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안평대군의 비밀 아지트, 신숙주의 별장, 이승만의 거처

마포구 담담정 터

등록 : 2018-05-03 14:37
풍광 좋기로 이름난 용산강 터 위치

문인과 학인, 예인들에게 인기 높아

형 세조에게 견제받아 처형당한

안평대군의 풍류와 한이 깃든 곳

안평의 최측근이었다가 배신한

신숙주의 별장으로 쓰이다

이화장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승만이 임시 거처로 이용


강변북로 보행교에서 바라본 담담정 옛터.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마포강변 언덕은 빌라와 집으로 뒤덮였다. 우뚝 솟은 마포타워가 현대판 담담정인 듯하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안평대군, 신숙주, 이승만…. 일세를 풍미한 세 사람의 운명을 바꾼 마포구 마포동 419-1 담담정(淡淡亭) 터를 찾아 길을 나선다.

풍광 좋기로 한강 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용산강 언덕에 자리잡은 담담정은 정자의 첫 번째 주인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한이 서린 공간이다. 안평은 시문서화(시가, 산문, 글씨, 그림)의 대가이자 조선 제일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부왕 세종대왕과 큰형 문종, 작은형 세조(수양대군), 조카 단종에 밀린 비운의 왕자는 스스로 궁궐과 도성을 떠나 그곳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도성 서쪽 인왕산 첩첩산중에 무계정사와 비해당을 지어 대궐의 관심과 시선을 차단했다. 도성을 벗어나 한강 이남을 바라보며 세월을 낚으려 했건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안평이 문인·학자·예인에게서 인심을 얻자 위기감을 느낀 수양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35살의 동생에게 사약을 보냈다. 집은 헐리고 시문서화는 불탔다. 담담정은 정난 일등 공신 신숙주에게 하사됐다. 안평이라는 이름은 역사책은 물론 족보에서도 지워졌다. 우리가 아는 안평대군 스토리는 대부분 픽션이다.

<단종실록>의 기록조차 철저하게 세조 편의 시각을 반영했다. 안평이 뇌물을 받았고, 문종이 승하했는데도 술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며, 그의 남녀상열지사까지 미주알고주알 적었다.

‘왕기가 서렸으니,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라는 ‘방룡소흥지지’(旁龍所興之地)가 가장 큰 시빗거리였다. 안평대군이 왕기가 서린 곳에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안평대군 처형 죄목 중 으뜸이 무계정사 건축이었다.

또 <단종실록>에는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1년 전 “안평의 생일날 마포강 정자(담담정)에 지지자 30여 명이 모여 세력화를 꾀하고 있다”고 수양대군이 동생을 힐난하는 대목이 나온다. 무계정사와 담담정은 수양대군과 피 터지게 경쟁하던 안평대군의 비밀 아지트였다.

<동국여지비고>에 “담담정은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1만 권을 저장하고 선비들을 불러모아 12경 시문을 지었으며, 48영을 지었다. 신숙주의 별장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안평대군은 서적 1만 권과 희귀 서화·골동품 200여 점을 수집해 보관했다. 후에 세조는 담담정에 행차해 뱃놀이와 화포 사격을 구경하면서 권력의 단맛을 만끽했다.

정조 시대 도화서 화원 김석신이 그린 담담정. 왼쪽 절벽 위에 담담정, 오른쪽 아래 읍청루가 보인다. 양천에서 노량진을 비껴 보고 그린 그림이다.(간송미술재단 소장)

두 번째 주인이 된 신숙주 사후, 정자 아래 마포나루는 흥청거렸지만 담담정은 부활하지 못했다. 다만 재산을 상속받은 신숙주의 후손들이 터 잡고 살았다. 담담정 동쪽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안평의 또 다른 별서 영벽당도 같은 운명이었다. 후에 월산대군의 풍월정을 비롯해 세심정, 집승정 등이 지어지고 허물어지기를 거듭했다.

담담정은 간곳없고 터만 남았다는 18세기 초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는 담담정 언덕 아래 용산 별영 읍청루의 시대였다. 담담정이 지금의 벽산빌라 자리라면, 읍청루는 청암자이아파트 부근이다. 읍청루는 서강나루의 족한정, 상수동의 탁영정과 더불어 ‘제일 강산루’로 인구에 회자됐다.

일제강점기 세관감시서와 조선총독부의 2인자 다나카 다케오 정무총감의 별장으로 쓰였던 담담정의 세 번째 주인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해방 직후 귀국한 이승만이 돈암장을 거쳐 이화장으로 옮기기 전까지 두 달간 머물렀다. 사람들이 마포장이라고 이른 이곳에서 이승만은 운 좋게 남로당 소속 경찰관 4명이 낀 암살단의 총격 위기를 면했다.

훈련도감 소속 군인에게 급료를 지급하던 용산 별영창과 읍청루가 담긴 1900년도 사진. 벼랑고개라고 하던 별영창 고갯마루의 담담정은 이미 사라진 뒤이다.

안평대군의 최측근이었다가 배신하고 영의정에 올라 자손 대대 영화를 누린 신숙주와 이승만의 인연은 깊다. 담담정에 이어 낙산 아래 이화장도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의 집터였다. ‘신대’(申臺)라고도 했다. 담담정 터는 왕의 아들이자 숙부였으며 왕의 동생이기도 했던 안평대군과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른 신숙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운세가 피고 진 곳이다.

무악(안산)의 지맥인 용산이 한강으로 뻗어 형성한 서호, 마호, 용호 세 호수를 이르는 삼개(삼포) 중 마호를 마포강 또는 마포항이라고 했다. 담담정은 무악에서 갈라져 나온 와우산과 노고산의 한 구릉이다. 빼어난 산수는 풍류를 낳았고, 한강 본류 18개 나루터 중 서울로 들어오는 땔감, 생선과 소금, 수공업품이 주로 반입됐기에 주막과 객주, 창고가 즐비했다.

지하철 5호선 마포역 4번 출구에서 불교방송을 지나 마포대교 아랫길로 접어들어 죽 가면 마포어린이공원을 만난다. 마포의 상징탑과 마포종점 노래비가 서 있다. 여기서 담담정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질러가는 재미없는 길과 마포타워를 돌아가는 풍광 좋은 길이다. 노래비를 지나 옵티마성형외과 병원 옆으로 난 골목 끝에 자리한 극락암에서 무미건조한 층계가 시작된다. 선택의 몫이지만 층계보다 강변북로를 권하고 싶다. 30도 이상의 급경사를 각오해야 하는 두 길 모두 한강게스트하우스라는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담담정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다.

마포종점 노래비

현대판 담담정 노릇을 하는 마포타워를 돌면 SK주유소를 만난다. 주유소 옆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킹덤힐스, 벽산빌라, 마포한강타운 빌라가 축대 위에 곡예하듯 늘어섰다. 담담정 푯돌은 벽산빌라 정문 오른쪽에 비극의 상징물처럼 서 있다. 빌라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푯돌이 있는 위치에서 물은 보이지 않는다. 질풍노도 같은 산업화의 산물이다.

안평대군과 신숙주와 이승만이 누리던 마포강과 용산강의 절경을 누리려면 빌라 반대쪽 언덕배기 I.O.U 레스토랑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시켜야 한다. 원치 않는다면 주유소에서 언덕을 오르지 말고 직진해서 마포구의 경계를 넘어 용산구로 넘어가면 된다. 용산구 청암동 청암자이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강변북로 위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보행로가 나온다. 새로운 조망 명소이다. 옛 마포팔경은 물론, 강 건너편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진다. 담담정에 오르면 담담정은 없다. 오히려 멀찌감치 떨어진 한강 변에 서면 담담정의 옛 모습이 실감 난다.

안평대군은 야심가인가, 권력의 희생양인가. 안평의 흔적은 지워지고 파괴됐다. 무덤도 집도 작품도 없다. 권력은 덧없으나 문인과 예술가로서 평가 사료마저 사라진 것이 아쉽다. 300여 년 뒤 영조 때에야 복권됐다. 영의정 김재로는 “안평대군은 다만 글 잘하여 이름이 드높았고, 따르는 선비들을 모아 연회를 즐긴 것이 화가 됐을 뿐입니다. 그가 어찌 왕이 되겠다는 분에 넘치는 욕심이 있어 반역을 꾀했겠습니까? 이미 김종서, 황보인 등의 관작(관직과 작위)이 회복됐으니 마땅히 안평대군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라고 주청했다.

문종은 동생의 글씨체로 ‘경오자’(안평대군자)를 주조했지만 세조가 녹여 없앴다. 숙종도 안평의 글씨를 사랑했다. 정조는 안평의 글씨를 ‘명필 중에서 으뜸’이라고 평가하고, 활자로 만들고 싶어 했다. 안평의 꿈 이야기를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 한 점이 유일한 유물로 남았지만 일본 덴리대학 소유이다. 안평은 여전히 꿈속 도화경을 헤매고 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