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함부로 충고하지 말자, 친한 사이라면 더욱!
가까운 관계에서 상처 주고받지 않기
등록 : 2018-05-03 14:40
점심과 담배는 은밀한 관계의 상징
하지만 허물없는 사이가 오히려
상처 주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나르시시즘 시대, 섣부른 충고는 금물
당신은 오늘 누구와 점심 약속을 하셨는지? 직장생활에서 밥은 단순히 위의 공복감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밥은 곧 인간관계다. 음식을 사랑하는 이탈리아인들의 표현을 패러디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오늘 누구와 어떤 점심을 먹었는지 내게 얘기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얘기해주겠소!”
특정한 직장 동료와 자주 식사를 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과 친밀하다는 의미다. 어떤 선배와 만났을 때 “언제 밥 한번 사주세요!”라고 던지는 말은 그에 대한 존중과 관심을 표시하는 동의어다. 반대로 “앞으로 그 친구와 함께 밥을 먹나봐라. 절대로 그럴 리 없을 거다”라는 말은 그 사람과 인간관계를 끊겠다는 무서운 표현이다. 이처럼 밥은 곧 마음이며 인간관계다. 점심 풍경을 보면 그 회사의 직장문화를 읽을 수 있다.
음식이든 뭐든 함께 나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급속도로 가깝게 만든다. 음식을 나누고 맥주를 함께하는 가운데, 사실은 남들에게 터놓지 않았던 본인의 내밀한 고민과 꿈도 함께 나눈다. 함께 나누는 것을 가리켜 요즘은 ‘공유’라는 표현을 쓴다. 그 공유의 과정이 ‘공감’으로 쉽게 이어지기도 한다. 내밀한 감정의 결사체다. “우리 담배 한 대 피울까?” 누군가에게 할 말이 있을 때 직장 내에서 이렇게 제안하곤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강한 유대감을 가진 것으로 지연, 혈연, 학연 등 ‘3연’을 말하지만 이보다 더 강하고 끈끈한 ‘제4의 연’이 있으니 바로 함께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자주 나누는 ‘흡연’ 관계다. 직장 내의 고민과 불만을 나누고 소문도 공유하는 자리다. 흡연 장소는 곧 직장 내의 무수한 소문을 양산해내는 진원지이기도 하다. 공식 조직을 통한 소통이 꽉 막혀 있을수록 더욱 그렇다. 이처럼 식사와 담배 연기를 함께 나누는 자리는 소통의 소중한 플랫폼 구실도 한다. 더 나아가 격식을 가리지 않고 날 선 농담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직장생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농담과 언어의 공방조차 직장인들의 특권이다. 하지만 허물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저는 매우 친한 직장 후배라 생각했는데, 술자리에서 저를 마구 공격해 들어오더군요. 생각의 차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회사 내의 문제를 정치적인 인식의 차이로 비화하더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로 저를 인신공격했습니다. 급기야는 소셜미디어에서 분명히 저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꼰대의 전형이라고 거친 언사를 사용해 희화화하는 내용도 전해 들었어요. 그 솟구치는 분노는 뭐라 설명하기 힘들더군요. 그 후배와 제가 함께 나눈 식사와 술자리는 너무도 많아서 주변에서는 의형제라고도 할 정도였습니다. 과거의 좋은 기억을 되살려 지금의 분노를 상쇄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답을 모르겠고 괴롭습니다.” 그는 흡사 심리적으로 발효 중인 상태처럼 보였다. 김치나 된장, 고추장 같은 음식이 효모나 세균 등의 미생물의 도움을 받아 유기물이 분해되어 끓어오르는 과정을 가리켜 발효라고 하는 것처럼, 내면의 에너지와 에너지, 가치와 또 다른 가치가 충돌하여 생기는 발효 상태와 흡사했다. 그의 영혼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혹스럽고 아플 때는 잠시 멈추고 돌아보아야 한다.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변함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렵다.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인간관계도 쉽지는 않다. 아무리 가까웠던 사람도 어느 날 차가운 관계로 돌아서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변함없는 것을 바라는 나조차 그사이 많이 변하지 않았을까? 상처를 받았다는 나 역시 마찬가지로 그 상대방에게 적잖은 상처를 주었을지 모른다. 상처를 준 사람은 늘 인식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편하다는 이유로 날 선 농담 속에 날카로운 가시가 들어 있어 상대방의 영혼에 상처를 주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관계의 위기를 겪었다. 매우 긴밀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모든 연락을 끊은 것이다. 전화를 해보고 문자를 보내보아도 아무런 답이 없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언행을 했을 개연성도 있다. 혹은 중간에 다른 사람이 엉뚱한 소문을 냈을지도 모른다. 속상한 것은 나의 진정성과 다르게 진행되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자기학대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나르시시즘의 시대다. 상대방의 현재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연민에 빠져 나만 힘들다고 투덜거리지는 않았을까.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쉽게 던져서는 안 되는 질문이나 충고가 있다. 자식 문제로 힘겨워할 때, 부부관계에 위기가 왔을 때, 직장에서 소외되었다고 생각해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졌을 때, 함부로 충고를 해서는 곤란하다. 의도하지는 않지만 간혹 상처를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묵묵히 들어주는 선배나 친구가 어쭙잖은 멘토보다 훨씬 고마운 법이다.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다. 사회생활도 때로는 남녀 관계와 비슷할 때가 있다. 처음 만나 호감과 호기심을 갖다가 친밀해지는 듯하다 어느 날 갑자기 소원해진다. 남남처럼 무감각하게 지내거나 헤어진다. 노력해보지만 그래도 안 된다면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라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시간의 파괴력은 관계에서도 이처럼 무섭게 작용하니까. ‘시간이 적'(Time is the enemy)이라는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다독거리는 수밖에. 우리의 인연은 딱 여기까지라고.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음식이든 뭐든 함께 나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급속도로 가깝게 만든다. 음식을 나누고 맥주를 함께하는 가운데, 사실은 남들에게 터놓지 않았던 본인의 내밀한 고민과 꿈도 함께 나눈다. 함께 나누는 것을 가리켜 요즘은 ‘공유’라는 표현을 쓴다. 그 공유의 과정이 ‘공감’으로 쉽게 이어지기도 한다. 내밀한 감정의 결사체다. “우리 담배 한 대 피울까?” 누군가에게 할 말이 있을 때 직장 내에서 이렇게 제안하곤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강한 유대감을 가진 것으로 지연, 혈연, 학연 등 ‘3연’을 말하지만 이보다 더 강하고 끈끈한 ‘제4의 연’이 있으니 바로 함께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자주 나누는 ‘흡연’ 관계다. 직장 내의 고민과 불만을 나누고 소문도 공유하는 자리다. 흡연 장소는 곧 직장 내의 무수한 소문을 양산해내는 진원지이기도 하다. 공식 조직을 통한 소통이 꽉 막혀 있을수록 더욱 그렇다. 이처럼 식사와 담배 연기를 함께 나누는 자리는 소통의 소중한 플랫폼 구실도 한다. 더 나아가 격식을 가리지 않고 날 선 농담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직장생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농담과 언어의 공방조차 직장인들의 특권이다. 하지만 허물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저는 매우 친한 직장 후배라 생각했는데, 술자리에서 저를 마구 공격해 들어오더군요. 생각의 차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회사 내의 문제를 정치적인 인식의 차이로 비화하더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로 저를 인신공격했습니다. 급기야는 소셜미디어에서 분명히 저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꼰대의 전형이라고 거친 언사를 사용해 희화화하는 내용도 전해 들었어요. 그 솟구치는 분노는 뭐라 설명하기 힘들더군요. 그 후배와 제가 함께 나눈 식사와 술자리는 너무도 많아서 주변에서는 의형제라고도 할 정도였습니다. 과거의 좋은 기억을 되살려 지금의 분노를 상쇄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답을 모르겠고 괴롭습니다.” 그는 흡사 심리적으로 발효 중인 상태처럼 보였다. 김치나 된장, 고추장 같은 음식이 효모나 세균 등의 미생물의 도움을 받아 유기물이 분해되어 끓어오르는 과정을 가리켜 발효라고 하는 것처럼, 내면의 에너지와 에너지, 가치와 또 다른 가치가 충돌하여 생기는 발효 상태와 흡사했다. 그의 영혼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혹스럽고 아플 때는 잠시 멈추고 돌아보아야 한다.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변함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렵다.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인간관계도 쉽지는 않다. 아무리 가까웠던 사람도 어느 날 차가운 관계로 돌아서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변함없는 것을 바라는 나조차 그사이 많이 변하지 않았을까? 상처를 받았다는 나 역시 마찬가지로 그 상대방에게 적잖은 상처를 주었을지 모른다. 상처를 준 사람은 늘 인식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편하다는 이유로 날 선 농담 속에 날카로운 가시가 들어 있어 상대방의 영혼에 상처를 주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관계의 위기를 겪었다. 매우 긴밀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모든 연락을 끊은 것이다. 전화를 해보고 문자를 보내보아도 아무런 답이 없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언행을 했을 개연성도 있다. 혹은 중간에 다른 사람이 엉뚱한 소문을 냈을지도 모른다. 속상한 것은 나의 진정성과 다르게 진행되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자기학대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나르시시즘의 시대다. 상대방의 현재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연민에 빠져 나만 힘들다고 투덜거리지는 않았을까.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쉽게 던져서는 안 되는 질문이나 충고가 있다. 자식 문제로 힘겨워할 때, 부부관계에 위기가 왔을 때, 직장에서 소외되었다고 생각해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졌을 때, 함부로 충고를 해서는 곤란하다. 의도하지는 않지만 간혹 상처를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묵묵히 들어주는 선배나 친구가 어쭙잖은 멘토보다 훨씬 고마운 법이다.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다. 사회생활도 때로는 남녀 관계와 비슷할 때가 있다. 처음 만나 호감과 호기심을 갖다가 친밀해지는 듯하다 어느 날 갑자기 소원해진다. 남남처럼 무감각하게 지내거나 헤어진다. 노력해보지만 그래도 안 된다면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라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시간의 파괴력은 관계에서도 이처럼 무섭게 작용하니까. ‘시간이 적'(Time is the enemy)이라는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다독거리는 수밖에. 우리의 인연은 딱 여기까지라고.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