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임란 전까지 지속된 조·왜의 평화 공존 창구

중구 인현동 동평관 터

등록 : 2018-04-12 14:52
왜국 사신들 머물러 ‘왜관’으로 불려

1409년 왜구 노략질 막기 위해

제한된 통상 창구로 설치해

임란까지 울며 겨자 먹기식 운영

닷새마다 연회 베풀어 대접했으나

동평관 가는 길 임란 때 침투로로 쓰여

동평관 근처 살던 이순신·류성룡 등

평소 왜인 동향 살펴 임란 승리 이끌어


이순신 장군 생가 터 푯돌이 서있는 명보아트홀 앞 보도에서 바라본 충무로 일대.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동평관 푯돌이 있다.

서울 중구 인현동 2가 192번지 옛 동평관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동평관 터는 지하철 을지로3가역 8번 출구로 나와서 마른내길을 따라 중구청사거리 쪽으로 345m 가다보면 보이는 인현어린이공원 안에 있다. 덕수중학교 정문 앞이니 학교를 찾는 편이 쉽다.

공원 화단에 ‘동평관 터, 조선 시대에 일본 사신이 머물던 곳’이라고 열여덟 글자가 새겨진 푯돌이 한 점 서 있다. “일본이라…” 내용으로 미뤄 동평관의 존재와 얽힌 과거사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인현동은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의 집이 있어서 ‘인성현’이라고 이르다가 ‘인현’으로 줄었다는 것이 우리가 흔히 들어온 지명의 유래이다. 그러나 웬만한 책이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이 동네의 본래 지명은 ‘왜관’ 또는 ‘왜관동’이었다. 동평관으로 말미암아 생긴 이름이다. 임진왜란 이후 이름 세탁을 했지만 이전 기록과 지도 표기가 여럿 남아 있다. 사실 동평관에 일본 사신이 머물렀다고 해서 왜관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침소봉대랄 수 있다. 중국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남대문 앞 대한상공회의소)이나 영접 장소인 ‘모화관’(서대문 밖 독립문 근처)이 있던 동네에 사대나 모화식 지명을 붙이지 않았다. ‘태평로’라는 신작로는 일제 때 작명이다. 야인이라고 깔보았던 여진족이 묵던 ‘북평관’(동대문 안 옛 이대목동병원 자리) 역시 ‘야인촌’이나 ‘야인동’이라고 하지 않았다.

유독 왜관동이라는 지명이 남은 이유는 뭘까. 물자와 사람이 흥청거려 지명도가 높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을 점령한 왜장 마시타 나가모리가 하고많은 곳 중 동평관 윗동네 왜장대에 진을 친 이유도 궁금하다. 이후 318년 만에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가 동평관이 있던 남촌(청계천 이남의 서울)에 공사관을 짓고, 그 터에 통감부와 총독부를 세운 것 또한 공교롭다. 서울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명동 가까운 호텔에 묵고, 명동에서 쇼핑을 즐기는 것을 보면 일본의 ‘남촌 탐닉’은 집요한 구석이 있다.

동평관은 푯돌에 새겨진 것처럼 단지 일본 사신용 숙소가 아니다. <동국여지비고>에 “동평관은 일본과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곳”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일본뿐 아니라, ‘남만’(南蠻)이라고 일컬어지는 류큐(오키나와), 샴(태국), 자바(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시아 방면 사절단이나 상인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연회를 베풀고, 상품을 거래하던 장소였다. 세종 13년과 성종 24년에 류큐 국왕의 사신을 동평관에 거처하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왜인의 남촌 진출은 1409년(태종 9년)에 시작됐다. <태종실록>에 “(태종비 원경왕후의 두 동생인) 민무구와 민무질의 서울 집을 헐어서 그 재목과 기와로 동평관과 서평관을 짓고…”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서평관도 함께 있다가 동평관으로 합쳐졌다. 건물 4채에 50여 명이 머물 수 있었지만 늘 비좁아서 일부는 절에서 묵게 했다고 한다.

일본이 처음 남촌에 틈입한 일본공사관 자리에 세워진 옛 통감관저. 사진 왼쪽 은행나무는 아직도 건재하다.

왜인들은 등급에 따라 대개 열흘에서 한 달 정도 체류하되 동평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엄하게 통제했다. 이 때문에 저항과 시위가 일어났다는 보고가 수시로 나온다. 닷새마다 식량과 연료를 무상으로 지급했고, 사흘에 한 번꼴로 연회를 베풀었다. 왕을 알현할 때 일본 막부(바쿠후)나 류큐 국왕 사절은 종2품 서품에 맞춰 대우했다. 동평관은 임란 때 불탔으나 재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소한 ‘동평관·서평관 터, 임진왜란 전까지 한양을 오갔던 일본, 류큐 등 동남아시아 사절단과 상인들이 머물던 숙소’라고 푯돌에 새겨야 하지 않을까.

동평관의 역할과 위치가 중요한 이유는 이후 조선사에 미친 영향 때문이다. 멋모르고 동평관을 드나들던 일본인들이 한양 남촌의 지정학적, 군사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것이다. 일제강점기 남촌은 서울의 심장부였다. 1927년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를 지어 옮겨가기 전까지 총독부와 총독관저, 정무총감 관저, 헌병사령부 등 식민통치의 수뇌부와 정치·경제적 수탈 기관이 남촌에 몰렸다. 조선신궁과 경성신사, 조선사편수회, 동본원사 경성별원 등 정신적·종교적 수탈 기구들도 깃들었다. 일본 거류민들은 본정(충무로), 명치정(명동), 황금정(을지로), 대화정(필동), 장곡천정(소공동)에 일본식 가옥을 짓고 살았다. 조선의 궁궐과 북촌 거주지를 한눈에 내려다보기에 남산만 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촌은 현재 서울의 대표적 ‘다크 투어리즘’(역사교훈관광) 공간이다.

남산 회현구간을 심하게 갉아먹은 옛 조선신궁.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대일 교섭사에서 동평관의 역할은 중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쟁으로 가물가물하다가, 강점기를 거치면서 까마득히 사라졌다. 고려를 망국으로 몰아넣었고, 조선이 울며 겨자 먹기로 동평관을 운용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왜구(일본 해적)의 약탈사도 더불어 잊혔다. 조선통신사라는 시혜적인 대일 교섭사만 부각하면서 동평관을 통해 200년간 지속된 교섭사의 실체를 간과했다.

동평관은 평화와 공존을 의미했다. 고려 말인 1223년부터 조선이 건국된 1392년까지 169년간 극심했던 왜구의 노략질에서 벗어나 임란 이전까지 태평성대를 보장한 외교·무역 창구였다. 연구 논문과 자료에 따르면 왜구의 침탈은 1350년부터 40년간 무려 495회에 이르렀다. 황해·평안·강원·함경도 등 한반도 전역이 약탈의 대상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내이포(진해), 염포(울산), 부산포(부산) 등 ‘삼포’(三浦)에 눌러앉은 왜인이 1466년에 1650명, 1475년에 2300여 명, 1494년에 3105명으로 늘었다. 신숙주가 1471년에 편찬한 <해동제국기>에는 건국 이후 일본과의 통교 횟수를 총 4842회라고 전한다. 막부 71회, 혼슈와 시코쿠 348회, 규슈 845회, 히젠국·이끼섬 1166회였고, 쓰시마는 2385회로 절반을 차지했다. 특히 1439년(세종21년) 한 해 동안 조선에 들어온 왜인이 1만 명이나 되었고, 이들에게 지급한 쌀이 10만 석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왜인이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가져온 짐을 나르기 위해 각 고을에서 동원된 부역의 피해도 막심했다. 이들은 지나가는 고을 수령과 백성을 업신여기며 행패를 부려댔다. 동평관의 운용은 왜구의 준동을 막기 위한 조선의 고육지책이었다.

동평관으로 가는 길이 임진왜란 때 고스란히 침략 루트로 쓰인 점이 쓰라리다. 상경로가 진격로가 된 셈이다. 서울로 들어올 때는 육로나 낙동강 수계를 통해 경기도 광주까지 와서 두모포(옥수동) 나루로 한강을 건넌 뒤 살곶이다리~왕십리~광희문~동평관에 여장을 풀도록 정했다. 임란 때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지 18일 만에 한양을 점령한 여정 그대로였다.

하지만 동평관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조선을 염탐한 왜인을 유심히 관찰한 조선 사람이 있었다. 동평관 터에서 직선으로 300m 떨어진 중구 초동 18의5 명보아트홀(옛 명보극장) 앞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가 있다. 조선 시대 건천동(마른내)이다. 평소에는 개천인데, 비가 오지 않으면 길로 사용하였기에 ‘마른내’라 하고, ‘마른내골’이라고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장군을 천거하고 지켜준 서애 류성룡, 숙명의 라이벌 원균도 한 동네 사람이다. 왜관 옆 건천동에 살면서 왜인들의 거동을 지켜본 세 사람이 벼랑 끝 나라를 구했다. 역사의 숙명이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