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로를 바꾸는 주민공유공간 라라랜드’ 금천구 독산4동 남부신용협동조합 건물의 지하 입구에 커다란 흰색 간판이 눈길을 끈다. 라라(LALA)랜드는 ‘배우고(Learn), 함께하고(Accompany), 사랑하고(Love), 행동한다(Act)’는 영어 단어 첫 글자를 따 만든 이름이다. 지난해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할리우드 영화 <라라랜드>의 제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지난해 단란주점이 문을 닫은 뒤, 흉물처럼 남아 있던 빨간색 낡은 노래방 간판을 떼고 지난 3월 말 문을 열었다. 42평 남짓 되는 이 공간의 운영은 ‘라라스쿨’이 맡았다. 라라스쿨은 생애주기에 맞춘 성교육을 하는 강사 3명이 만든 청년단체다. ‘성교육으로 사회문화를 바꾼다’는 슬로건을 걸고 시민교육을 꿈꾼다. 라라스쿨은 이곳을 교육장, 주민모임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청년과 청소년의 휴식 공간도 마련한다. 현재 이곳에는 영상, 어르신 자서전 사업을 하는 청년단체 2곳이 사무실로 쓴다.
독산로는 50m 폭의 시흥대로에 이어 금천구에서 두 번째로 넓고 긴 길이다. 20m 폭의 독산로에는 유흥업소 40여 곳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독산, 시흥의 6개 동 주민들이 오가는 길이고, 학생들 통학로이기도 하다. 독산로의 보행환경 개선은 주민들의 요구가 강한 사업이었지만 건물주, 영업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저마다의 입장이 달라 진행이 쉽지 않았다. 독산로 보행환경 개선처럼 행정의 힘만으로는 풀기 힘든 문제를 주민과 지방정부가 협치회의를 구성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금천구의 협치 움직임은 2015년부터 시작됐다. 차성수 구청장은 개청 20주년을 맞아 민관이 함께하는 미래발전계획을 제안했다. ‘2030 금천구 미래발전계획’을 위해 민관이 함께하는 금천 비전위원회를 만들었다. 주민과 전문가 86명, 공무원 11명 모두 97명이 참여해 중장기 실행계획을 마련했다. 2016년 9월 협치 추진을 위한 민관합동 티에프(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9차례 회의했다.
3년간의 준비 활동을 바탕으로 금천협치회의가 지난해 5월 출범했다. 구청장의 강한 의지로 협치 추진을 위한 전담부서 신설과 조례 마련도 속도감 있게 추진되었다. 지난해 1월 자치구 가운데 처음으로 협치 전담부서(지역혁신과)가 만들어졌고, 민관 합동 티에프 회의에서 나온 의견을 반영해 조례(‘민관 협치 활성화를 위한 기본 조례’)가 3월 제정되었다. 두 달 뒤 민간위원 25명(공무원 5명)을 공모로 뽑아 협치회의 구성을 마무리했다. 협치회의는 5개 분과(교육·문화, 주민 자치·기획, 도시·환경·안전, 청년·경제일자리, 복지·건강)로 나뉘어 활동을 시작했다.
금천협치회의의 첫 성과는 청년·경제일자리분과위원회에서 나왔다. 청년·경제일자리분과위원회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독산로 보행로 개선 사업을 추진해 1호점 라라랜드를 연 것이다. 분과위가 나서서 주민 네트워크를 활용하니 건물주와 업소 주인의 사정이 쉽게 파악됐다. 신협은 이사회를 열어 비어 있던 지하 공간을 월세 없이 보증금만 받고 주민 공유공간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마을건축협동조합이 실비로 리모델링을 맡았다. 구청은 청소를 해주고, 집기도 제공했다. 협치회의 공동의장과 분과장이 나서서 공기청정기와 노래방 기기를 마련했다. 청년·경제일자리분과위원회의 김준호 분과장은 “지역 문제를 풀기 위해 주민과 금천구가 손잡고 권한과 책임을 나눠 작은 성과를 만들고 있어, 힘들지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금천구 독산로 옛 유흥주점 노래방(왼쪽 사진)이 지난 3월 말 주민공유공간 ‘라라랜드’로 변신했다. (오른쪽 사진) 지난 1일 라라랜드 입구에서 금천협치회의 청년·경제일자리분과 독산로 보행환경 개선 사업 관계자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선경 금천구 지역혁신과 팀장, 김준호 분과장, 노하연 라라스쿨 대표, 유희정 주무관.
금천구의 협치 과정의 두 기둥은 교육과 공론장이다. 협치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협치 기본교육을 꼭 받아야 참가 자격이 생긴다. 그간 주민과 공무원 860명쯤이 교육을 받았다. 지역혁신과 김선경 팀장은 “주민과 직원들의 흥미와 참여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딱딱하고 지루하다는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교육 프로그램 이름을 요리에 빗대 표현했다. ‘협치 비빔밥워크숍’은 민과 관이 비빔밥 재료처럼 서로 잘 섞여야 한다는 뜻으로 붙였다. 공무원에게 한 ‘협치 요리조리학교’에서는 협치의 쓴맛·짠맛·신맛·단맛을 주제로 ‘협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등을 워크숍 방식으로 심화교육을 했다.
교육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의견을 나누는 공론장 ‘나풀나풀(나누고 풀고) 협치론장’이다. 주민의 눈으로 지역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찾아 정리했다. 주민 조사원(마을특파원)이 골목 2776곳의 좋은 점과 문제점을 찾아 분류하고 목록을 만들어 알맹이 있는 토론이 되게 했다. 5가지 의제(쓰레기·의류 수거함 개선, 위험 전신주 정비, 독산로 보행환경 개선, 골목길 개선, 학교 주변 보행길 개선)가 나왔다. 지난해 초부터 교육과 공론장 진행을 맡은 김선경 팀장은 “협치는 쓴맛으로 시작해 단맛으로 바뀌는 것 같다”고 말한다.
청년·경제일자리분과위원회는 지난 4월30일 독산로 보행개선 사업 2호점을 계약했다. 유흥업소의 권리금(300만원)은 사회적협동조합금천사회경제연대가 대신 내줬다.
김준호 분과장은 금천구 주민들의 협치 의지는 강하다고 전한다. 그는 “협치의 강을 건너기 전과 후는 다르다. 구청장이 누가 되더라도 협치는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다”고 힘줘 말했다.
이현숙 기자 hslee@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사진 금천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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