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덕수궁 옆 소극장, 폐관 위기 딛고 시민 품으로 ‘재생’

세실극장 since1976

등록 : 2018-04-12 16:10
창고극장과 함께 소극장 연극 중심

지난해 말 사실상 문 닫았으나

서울시 재정 지원으로 11일 재공연

서울연극협회가 극장 운영 맡아

성공회 주교 이름 딴 극장은

40여 년간 네 차례 곡절 거쳐

90년대 여성주의 연극의 메카로

극장, 아름다운 건축물에 선정


덕수궁 돌담 옆 영국대사관과 성공회 대성당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타일이 빼곡히 붙어 있는 세실극장 건물은 소리 하나 빠져나가지 않을 것 같은 천혜의 요새처럼 보인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백년가게 스물세 번째 이야기는 오래된 극장 이야기다. 연극 공연장을 오래된 가게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돈을 받고 공연한다는 점에서 극장도 엄연히 하나의 상점이다. 연극이라는 예술을 파는 문화 상점. 수준 높은 레퍼토리가 있고, 역사가 있고, 무대를 찾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추억이 시간을 초월해 켜켜이 쌓여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백 년이 가도록 가꾸고 지켜야 할 공간이 아닌가. 우리나라 연극 무대 중에도 그런 곳이 있다. 시청 건너편 덕수궁과 성공회 대성당 사이에 기품 있는 귀부인처럼 앉아 있는 회백색 타일 외장의 우아한 극장, 1970~80년대 우리나라 소극장 연극의 중심지, 세실극장 이야기다.

 

#사라질 뻔했던 세실극장이 “무사히” 돌아왔다. 지난해 말 공연을 끝으로 사실상 문을 닫았던 세실극장이 지난 11일 재개관 기념공연을 올리고 극장의 부활을 세상에 알렸다. 1976년 문을 연 세실극장은 ‘삼일로 창고극장’(1975년 개관)과 함께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소극장으로,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지난 11일 열린 세실극장 재개관기념식에서 올해 대한민국연극제 서울대회 대상을 받은 <검정 고무신>(극단 가변, 연출 이성구)을 공연하고 있다.

폐관 상태에 있다가 서울시문화재단이 운영을 맡아 재사용을 준비 중인 창고극장처럼 세실극장 역시 서울시 재정 지원을 통해 재생의 길이 열렸다. 건물주인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와 서울시가 장기임대계약을 맺고 서울연극협회에 극장 운영을 맡기는 방식으로 극장을 되살린 것이다. 극장을 맡은 서울연극협회는 시설 보수와 프로그램 준비를 거쳐 이르면 6월부터 공연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돈이 없어 고사할 처지에 있던 유서 깊은 극장을 연극인과 종교계, 시정부가 손잡고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낸 것은 문화 재생의 훌륭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초기 한국 성공회를 이끈 세실 쿠퍼(Cecil Cooper·한국 이름 구세실) 주교의 이름을 딴 세실은 40여 년 동안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도 극장으로 살아남아 한국 연극사는 물론 민주화운동과 건축 분야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세실의 역사는 크게 4단계로 나뉜다.

최초 운영자인 방송인 임석규(작고)가 1년도 채 안 돼 경영난에 부딪히자 극장 운영권은 연극인들에게 넘어갔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연극인회관으로 쓰이던 세실은 극단과 연극단체들이 대학로로 옮겨가면서 극단 ‘우리극단 마당’이 1981년부터 1997년까지 운영한다. 이 시기에 세실은 소극장 운동, 마당놀이 열풍, 가수들의 소극장콘서트 붐 등을 주도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경영난을 겪으면서 세실은 ‘제일화재 세실극장’이란 이름의 국내 최초 기업 스폰서 극장으로 1998년부터 2013년까지 운영됐다. 이후 기업 후원이 끊어진 뒤에는 청소년·아동극 등을 주로 공연하면서 어렵게 극장의 명맥을 이어오다 올해 1월 초 <안네의 일기>가 막을 내리는 것을 끝으로 극장의 불이 꺼졌다.

죽어가던 세실이 부활하는 데는 마지막 운영자였던 김민섭(45·씨어터오컴퍼니 대표)씨의 노력이 컸다. “개인의 힘으로는 더는 운영하기 역부족이었지만, 세실이 사라지는 것도 너무 안타까웠던” 그는 연극인들과 서울시, 성공회 사이에 다리를 놓아 3자 간에 임대와 운영 계약이 이뤄지는 데 역할을 했다.

#세실극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재정과 이영윤이다. 세실극장은 성공회가 교회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임대용 별관을 지으려 구상한 데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성공회는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신부들이 정보기관에 연행되는 등 정치 탄압을 받아 교회 운영에도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방안의 하나로 별관 건물을 지어 임대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 상황이 바뀌면서 이 건물을 극장 용도로 바뀌도록 이끈 사람이 당시 막 사제 서품을 받은 이재정 신부(현 경기도 교육감·전 통일부 장관)였다. “명동 국립극장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시내 한복판이란 입지를 살려 극장사업을 하면 교회 이미지를 높이는 데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실극장은 건축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건축잡지 <공간>이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로 선정했을 만큼 현대 한국건축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건축물이다. 설계의 뒷이야기도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 건축가였던 김중업(1922~1988)은 군사정부의 문화건축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다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건너간 뒤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공회가 사실상 망명 상태의 김중업에게 굳이 설계를 맡긴 것은 이를 계기로 그의 ‘무사 귀국’을 성사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건축가 김중업이 ‘망명’ 상태에서 설계한 세실극장은 오랜 세월 탓에 손댈 곳이 많지만, 1976년 건축 당시의 우아한 자태를 거의 원형대로 간직하고 있다. 건물 오른쪽 끝 공간에는 1980~90년대 민주화운동 관련 기자회견과 시국선언이 자주 열려 유명했던 ‘세실 레스토랑’이 있었다.

대학로에 연극단체가 집결하면서 ‘소외’당하기 쉬웠던 세실극장을 소극장 연극의 중심지로 만든 사람은 당시 ‘마케팅의 귀재’로 알려진 경제인이자 대학 민속운동 서클 출신의 문화기획자 이영윤(재미)이었다. 이재정 신부의 고교 선배였던 인연이 그를 성공회와 연결해주었던 듯하다. 그가 이끈 ‘마당기획’은 1997년 외환위기로 극장 운영을 접을 때까지 많은 자취를 남겼다. 1984년 세실극장이 무대에 올린 <님의 침묵>(극단 마당, 김상렬 연출)은 대히트를 하며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민속극 운동의 하나로, 나중에는 방송제작물로도 크게 히트했던 마당놀이를 기획한 것도 이영윤이었다고 한다.

세실은 또 대학로의 ‘학전’ 소극장과 더불어 김광석, 전인권, 안치환, 정태춘 등 유명 대중가수들의 소극장 콘서트 붐을 일으킨 발원지이기도 했다. 고 신영복의 대학 동창으로 절친이었던 이영윤은 신영복이 출소한 뒤 유명한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펴내도록 돕고, 이재정 신부에게 그를 소개해 성공회대학 강단에 서게 한 사람이기도 했다. 

마당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아 세실의 역사를 지켜간 사람들로는 극작가 겸 연출가 하상길(70)과 기획자 김민섭, 그리고 회사원 박대상(주식회사홍보팀 대표)이 있다. 하상길은 세실이 외환위기 이후 몇 달째 문을 닫은 채 용도변경이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극장이 너무 아까워 앞뒤 안 보고 계약을 맺었”다. 그는 1억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극장을 개보수하고, 제일화재와 스폰서십 계약을 맺어 우리나라 최초의 네이밍 스폰서 극장을 탄생시켰다. 360석 규모의 객석을 200석 안팎으로 과감히 줄이는 대신 무대를 넓히고 높이도 객석 눈높이에 맞추는 등 세실극장이 “연출가, 배우, 관객 모두의 입장에서 연극에 최적화된 극장”이란 평을 듣게 했다. 당시 제일화재 홍보팀장이던 박대상은 회사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스폰서 극장이라는 기업 초유의 문화사업안을 입안해 세실이 극장의 역사를 이어가는 데 숨은 기여를 했다.

김민섭은 세실의 마지막 개인 운영자다. 2003년 극장 사원으로 입사해 극장장에 오른 그는 “애착이 많은 극장이라 인수 제의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정통 연극 공연만으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어” 단체관람이 많은 청소년·아동극을 제작해 경영 수지를 맞추는 전략을 쓰기도 했다. 그는 극장을 직접 경영하면서 세실 정도의 규모 있는 극장을 한 개인이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결론은 “국가나 시가 공공문화시설로 극장을 맡아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성격상 운영만큼은 예술인들에게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그런 점에서 연극인들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극인들이 자율적으로 극장을 운영하는 게 더 공익적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1976년 세실극장의 개관 기념작은 입센의 <유령>(극단 산하, 차범석 연출)이었다. <인형의 집>에서 집을 떠난 노라가 만약 집을 나가지 않았으면 어떤 운명이었을까를 그린 작품이다. <유령>은 유럽 소극장 운동의 효시인 파리 ‘자유극장’의 개관작(<한국 연극사와 소극장사, 그리고 세실극장>, 김민섭)이었는데, 이는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소극장 운동과 여성은 다 같이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라는 공통 목표를 가졌다.

1999년 12월 세실에서는 고두심·김미숙의 <나, 여자예요!>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2001년 6월부터 연말까지 김혜자의 여성주의 모노드라마 <셜리 발렌타인>은 3개월 가까이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6개월 장기공연이란 역사를 쓰기도 했다. 민주 진영의 집권에 힘입어 여성들이 각 분야에서 활발한 사회 진출을 시도하며 ‘젠더 투쟁’을 전개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드디어 여성이 “집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냉장고에 갇힌 남편들을 얼어 죽게 내버려둔다는 섬뜩한 설정의 <남편이 냉장고에 들어갔어요>(이상 극단 로뎀, 하상길 연출)가 세실의 무대에 오른 건 그로부터 10년쯤 뒤였다.

김혜자 주연의 여성주의 연극 (2001)의 포스터 하상길 제공

2018년 지금은 남편 살해용 냉장고 따위조차 필요 없는 미투의 시대. 한 시대 여성주의 연극의 산실이었던 극장이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은 시내 한복판에서 당당하고 편안하게 연극을 즐기고 싶은 여성들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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