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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만 피하자”던 박씨, 매주 수요일 칼을 든다

50대 말 박재승씨 생존 요리 도전 1년 요리 배운 뒤 가족관계 좋아져

등록 : 2018-05-03 14:58
직장인 박재승씨가 지난 4월11일 서초구 방배동 서초아버지센터의 ‘아빠는 최고 요리사’ 수업에서 제육볶음을 만들고 있다. ‘요리 젬병’이었던 박씨는 1년째 요리교실에 참가해 이제는 김치, 밑반찬 만들기를 혼자서 척척 해내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멸치볶음과 콩조림. 직장인 박재승(57)씨가 틈나는 대로 만드는 음식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멸치볶음을 맛보며 몇 번이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그가 만들 수 있는 음식은 더 있다. 열무김치, 깍두기, 무채, 파김치, 갓김치 등 여러 종류의 김치도 담근다. 아내는 열무김치와 파김치 팬이다. 그가 집에 있는 주말이면 함께 담그자고도 한다. 파김치는 친구나 친지들과도 나눠 먹을 정도로 ‘인기 만점’이다. 고등학생 딸과 대학생 아들 둘은 돼지고기김치볶음과 스파게티에 감동한다. “아빠,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라며 맛있다고 신기해한다.

1년 전만 해도 그 역시 여느 중년 남성들처럼 요리에는 ‘젬병’이었다. 밥 한 끼 차려본 적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요리를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가족을 위해 밑반찬 정도는 스스로 만들고, 나중에 ‘삼식이’(퇴직 뒤 집에서 삼시 세끼를 요구하는 남편) 신세는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박씨는 인터넷 편지 ‘고도원의 아침 편지’를 늘 본다. 2016년 가을, 눈이 번쩍 뜨이는 알림이 있었다. 서초아버지센터의 프로그램 ‘아빠는 최고 요리사’ 수강생 모집 공고였다. ‘혹시 나만 남자?’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신청하려고 보니, 남자만 대상으로 하는 평일 저녁 시간 프로그램인데도 인기가 많아 금방 마감이 되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지난해 5월 수강 신청 첫날, 아침 일찍 일어나 겨우 등록에 성공했다. 그리고 1년째 연이어 수업을 듣는 ‘열혈 수강생’이 되었다.

박씨는 수요일 저녁마다 칼을 든다. 처음에 칼질은 쉽지 않았다. 정성을 다해 잘라보지만 들쭉날쭉했다. 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깊은산속옹달샘’ 음식연구소 서미순 소장이 강사를 맡아 진행하며 친절하게 알려주지만 따라 하기 벅찼다. 그나마 교실에서 배울 때는 그런대로 따라 했는데, 집에서 조리법만 보고 하려면 막히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예컨대 물의 양은 나와 있는데 얼마나 끓여야 하는지 시간이 없으면 막막해졌다. 수업시간마다 강사가 하는 말을 꼼꼼하게 적었다. 실습 중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메모를 하면서 물었다. 어느새 칼질과 간 맞추기를 어렵지 않게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박재승(맨 왼쪽)씨가 ‘깊은산속옹달샘 음식연구소’ 소장인 서미순(맨 오른쪽)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요리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박씨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자 가족관계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식구들도 차차 음식이 생각했던 것보다 맛있다며 좋아했다. 음식 맛을 봐달라고 아이들에게 다가가면 “아빠가 이런 것도 만들어?” 하며 신기해한다.

그가 만든 음식을 안주 삼아 술을 가볍게 곁들이면 가족 간 대화는 훨씬 편해진다. “처음엔 맛이 없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할수록 점점 자신감이 생겨요. 배추김치, 물김치, 밑반찬 만들기도 어렵지 않아요. 사실 아직은 생존을 위한 기본 요리이기는 하지만요.” (웃음)


그가 요리하는 걸 가장 반기는 사람은 역시 아내다. 맞벌이지만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던 남편이 반찬을 만들어주니 너무 좋다.

열무나 배추를 척척 절이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요리교실이 있는 수요일 오후면 “오늘은 무슨 요리?” 하고 문자 메시지를 남편에게 보낸다. 가끔은 요리교실 등록을 대신해주기도 한다.

요리를 하면서 덤으로 얻은 것도 있다. 그에겐 월요병이 거의 없다. 스트레스 지수가 이전보다 훨씬 낮아졌다. “매주 요리교실을 기다리다 보면 월·화는 금방 가고, 수요일 배운 요리를 반복 실습하다 보면 일주일이 금세 가죠.”

요리교실에서 만난 조원들은 오랜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다. 나이도, 하는 일도, 여건도 다양하지만 지지고 볶고 하면서 금세 가까워졌다. “그날 배운 요리나, 집에서 혼자 해보다 궁금했던 것 등 거의 요리 이야기만 해요.” 뒤풀이 자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중장년 남자들이 요리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면 주위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기도 한단다.

조원들끼리 요리 여행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 1박2일 동안 모여서 만능간장도 만들고 김치도 같이 담갔다. “재료를 같이 사서 요리를 해요. 누가 말할 것도 없이 각자 알아서 재미있게 해요. 다음날 같이 만든 음식을 한 보따리씩 집으로 싸가는 것은 덤이죠.”

박씨는 조원들과 함께 기록한 레시피와 조리법, 사진들을 차근차근 모았다. 요리 초보 남자들을 위한 요리책을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집밥 요리를 배우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쉽게 따라 하고 응용하는 데 도움되는 책을 함께 준비하고 있어요.”

서미순 소장이 강조하는 “요리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박씨의 요리 좌우명이다. 아이들이 냉장고에 있는 스팸이나 맛살을 그냥 먹으려 하면 달걀을 입혀 팬에 부쳐준다. 집에 있는 재료로 다양하게 요리하다 보면 가족을 위한 특급 요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삼식이’ 소리 듣지 않으려고 배우기 시작한 생존 요리가 저와 가족의 삶을 ‘맛깔나게’ 만들어줬어요.” (웃음)

이현숙 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