립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금화초등학교 교문 왼쪽에는 ‘청수관 터’ 푯돌이 홀로 벽에 붙어 있고, 오른쪽에는 ‘경기중군영’과 ‘천연정’ 푯돌이 사이좋게 나란히 있다. 경기중군영 푯돌의 글자는 닳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경기중군영과 천연정 푯돌 옆에는 약초와 산나물 좌판이 깔려 있다. 30여 분 머무는 동안 푯돌에 눈길 주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존재감 없이 널브러진 푯돌은 좌판을 둘러보는 구경꾼이나 행인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3개의 푯돌이 옹기종기 모인 이유는 조선시대 이곳이 한양에서 중국을 오가는 길의 출발지점이자 도착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일단 세워놓고 보자’는 식의 행정편의주의의 부산물일 수도 있다.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조선 초 ‘서지’(西池)라는 연못이 있었다. 후에 ‘천연지’라고도 했는데 연못가에 지은 정자 이름이 천연정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한양의 3대 연못 중 남대문 밖 ‘남지’(南池)는 별칭이 없고, 동대문 밖 ‘동지’(東池)는 ‘연지’라고 일렀다.

천연동이라는 동이름이 여기서 비롯됐다. 고려 때 남경(한양의 고려 때 이름)으로 행차하던 왕들이 비를 피하거나 쉬어가던, 우산같이 생긴 소나무가 있었기에 ‘반송’(盤松)이라고 하고, ‘반송정’이란 정자를 지었던 바로 그곳이다. 내력 깊은 반송은 조선시대 이 지역의 이름 ‘반송방’으로 이어졌다.

천연정과 서지. 노주석 제공

<태종실록>에 보면 왕이 내시 출신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파게 하였다. ‘모화루’(옛 영은문 옆에 있던 중국사신 영접 장소)에서 150보 남쪽에 있고, 연못 길이는 100m가 넘었고, 깊이도 두세 길이나 됐다. 개성 숭교사의 연꽃을 배로 실어 옮겨 심었으며 한 달에 쌀 열 말을 먹어치울 만큼 잉어가 넘쳤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전기에는 중국 사신 접대 장소나 중국을 오가는 이를 마중하는 장소로 애용됐다. 한양 최고 명소 중 한 곳이었다.

조선 후기 경기중군영이 연못 위쪽 지금의 동명여중 자리에 들어섰다. “웬 경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 강북삼성병원 앞에 있던 서대문을 나서자마자 만나는 서울적십자병원 자리가 옛 경기감영 자리였다. 400m 떨어진 경기중군영은 경기감영 소속 중군 병력이 주둔하던 곳이다. 경기관찰사가 있는 경기감영은 1896년 수원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반송방을 포함한 성저십리(도성에서 10리)지역은 한성부에서 다스렸으니 경기감영도 행정구역상 한성부에 속했다. 옛 경기감영에서 영은문까지 길가를 꽉 메운 아파트 단지 이름이 ‘경희궁자이’이다. 아무리 영리 목적 작명이라지만 한양도성 밖 경기감영 자리 옆 아파트에 왕궁 이름을 붙였으니 참으로 터무니없다.

경기중군영 터가 청수관이다. 이곳에 조선 최초의 외국 공관인 일본공사관이 들어선 것은 1880년 12월의 일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은 뒤 일본이 경기중군영을 점거하고, 1882년 임오군란 때 불타기 전까지 공사관으로 썼다. <고종실록> 1879년 4월24일 자에 보면 “하나부사 일본대리공사가 수행원 15명, 호위병 15명, 종 4명과 함께 청수관으로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이 청수관을 일본에 내준 것이다. 청수관은 임진왜란 이후 서지 연못가 건물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면서 붙은 또 하나의 이름이다.

일본공사의 이름을 딴 죽첨공립보통학교(금화초등학교의 전신)가 들어서면서 연못은 메워졌다. 금화초등학교와 동명여중 터에 첩첩이 쌓인 역사의 흔적을 보면 이곳이 조선시대 핫플레이스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푯돌 3개를 금화초등학교 앞에 세운 것은 명백한 행정편의다. 지금이라도 금화초등학교 앞에는 천연정 푯돌 1개만 남기고, 경기중군영과 청수관 푯돌은 동명여중 앞으로 옳기는 것이 맞다.

조선 정조 때 작품으로 추정되는 경기감영도. 12폭 병풍 속에 서대문밖 서서울의 경관과 풍속, 건물 등이 담겼다. 경기중군영과 서지, 천연정, 반송도 보인다. 노주석 제공

이 모든 기록이 당시 그림과 지도에 오롯이 남아 있다. 18세기 후반 정조 때 서대문 밖 반송방 일대의 경관을 상세하게 표현한 지도 형식의 기록화 ‘경기감영도’에 200여 년 전 풍경이 전해진다. 작자와 연대 미상이지만 그림 속의 경관과 건물 그리고 지리적 공간 비교를 통해 추정한 것이다. 도화서 소속 화원이 그렸을 법한 수준급 솜씨다. 서대문구 합동·현저동·냉천동·옥천동·영천동·천연동 일대와 종로구 교남동·교북동·무악동·송월동·송현동·행촌동·홍파동 일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세로 135.8㎝, 가로 442.2㎝ 크기의 12곡 병풍 중 5~12폭 부분이 인왕산 바깥에서 안산까지 서울 서부 지역 풍경이다. 서대문을 나서자마자 경기감영 관아가 인왕산을 배경으로 터 잡았다. 모화관과 영은문 가는 큰길이 훤하게 뚫려 있고, 험준한 고개를 형성하고 있는 무악산 바로 아래 경기중군영이 보인다. 경기중군영과 모화관 사이에 서지가 제법 크게 그려져 있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서지 가에 있던 천연정이 경기중군영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1840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수선전도’에도 서대문 밖 경기감영과 서지, 천연정, 모화관, 영은문 등이 표시되어 있다.

경기중군영은 일본과 벌인 7년 전쟁(임진왜란·1592~1598)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1624년 북병사 이괄의 난 때 도성을 점령한 반군이 주둔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무악산에 진을 친 관군과 산 아래 관아에서 편하게 전투를 치른 반란군의 승패는 뻔한 것이다. 이때 북방을 지키던 1만 정예군이 와해되면서 이후 청나라의 침공을 제지할 국방력을 상실했다.

이 일대는 천연동·냉천동·옥천동·영천동 같은 동네 이름에서 보듯 무악산의 지맥 금화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지배하는 물의 고향이다. 반송, 서지, 천연정, 청수관이 있던 공간에 들어선 학교 이름에 장소의 역사가 살아남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작은 연못이라도 하나 파서 땅의 내력을 알릴 생각을 왜 못했을까.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