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돌아가는 삼각지’ 쓸쓸함, 병상의 배호를 끌어당겼다
노래비 속 서울 노래들 (하)
등록 : 2018-04-12 15:02
지명 노래는 촌스럽게 여겼으나
오랜 세월 서민의 애환 반영해
김광석 노래비, 생전 주 무대 대학로에
신해철 노래비, 어린 시절 성장지에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리 것’은 모두 촌스럽게 생각하는 콤플렉스가 분명 있었다. 그래서 국내 지명은 노래 제목이나 가사에서 피하고 싶은 소재였다. 전통적으로 트로트는 이 부문에선 예외다. 오랜 세월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며 적극적으로 전국의 지명을 주요 소재로 다뤄왔기 때문이다.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국내 지명에 대한 인식의 대반전을 일으킨, 서울의 대중가요 노래비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울 노래비 5호- 배호 ‘돌아가는 삼각지’
2001년 11월 용산구 삼각지에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가 서울에서 다섯 번째로 세워졌고, 가수의 이름으로 명명된 ‘배호길’까지 함께 탄생했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비 내리는 명동’ 등 유독 서울의 지명을 소재로 한 배호의 노래들은 장르는 트로트지만 세련된 재즈 스타일 창법으로 불러, 촌스럽게 여겨졌던 국내 지명을 마치 세계적인 근사한 지명으로 착각시키는 마술을 발휘했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삼각지에 입체교차로가 생겨나기 전인 1963년에 만든 노래지만, 1967년에 닦은 입체교차로를 빗대어 만든 노래로 오해하는 분이 많다. 작곡가 배상태는 이 노래를 노량진에서 전차를 타고 충무로로 가던 중 삼각지에서 한 사내가 비를 맞고 걸어가는 쓸쓸한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노래를 부를 가수를 찾지 못해 애를 먹은 사연이 있다. 당대의 인기 가수 남일해는 연습만 했고, 금호동도 구닥다리 노래라며 퇴짜를 놓았다. 유망 신인 가수 남진도 여의치 않아 무명 가수 김호성이 처음 녹음했지만 음반이 나오질 못했다. 작곡가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청량리 인근에 있던 배호의 허름한 전셋집을 찾아갔다. 당시 건강 악화로 거동조차 힘들었던 배호도 처음엔 이 노래 녹음을 사양했다. 하지만 쓸쓸한 분위기의 노래가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가래를 뱉어가며 병상에서 녹음을 강행했다. 명곡 ‘돌아가는 삼각지’는 그런 과정을 거쳐 1967년 세상에서 빛을 보았고 배호의 출세작이 되었다.
서울 노래비 6호- 김광석 ‘다시부르기 1, 2’
화려한 외모나 최고의 인기 가수도 아니었던 김광석의 노래들이 지금껏 사랑받는 원동력은, 인생의 험난한 과정마다 느꼈던 고민과 희망을 대변해준 삶의 진정성이 담긴 가사에 있다. ‘서른 즈음에’가 그랬고 ‘이등병의 편지’와 ‘거리에서’도 그랬다. 1993년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장기공연을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시작한 그는 1995년 1천 회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쌓으며 대학로에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켰다.
2008년 1월6일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앞 입구 벽면에 여섯 번째 서울 노래비 김광석 ‘다시부르기’가 탄생했다. 김광석 노래비는 노래 한 곡이 아닌 앨범(<김광석 다시부르기 1, 2>)을 대상으로 제작된 최초의 서울 노래비이다. 앨범 수록곡들은 김광석이 소극장 1천회 공연을 달성하면서 즐겨 불렀던 노래들이다. 브론즈 부조가 대리석 단상에 얹힌, 통기타 치는 김광석 모습을 담은 이 노래비는 대학로 소극장 문화 확립에 공헌한 그의 음악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서울의 노래비는 공간 확보에 어려움이 있기에, 경제적인 측면과 조형 면에서도 예술적 표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모범적인 작품이다.
서울 노래비 7호- 이문세 ‘광화문 연가’
서울의 일곱 번째 노래비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이다. 이 노래비는 2008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 고 이영훈의 팝 발라드 음악을 기리기 위해 그의 1주기인 2009년 건립되었다. 정동길과 정동교회가 바라보이는 덕수궁 돌담길에 있는 이 노래비는 잘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작은 것이 흠이지만, 활짝 웃는 이영훈의 모습과 빈티지 마이크 형태를 띤 조성현 작가가 제작한 노래비는 조형미가 뛰어나다. 정동길은 작곡가 이영훈이 생전에 사랑했던 거리이자 음악적 영감을 제공한 공간이다.
‘광화문 연가’는 정동교회와 덕수궁 돌담길을 배경으로 한 아름답고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영훈이 시적인 가사와 탁월한 멜로디를 직조해 격조 있는 사랑 노래를 제시하면, 탁월한 소리꾼 이문세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창법으로 불러 청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서울 노래비 8호- 오기택 ‘영등포의 밤’
라희 작사, 김부해 작곡의 ‘영등포의 밤’은 1965년 음반 발표 당시에 공장 지대였던 칙칙한 영등포를 사랑 가득한 낭만의 거리로 묘사했다. 부도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신세기레코드를 되살린 ‘영등포의 밤’이 담긴 음반은 밤새 찍어도 모자랄 정도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왜색 창법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해금되기도 했다.
산업 현장에서 고단하게 살았던 서민의 꿈과 애환을 담은 노래 ‘영등포의 밤’은 1966년 강민호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더 큰 인기를 얻었다. 2010년 12월23일 기타 모습을 형상화한 높이 2.5m의 ‘영등포의 밤’ 노래비가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문화광장에 세워졌다. 서울 노래비 8호의 등장이었다. 제막식에 참석한 오기택은 “긴 세월이 흘러 영등포 중심부에 노래비가 세워져 감격스럽다”며 소감을 전했다.
서울 노래비 9호- 신해철 ‘세계의 문’(유년의 끝)
2015년 뜻하지 않은 의료사고로 사망한 고 신해철을 기리기 위한 노래비가 서울 북서울꿈의숲 공원에 2015년 12월24일 건립되었다. 서울 노래비 9호로 탄생된 신해철의 노래비는 높이 163㎝, 가로폭 65㎝ 규모의 벤치 형태로 디자인되었고 동판에는 넥스트 3집 수록곡 ‘세계의 문’(유년의 끝) 가사가 새겨져 있다. 과거 드림랜드가 있었던 북서울꿈의숲 공원 인근 지역은 신해철이 성장기를 보낸 지역이다. 실제로 노래비로 탄생한 ‘세계의 문’을 비롯해 ‘날아라 병아리’ 등 주옥같은 명곡들의 가사 속에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그가 바라보고 느꼈던 세상의 풍경과 삶의 고민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서울 노래비 5호- 배호 ‘돌아가는 삼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