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이 강화비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용산구 제공
“부끄럽고 쓰린 역사라 할지라도 이를 감추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요?”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최근 용산구 원효로4가 87번지에 있는 비석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心遠亭 倭明講和之處비·이하 강화비)의 보수공사를 끝낸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지금으로부터 425년 전, 즉 임진왜란이 터진 이듬해인 1593년에 명군과 왜군 사이에 있었던 화의(和議·화해 의논) 결정을 새긴 강화비는 역사의 교훈을 보여준다. 우리 땅에서 남의 손에 의해 강화(싸우던 두 편이 싸움을 그침)를 당한 굴욕을 맛본 조선 왕조는 300년 뒤 외세에 유린당하는 운명의 길을 걸었다.
용산구는 비석을 들어올려 화강암으로 만든 지대석을 놓고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는 보수공사를 했다. 주민들이 강화비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문구로 안내판도 세웠다. 용산구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하나다.
강화비는 조선 시대 비석으로 약 1.7m 크기다. 다른 설명 없이 ‘心遠亭 倭明講和之處’란 아홉 글자만 음각돼 있지만, 그 의미는 상당하다. 16세기 말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전쟁사를 여기서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92년 봄, 왜군은 15만8천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킨 지 한 달 만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용산 등을 본거지로 삼아 작전을 벌였다. 남산을 등지고 한강 변에 자리한 용산은 수운의 중심이자 천혜의 요충지였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왜군은 평양성 전투와 행주대첩에서 패한 뒤 한양 이북에 있던 군사를 모두 용산 일대로 퇴각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부대는 각각 오늘날 원효로4가, 갈월동 일대에 주둔한 채 한양의 혹한기를 보냈고 결국 후방 철수를 위해 명에 화의를 요청했다.
조선의 반대에도 1593년 3월부터 화의 논의가 본격화됐고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과 고니시의 강화회담이 이어졌다. 용산구는 “당시 회담 장소가 용산강(용산 자락 주변 한강을 이르는 말) 일대였고 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 아래 강화비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 심원정은 임란 이후 건립됐기 때문에 비석도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엔가 만들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료 부족으로 더 정확한 고증은 어렵다. 비석이 지정문화재가 아닌 향토문화재로 관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은 “조선은 왜의 침략을 받아 싸운 전쟁 당사자였는데도 교섭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며 “강화비는 우리 후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고 말했다.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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