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삼일천하 풍운아 집터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생각하다

종로구 화동 김옥균 집터

등록 : 2018-04-05 14:49
그의 집터인 정독도서관 자리는

붉은 기운이 지배해 ‘홍현’이라 해

공교롭게도 성삼문과 생거지 공유

1880년대 개화파 인물 집중 주거

10년간 떠돌다 암살된 뒤 능지처참돼

도쿄 아오야마공원 묘지에 비석

박영효 “사람 잘 사귀지만 덕 부족”

막부 말 사카모토는 사후 존경받지만


그는 외세 의존 한계로 동상도 없어

김옥균의 집터인 서울 종로구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안 서울교육박물관 앞 담장이 허물어지고 붉은 언덕을 알리는 홍현 푯돌이 세워졌다.

구한말 ‘삼일천하’의 풍운아 김옥균(1851 ~1894)의 집터가 있는 종로구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자리는 붉은 기운이 지배한다. 정독도서관 안 서울교육박물관 뒤편 화단에 김옥균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는 듯 없는 듯 놓여 있는데, 사람들은 이 일대의 흙이 유달리 붉다 하여 “붉은재”라 이르고 ‘홍현’(紅峴)이라 적었다.

붉은재와 꽃동네 ‘화동’은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장소인문학적 관점으로 따져보면 붉은 언덕에 화염을 일으키는 화기도감(총과 포를 만드는 관청) 터가 들어선 데 이어, 사시사철 꽃과 과일을 궁중에 공급하는 장원서가 세워진 점도 공교롭지 않다. 더욱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두 사나이, ‘사육신’ 매죽헌 성삼문(1418~1456)과 고균 김옥균이 400년 세월을 두고 생거지(살던 곳)를 공유한 사실에 이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화동(花洞)이라는 동명은 두 갈래 기원설이 있다. 하나는 화기도감이 있어서 ‘화기동’(火器洞)이라고 하다가 ‘화개동’(花開洞)으로 음이 변한 끝에 결국 화동이 됐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꽃을 다루는 장원서가 있어서 ‘꽃이 피는 동네’(花開洞)를 거쳐 ‘꽃동네’(花洞)로 변했다는 것이다. 화동은 동쪽으로는 가회동, 남서쪽으로는 소격동, 남쪽으로는 안국동, 북쪽으로 삼청동, 북서쪽으로 팔판동과 붙어 있는 유서 깊은 동네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혈기가 요동치는 땅에 피어난 꽃과 음악, 음식은 어울리는 법이다. 화동 34번지에 왕이 먹던 약수 ‘복정’ 터가 남아 있고, 정독도서관 서북쪽 화동 23번지에 장악서(궁중의 음악을 담당한 관청) 터도 있다. 화동 23~24번지 일대 옛 장원서 앞 다리는 삼청동과 팔판동의 길목이었고, 경복궁에서 이 다리를 건너 홍현을 오르면 가회동, 재동에 닿았다.

성삼문 집터는 화동 1번지, 지금의 정독도서관 서북쪽에 있었다.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에 ‘장원서는 성삼문의 옛집이다. 선생이 심은 소나무가 말라죽어 밑동만 남았는데 이를 잘라 거문고를 만들었다고 한다’는 옛 기록이 각각 전한다. 성삼문 집터에 장원서가 들어선 것은 세조 12년 1466년의 일이니, 장원서 터와 성삼문 집터 푯돌은 한자리에 나란히 세워지는 게 순리이지만, 무슨 영문인지 장원서 터 푯돌은 화동 25-1 뒷골목에 외떨어져 있다.

화동의 절반을 차지하는 정독도서관은 1976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경기중·고등학교였다. 1900년, 최초의 중등학교인 관립 한성중학교, 1921년 관립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기공립중학교를 거쳐 1951년 경기 중·고교로 개편됐다. 역적으로 몰려 가산을 몰수당한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을 학교 터로 활용한 것이다. 이후 정독도서관 본관 터에 있던 을사오적의 매국노 박재순의 집도 편입됐다.

김옥균이 활동하던 1880년대 개화파의 인물 지도를 그려보면, 북촌에서 개화사상이 움트고, 근대 교육과 의학의 싹이 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박물관이 들어선 김옥균의 화동 집을 중심으로 지척인 운동장 자리에 서재필이 살았다. 단짝 서광범의 집은 덕성여고와 풍문여고 사이쯤에 있었다.

개화사상은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발화됐다. 헌법재판소 안 600년 묵은 백송이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집 뒤뜰에 있었다. 갑신정변의 또 다른 주역 홍영식의 집은 박규수 집과 담을 대고 있었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은 난리 통에 비명횡사한 홍영식의 집을 제공한 것이다.

박규수는 역관 오경석, 한의사 유홍기, 승려 이동인과 함께 양반가의 자제들을 이끌었다. 김옥균을 리더로 해서 서광범·윤치호·서재필·유길준이 핵심 멤버였다. 여기에 철종의 부마 박영효와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 홍영식, 관료 김홍집, 김윤식 등이 가담했다. 실질적 지도자는 대치 유홍기였다.

개화파에서 친일 거두로 변신한 박영효는 춘원 이광수와 1931년에 한 인터뷰에서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이 재동에 모였지요… <연암집>(연암 박지원의 문집)의 양반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라고 회고했다. 또 “김옥균의 장처(장점)는 교유요. 그는 교유가 참으로 능하오. 글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시문서화를 잘하오. 그러나 단점이라면 덕이 모자라고, 모략이 없는 것이오”라고 평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정독도서관 안 서울교육박물관 앞에서 가회동 넘어가는 길가에 붉은 흙으로 다져진 돌계단이 2016년 조성됐다. 그 아래 ‘紅峴’(홍현)이라는 푯돌도 세워졌다. 길손이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단절됐던 공공 공간 속에 묻혀 있던 붉은 흙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케케묵은 과거지향적 교육박물관과 달리 정독도서관 일대는 마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몇 백 년 묵은 회화나무와 아름드리 측백나무, 귀하신 몸 백송 두 그루와 중앙 분수대를 둘러싼 장대한 등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도서관 1동과 2동 사이 화단에 고려 때 우물과 굽은 소나무가 서 있는데 매국노 박재순의 집터였다.

터를 감도는 붉은 기상도 완전무결할 수는 없는가보다. 정독도서관 중앙에는 1992년 문화부가 세운 조각가 김영중 작품 ‘겸재인왕재색도비’가 인왕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서울 시내에서 백악과 인왕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명소가 바로 여기일 듯하다.

망명객으로 10년을 떠돌다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신은 사후 능지처참을 당했다. 여섯 토막 난 시신은 팔도의 저잣거리에서 전시된 뒤 버려졌다. 머리는 한강 변 양화진에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는 글을 달고 매달렸다. 그를 흠모하던 일본인이 의발(옷과 머리털)을 구해 도쿄 분쿄구 신쇼지 사찰 경내에 모셨다. 1만엔짜리 일본 지폐에 등장하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찰 주지에게 특별 부탁한 것이다. 또 도쿄 아오야마공원 외국인 묘지에 비석이 있다. ‘金公玉均之碑’(김공옥균지비)라고 새겨진 키 3m, 폭 1m의 비교적 큰 석비 역시 일본의 당대 유력 정치인들이 주선한 것이다. <서유견문록>을 쓴 유길준이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어간 하늘나라의 김옥균공이여”라고 묘비명을 썼다.

능지처참된 뒤 한강나루터에 내걸린 김옥균의 머리.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고균 김옥균의 이름 앞에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패장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홍영식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지만 ‘근대 우정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서울 한복판 명동 서울중앙우체국 앞에 동상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서재필도 독립문과 <독립신문>의 정신을 대표하는 선각자로 서대문 독립공원에 동상을 남기고 있다. 김옥균은 멍에를 벗지 못했다. 사후 2년 뒤 1896년 갑오개혁 때 그는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되고 복권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는 12년 전 그가 ‘내건 혁신정강 14조’ 중 제7조에서 제일 먼저 없애자고 한 규장각의 우두머리 자리였다.

김옥균의 화동 집터에 서서 일본 막부 시대에 종언을 고한 사카모토 료마(1835~1867)를 생각한다. 일본 1천 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1위에 뽑혔을 만큼 일본인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다. 동시대인 김옥균의 인간적 매력과 능력은 료마를 능가했지만 사후 평가는 천양지차다. 김옥균은 죽어서도 패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에 의지한 위로부터의 일방적이고 급진적 혁명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인지 우리 곁에는 그의 동상 하나 남지 않았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