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어떤 병이든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제마의 가르침대로

홍성균한의원 since1919

등록 : 2018-05-10 15:42
의술로 민중 구제 의식 강했던

할아버지 홍순승의 인술 계승

기질과 환경서 병 원인 찾아

성균, 홍순승 넷째 아들의 장자

논현역 부근 먹자골목 4층 건물

난임 등 여성 질환에 중점

연예인 등 유명인사 방문 즐비

진맥법 등 집안의 치료법 고수


환자 오래 보기 위해 예약제 철저

1919년 1대 홍순승이 행림한의원을 연 이래 홍씨 가문의 한의원은 돈암동 홍씨한의원(1955), 논현동 홍성균한의원, 인천 홍일한의원 등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다. 홍성균한의원의 홍성균 원장이 병원 입구 계단에 걸린 사진들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홍 원장의 할아버지 홍순승이다.

서울시가 보호·보존할 가치가 높은 ‘미래유산’으로 선정한 138곳(시민생활 분야) 가운데 한의원은 네 곳이 들어 있다. ‘서울 동쪽의 환자를 구제한다’는 동제한의원(1976)을 비롯해, 1969년 문을 연 종로 유일한의원, 도봉구의 성진한의원(1986)과 함께 강남 지역으로는 드물게 논현동의 홍성균한의원이 포함돼 있다. 이곳에 자리잡은 때가 1991년이라고 하니 표면상의 역사도 가장 짧다.

미래유산 선정 사유에는 “홍성균한의원은 1919년에 개원, 100년 가까이 3대를 이어온 한의원으로 우리나라 근대 한의학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설명문만으로는 잘 납득이 안 되지만 병원에 걸린 초상화를 보면 그 까닭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초상의 주인 홍순승(1889~1961)은 1919년 한의원을 시작해 일제강점기와 6·25 전후를 지나는 어려운 시기에 민중에게 인술(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을 펼치고 임상의술서 <홍가정진비전>(洪家定診秘傳)(1955)을 남긴 명의(<근현대한의학 인물 실록>, 김남일, 2011)로 역사에 기록됐다. 홍성균한의원 원장 성균(72)은 그의 손자이다.

홍성균한의원 입구 계단 벽에 붙어 있는 사진들은 이 한의원의 가계(집안의 계통)를 그대로 보여준다. ‘치료한다는 것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다’라는 좌우명이 쓰인 4대 은기(부산 자생한방병원 척추전문의)와 학기(성균의 사촌 형, 성헌의 아들·인천 홍일한의원장)의 사진이 먼저 보이고 3대 성헌(92·돈암동 홍씨한의원 원장)과 성균, 2대의 주표(성균의 숙부·수인당한의원 운영)에 이어, 왼손으로 턱을 괴고 신중하게 처방전을 쓰는 모습의 1대 초상화가 환자를 맞이한다. 성균의 사진에는 ‘땅으로 넘어진 자는 다시 그 땅을 밟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는 문구가 붙어 있다. 환자의 기질과 환경에서 병의 원인을 찾는 홍씨 가문의 의술 철학을 압축하고 있다.

홍순승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성균은 넷째 아들의 장자이며, 성헌은 홍씨한의원을 계승한 장손이다. 그의 셋째 아들 학기는 1980년대 노동자의 건강권 수호에 앞장선 인천 지역의 민중의료운동가로 유명하다. 이 밖에도 여러 방계 자손이 한의사와 의사, 약사의 길을 걷는다고 하니 번성한 의생 가문이다.

#의사가 자신의 이름을 간판에 쓴 홍성균한의원은 강남구 논현역 부근 먹자골목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1976년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관악구에서 병원을 시작한 성균은 착실히 돈을 모아 15년 만에 논현동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을 짓고 27년째 한의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하층에는 탕제실이 있어서 처방전이 나오면 바로 약을 지을 수 있다. 1~2층은 진료실과 약제실로 쓰고, 3~4층은 가족의 살림집이다.

침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침과 뜸 치료, 난임 등 여성질환 치료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병원이 작성해온 내원환자 방명록을 보면 정·관계의 유력 인사들을 비롯해 유명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이 즐비하다. 그는 자신의 치료 방식에 대해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집안 고유의 진료법을 중심으로 하는 만큼, 전통을 고수하는 쪽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홍성균한의원의 진맥법은 독특하다. 사람 맥이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인 점에 착안한 이 진맥법은 홍순승으로부터 출발했다. 이제마의 사상(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학을 음과 양으로 압축하고, 이를 인체의 좌우에 적용한 진맥법이 이른바 홍순승의 ‘좌우론’이다. “홍순승의 좌우론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치료 방안이다. 현실적으로 인체의 외형과 좌우 균형이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며 차이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를 진단학적 판단의 방안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은 진단학에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김남일, 앞의 책)

홍성균한의원에서는 홍순승의 ‘좌우론’에 따라 맥을 살핀다.

홍순승이 자신의 이런 비방(남에게 공개하지 않는 특효의 약방문)을 세상에 공개한 책이 <홍가정진비전>이다. 근대 의학 초기 시절에 자신만의 지식과 경험을 세상에 공개해 대중화를 허용하는 일은 “의술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애민의식이 없고서는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소석(小石) 홍순승은 일찍이 한의학의 근대적 교육을 강조해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한의대(경희대 한의대)의 전신인 동양한의과대학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그는 의술로 민중을 구제한다는 유의(의사이면서 유교 교리에 통달한 사람)적 소명의식이 높은 사람이었다.

경기도 가평의 남양 홍씨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한지의생(일정 지역 안에서만 의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의생)이 된 그는 1919년 서울에 진출해 당시 종로구 통의동에 행림한의원을 연다. 이것이 홍씨한의원의 시초다. 그가 30대 초반에 처음 문을 연 병원 이름이 ‘행림’(杏林)인 것이 눈길을 끈다. 행림은 중국 오나라 때의 명의 동봉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동봉은 가난한 환자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 대신 병이 나으면 살구나무를 몇 그루씩 심도록 했는데 훗날 그의 집 주변이 온통 살구나무 숲을 이뤘다는 이야기다. 첫 의업을 시작하는 젊은 의생의 뜨거운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내가 살았던 돈암동에 ‘홍약국’(정식 이름은 홍씨한의원)이라고 하는 장안의 명의 집안이 있었다. 원래 홍약국의 명의는 지금 원장을 하시는 홍성헌 선생의 조부로 남양 홍씨 소석 홍순승이라는 할아버지였다. 우리 형제들은 홍약국 옆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한옥에서 서울 유학을 다 끝마쳤기 때문에 홍약국 집과는 근 반세기의 인연이 깊다. 홍 할아버지는 참으로 고결한 품덕을 지닌 명의였던 것 같다. 항상 그 집 앞에 병자들이 줄을 지어 있던 모습이 눈에 생생하게 서린다.” (김용옥, <너와 나의 한의학>, 1996)

철학자 김용옥의 회고와 더불어 성균 형제들도 할아버지가 임종할 때의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당신께서도 병이 위중한 상태였는데 환자가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이 환자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진단을 하고 처방까지 써주셨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운명하셨다.”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의사다운 최후였다.

병원 건물 지하에 약제실을 마련해 직접 약을 짓는다. 같은 병증이라도 환자마다 약 처방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자랑이다.

홍순승이 한의로서 남긴 중요한 업적은 자신의 임상 경험을 담은 <홍가정진비전>을 저술해 후학들에게 남긴 것이다. <홍가정진비전>은 음양 원리에 따라 병을 다루되 개인의 기질과 생활 상황에 따라 병의 원인과 처방이 달라야 함을 전제로, 신체를 좌우로 나눠 병증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비방을 소개하고 있다. 홍순승은 이 책을 지은 동기를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의술 원리를 알아도 병자의 기질·성격과 처지·습관에 따라 병증이 다름을 알고 처방해야 한다. 그런데 의료기관(의사)이 적고 의학 지식을 갖춘 가정도 적다. 이로 인해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해치는 일을 걱정하여 보편적 치료법을 대중에게 보급시키니 사람마다 보통의 상식이 되기를 바란다.”(요지) 이처럼 자신의 의술을 아낌없이 공개하고,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말미에 의학용어를 한글로 설명한 ‘의학자전’까지 덧붙인 것은 의료 대중화에 대한 그의 선구적인 생각을 잘 보여준다.

홍순승의 약전에 해당하는 <홍소석전>(洪小石傳)은 “일찍부터 민중을 제활할 뜻을 둔 옹(홍순승)이 자신의 의술 경험을 저술하여 여러 후학들에게 전하니 만인의 칭송을 받았다”는 당시 사람들의 평가를 전하고 있다.

#홍성균은 진료실 책상 위에 옛 의서를 수북이 쌓아놓고 일한다. 생각날 때마다 책을 쉽게 찾아보기 위해서다. “요즘도 의서를 읽다보면 아, 이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새삼 또 배우고 배웁니다. 의사가 날마다 새롭게 깨닫는다면 환자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아마 할아버지도 그랬을 겁니다.” 그는 예약진료제를 되도록 철저히 지키려고 한단다. 환자당 최소 30분 이상 상담하기 위해서다. “어떤 병이라도 항상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이제마 선생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긴다”는 그는 아들도 같은 마음을 닦아 홍씨 가문 한의원의 명망을 이어가주길 바란다.

흰색가운과 모자를 쓴 한의사의 모습에서 한방의술에 자부심이 느껴진다. 펜·수채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성균을 비롯한 자손들은 수재의연금이나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낼 때 이름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대대로 전승하고 있고, 한의과대학을 세울 때는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그 어떤 청탁도 하지 않은 할아버지를 귀감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 베풂과 공의(공평하고 의로운 도의)가 있었기에 자손들이 두루 이름이 나고 번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예가 여초 김응현의 부친인 안동 사람 김윤동이 쓴 <홍소석전>은 홍순승이 평소 가솔들을 가르친 말도 전한다. “형제간에 우애할 것(與弟友愛), 물건에 내것 네것이 없을 것(物無爾我), 가족끼리 헐뜯지 말 것(庭無閒言), 친척들에게 화목할 것(睦于宗戚).” 김윤동은 홍순승이 이런 제가(齊家)를 바탕으로 “인술로 사람들을 제활(濟活)하는 뜻을 밀고 나갔으니, 그 자손들이 번성해 조상의 음덕을 계승하고 가문이 크게 번창하도록 하늘의 보살핌이 있으라”고 축원하고 있다. 무술년에 썼다고 하니 1958년 홍순승의 칠순을 기념한 글로 짐작된다. 60년이 흐른 지금 홍씨 가문의 한의원은 홍순승으로부터 4대로 이어지고 있고, 여러 자손이 의업의 가지를 뻗고 있다.

홍성균 원장이 기자에게 직접 침을 놓아 효과를 체험해보게 했다.

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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