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재탄생한 세운상가의 옥상(서울옥상)에선 동서남북으로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지난 17일 낮 직장인과 아이들이 서울옥상에서 봄날을 즐기고 있다. 남쪽으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지난해까지 서울 도심 종로의 세운상가는 흔히 ‘죽은 공간’으로 치부됐다. ‘세운’(世運·세상의 기운이 모인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때는 제조업의 메카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타운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어느샌가 도심 슬럼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초라한 신세가 됐다.
서울시는 이 죽은 공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2014년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1단계 사업이 지난해 9월 마무리됐다. 그리고 2단계 사업이 현재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로 세운상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세운상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하며 새로운 가치를 살피는 김성우 건축사(엔이이디 건축사사무소 소장)의 글을 싣는다. 김 건축사는 다음달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세운상가를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1953년 6·25전쟁 휴전 이후 서울은 1960년대부터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도시화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1970년대 초까지 다양한 유형의 거대 구조물이 탄생했다. 62년 평화시장, 68년 재개장한 동대문운동장, 68년 세운상가군, 69년 청계고가도로, 그리고 70년 동대문종합시장이 대표적이다.
이 거대 구조물들은 급격하게 팽창하는 도시의 영역을 담아내고 통제하기 위해 등장했다. 하지만 그 규모의 거대함과 경직성 때문에 도시 변화가 그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일종의 ‘동면 상태’를 겪는다. 이들 중 일부는 결국 개발 압력에 무너져 사라졌지만, 세운상가처럼 끝까지 밀려나지 않고 버티며 내부 사용자들이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사례도 없지 않다. 거대 구조물이 외부 개발 압력을 버티는 동안 사용자들은 안정적으로 남을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전후 50여 년간 서울의 독특한 풍경이 만들어졌다.
세운상가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용도 건물로 ‘보차 분리’(보행 공간과 차량 주행 공간의 분리), 연속적 보행몰(안전하고 쾌적하게, 걸으며 쇼핑할 수 있도록 만든 상가) 조성을 위한 보행 데크, 아트리움 등 당시로선 획기적인 개념이 도입된 구조물이었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세운상가 건립으로 인접 지역 활성화와 개발 여건 개선, 개발 효과 파급 등을 노렸으나 세운상가 일대의 개발이 지연되고 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상층부 아파트 주민들이 떠나면서 상가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이후 77년 세운상가의 저층부를 차지하던 전기전자 산업이 도심 부적격 업종으로 지정되고, 80년대 용산 전자상가로 이주가 시작되면서 세운상가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는다.
도심의 4개 블록을 가로지르는 거대 구조인 세운상가는 점차 흉물로 인식됐고 80년대 후반까지 상가 일대를 재개발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토지 소유권자들의 수가 너무 많고 합의를 이루기가 쉽지 않아 사업 진행은 지지부진했고, 그사이 세운상가와 주변 영역은 영세한 소규모 산업이 차지하며 도심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됐다.
세운상가의 운명은 2000년대 들어 크게 달라질 뻔했다. 2000년대 초 청계고가도로 철거와 청계천 복원공사 과정에서 세운상가 3층 보행데크의 일부가 철거돼 연속된 보행 공간이 단절됐고, 2009년 세운상가군의 가장 북쪽에 있던 현대상가가 철거됐다. 만약 세운상가의 전면 철거가 이루어졌다면 현재 을지로 주변의 도심산업 영역은 자취를 완전히 감춰버렸을지도 모른다. 세운상가가 50여 년을 무너지지 않고 버텼던 덕분에 그 주변엔 셀 수 없이 다양한 도시 영역들이 개발 압력에서 밀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운상가는 2014년부터 서울시가 계획한 ‘다시·세운’ 프로젝트로 그 가치가 새로워졌다. 프로젝트의 하나로 2017년 시민에게 개방된 세운상가 옥상(서울옥상)에 올라가보라. 사방으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북악산에서부터 종묘까지 서울 자연의 아름다움이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남산타워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광화문에서 을지로입구,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빌딩들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지며, 동쪽으로는 나지막한 재래시장과 멀리 동대문 주변의 서울성곽을 따라서 타워형 시장 건물들이 장관을 이룬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보기 위해 외곽으로 나가거나 가장 높은 건물에 올라 주변을 내려다보는 경우는 많지만, 도심 한가운데서 탁 트인 옥상 위를 자유롭게 거닐며 자연과 역사, 근현대 도시의 모습이 중첩된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장소는 세운상가가 유일하다. 지난 50여 년 동안 세운상가 주변에서 진행된 개발 시도들과 그 속에서 활발하게 도시를 변화시켜온 사용자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서울다움’을 담고 있다. 그것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세운상가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주목하지 않았던 ‘서울의 멋’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세운상가의 또 다른 매력은 ‘연결’이 주는 아름다움이다. 세운상가가 끊어진 보행데크를 다시 연결하려는 것은 북악산에서 남산까지 녹지 축을 복원하고 남북 방향의 보행로를 잇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옛 도시 조직과 현대적 구조물의 연결, 기존 거주자들과 새로 유입된 사용자들의 연결, 도심산업과 서비스업의 연결, 역사 자산과 생활문화 공간의 연결 등 단절되고 고립된 도시 공간을 잇고 관계 맺어서 새로 태어나도록 하려는 구상이다. 세운상가와 만나는 종로,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 그리고 주변의 오래된 도시블록과 새로 개발하는 도시 영역까지 입체적으로 연결해 고립된 도시의 영역들을 하나의 커다란 공공 영역 망으로 다시 조직하는 것도 가능하다.
최근 외국 대도시들에선 오래전 도시 밖으로 밀어낸 산업 영역을 다시 도시 중심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금융업, 서비스업만으로 채워진 도시는 다양성이 결여돼 여러 차례의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며 휘청거렸고, 그 과정에서 도시를 단일 업종, 단일 영역으로 채우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세운상가가 자리한 서울 도심은 다양한 도시 영역들이 복잡하게 얽힌 채 살아 숨쉬고 있다. 단지, 지난 50년 동안 일관된 도시정책이 없어 서로 잘 연결되지 못하고 고립돼 있을 뿐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
2018년 현재, 건폐율과 용적률로만 정의내려지는 ‘양적 팽창’에 기반한 기존 도시개발 전략은 전혀 효과적일 수 없으며 반드시 ‘질적 개선’을 고려한 도시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세운상가로 확인할 수 있듯이 1960년대 이후 양산된 근대건축의 유산들은 지난 50여 년의 시간을 거치며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 그 잠재된 가치를 다시 평가하고 적극 활용해야 할 때다.
김성우 건축사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