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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피케이션에 떠밀려 하는 이사는 더는 없겠죠?”

성수동 공공안심상가에 새 둥지 튼 ‘공씨책방’ 장화민 대표

등록 : 2018-03-29 14:55
45년 역사 ‘서울시 미래유산’ 지정

신촌 건물주 바뀌며 임대료 폭등

성동구 심사 6 : 1 경쟁률 뚫고 선정

60~70% 임대료에 5년간 임대 보장

지난 20일 성동구 성수동 ‘공씨책방’에서 장화민 대표(왼쪽)와 남편 왕복균씨가 한 권에 20만원 정도 하는 한적을 들고 있다.

지난 20일 오전 성동구 성수동 롯데서울숲 아이티(IT)캐슬을 지나던 주민 김규임(49)씨는 1층에 새로 생긴 헌책방 ‘공씨책방’을 보고 호기심에 들렸다. 36㎡(약 11평) 남짓 되는 공간이었지만, 오래된 책뿐 아니라 옛 음반(LP)도 많았다.

김씨는 책장에 꽂힌 책을 구경하다 깜짝 놀랐다. 30여 년 전 중학생 때 샀던 책과 같은 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사진 잡지 <라이프>가 발행한 고전 영화배우 사진첩이었다. 중학생이 사기엔 너무 비싸 일주일 동안 어머니를 졸라 겨우 샀던 책이어서 기억이 생생했다. “사장님, 혹시 제가 예전에 버린 책 갖다놓으셨어요?” 김씨가 농담을 던졌지만, 장화민(61) 공씨책방 대표는 빈 책장에 책을 채우고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972년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처음 문을 연 공씨책방은 45년 역사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곳이다. 그러나 22년 동안 영업해온 서대문구 신촌 건물의 주인이 바뀌면서 위기가 닥쳤다. 130만원인 월세를 2배가 넘는 300만원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월세라 신촌의 다른 점포를 알아봤지만 한껏 오른 임대료에 마땅한 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집이 서울숲 앞이라 성수동에도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왔어요. 그런데 임대료가 너무 비싸 지하밖에 갈 데가 없었어요. 조그만 곳도 월세 200만원이 넘더라고요.”


오갈 데 없어진 공씨책방에 올 초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성동구에서 급격한 임대료 상승으로 둥지 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에 처한 임차인들이 오래 장사할 수 있도록 전국 최초로 공공안심상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5년 동안 임대를 보장하고, 월세를 그대로 유지하는데다 별도의 권리금과 보증금도 없었다. 장 대표의 남편 왕복균(63)씨는 “임대료에 관리비와 부가세까지 합쳐 한 달에 내는 돈이 90만원이 채 안 된다”며 “주변의 60~70% 수준으로 매우 저렴한 편”이라고 말했다. 원하면 임대 기간을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성동구 공공안심상가 운영위원회가 젠트리피케이션 피해 정도와 지역사회 기여와 연계성, 성장 가능성, 이주 계획 등을 심사한 결과, 공씨책방은 6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주 업체로 최종 선정됐다.

지난 2월3일 기존 가게에서 나온 공씨책방은 예전에 창고로 쓰던 신촌 지하 공간에서 우선 영업을 시작했다. 장 대표는 “갈 데가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영업하면서 책을 정리하고 있다”며 “지하라서 처음 오시는 분은 거의 없고, 기존 단골들만 물어물어 찾아오는 형편”이라고 했다. 10만 권이 넘는 책이 들어오기엔 36㎡는 너무 좁아 당분간 두 집 살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넓은 신촌 책방은 교양·인문·사회과학 위주로, 좁은 성수동 책방은 오래된 서적과 옛날 음반 위주로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기업형 중고서점에는 오래된 책이 없잖아요. 저희는 가끔 지역에서 오래된 책을 찾는다는 전화도 와요. 어렵게 찾아서 보내드리면 정말 기뻐하시니까 보람을 많이 느끼죠. 예전과 달리 요즘은 절판된 만화 같은 게 비싸요. 상태에 따라 다르긴 한데 10만원 넘는 것도 있어요. 현재 성수동 책방에 책은 5천 권, 음반은 3만 장 정도 갖다놨는데 그 가운데 한 권에 20만원 정도 하는 한적(한문으로 쓴 책)도 몇 권 있어요.”

공씨책방을 둘러보던 손님 김씨는 “예전에 좋아했던 가수들 음반도 많다”며 추억에 젖어 헌책방에 한참을 머물렀다. 김씨는 서점을 나서며 “남편이 옛 물건을 좋아하는데, 공씨책방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이번 주말에 같이 가보자고 한다”고 말했다.

장 대표 부부는 한 달 넘도록 신촌과 성수동을 오가며 계속 정리만 하고 있다. 신촌 지하 책방에서 영업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 가게에서 10만 권이 넘는 책을 옮기는 것부터 엄청난 작업이었다. 남편 왕씨는 “성수동 책방은 3월 초부터 책장을 짜고 신촌 책방에서 책과 음반을 옮겨오고 있는데, 책이 아직 덜 왔다”며 “영업을 하면서 여기 성격에 맞게끔 선별하고 분류해서 와야 하니까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6년 이모부의 부탁으로 공씨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광화문으로, 신촌으로, 성수동으로 몇 번의 이사를 경험한 장 대표도 이사만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고 했다. “책방 하는 사람들이 이사 한번 하고 나면 이거 계속해야 하나 할 정도로 책방이 이사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녜요. 네 번 이사하고 결국 책방 그만두신 분도 계세요. 이번에 겪어보니까 주인이 바뀌거나 나가라고 하면 대책이 없어요. 여기 공공안심상가에서 더는 이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글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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