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몽골 말과 조선 활로 무장한 ‘궁기병’ 육성의 흔적
성동구 행당동 마조단 터
등록 : 2018-05-31 14:39 수정 : 2018-06-01 14:07
말 무사 사육을 빌던 제단
전국 목장·말 사육 책임진
왕실목장 살곶이목장서 마조제
궁기병 유지하기 위해 목장 운영
조선 한때 말 4만 마리 사육
전투용 말 1필 노예 6~7명 값
국영 목장제 양 전란 거치며 쇠퇴
병자호란 항복 조건으로
청, 군마를 키우지 못하게 해
서울 성동구 행당동 17 마조단(馬祖壇) 옛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마조단 푯돌은 한양대 중앙도서관 백남학술자료관 옆 화단에 말없이 서 있다. 백남학술자료관 출입구에서 제1공학관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이다. 푯돌이 있는 지점에서 보면 제1공학관, 학군단, HIT관, 생활과학대학 등 캠퍼스의 높고 낮은 건물이 모두 발아래 도열해 있다. 마조단 푯돌이 있는 한양대는 살곶이다리에서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 성동교응봉교용비교두무교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길목이다. 왼쪽으로 응봉동과 옥수동이, 오른쪽으로 서울숲이 펼쳐진다.
중랑천변 살곶이다리는 한양에서 강원도와 충청도로 나가는 주요 관문이었다. 지금도 내부순환도로와 지하철2호선, 동부간선도로가 다리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려면 한강을 또 건너야 한다. 옛사람들이 뚝섬을 섬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한양대 지하철역 인근 성동구 행당동 66의3 행당중학교에 세워진 전관원(조선시대 여관) 터 푯돌 역시 장소의 정치지리학을 역설한다. 조선팔도를 잇는 주요 도로에는 2개의 역(청파역, 노원역)과 4개의 원(전관원, 이태원, 홍제원, 보제원)이 교통 결절지 구실을 했다. 전관원은 한양의 동남쪽을 오가는 길손들의 쉼터였다.
마조단은 말이 돌림병 없이, 무사히 살게 해달라며 제사를 지낸 제단이다. 전국 목장과 말 사육을 책임진 사복시 소속 왕실목장 살곶이목장에서 마조제가 열렸다. 말의 수호신인 마조(馬祖), 최초로 말을 기른 선목(先牧), 말을 처음 탄 마사(馬社), 말을 해롭게 하는 마보(馬步)의 신위를 각각 모셨다. 마조제는 1908년 폐지됐다.
마조단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현재보다 아래쪽인 한양대 교육대학원과 한양대 지하철역 사이쯤이라는 주장이다. 어쨌든 한양도성 광희문에서 10리쯤 떨어진 왕십리의 끝이자 뚝섬의 출발점인 살곶이다리 서쪽 언덕 위, 한양대 안에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도성을 감싸고 있는 사대문 밖 성저십리는 성밖이지만 행정적으로는 한성부에 속했다. 성저십리의 동쪽 벌판을 동교(東郊·동대문 밖 근교)라고 했는데 동교는 광희문 밖에서 아차산까지 이어졌다. 소비도시 한양을 먹여 살리고, 지키는 배후 지역이었다.
동교는 왕실목장-군대 주둔지-채소 재배지-시장 순으로 땅의 성격이 변했다. 조선은 말 사육을 국가 기간사업으로 중시했으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항복 조건에 군마를 키우지 못하게 하면서 목장 기능은 쇠하고 훈련도감 군인 거주지가 됐다. 또 사대문 안 사람들이 먹을 채소와 물자를 공급하는 경작지와 시장으로 바뀌었다.
마전교·마장동·면목동·자양동·송정동이라는 지명은 목축업, 전농동·제기동은 농업, 미근동은 채소 재배의 흔적이다. 살곶이벌, 살곶이목장, 장안평이라는 지명도 이곳이 한때 허허벌판이었음을 말해준다. 서울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배오개시장이나 마장동 축산물시장, 뚝섬 경마장은 장소의 관성이 이어진 결과다.
이 일대 벌판은 강과 산을 끼고 있어서 수시로 군사훈련이 이뤄졌고, 태조 이후 성종까지 100여 년 동안 150차례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왕의 행차가 잦은 탓에 제천정(한남동), 낙천정(자양동), 화양정(화양동) 등 행궁 역할을 하는 누정(누각과 정자)이 세워졌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돼 한양으로 들어오는 첫 나루 뚝섬나루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조선은 왜 동교에 목장을 마련했을까. 조선군의 주력 부대인 궁기병(弓騎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군마로 꼽히는 몽골 말과 조선 활로 무장했다. 몽골 말은 조랑말보다 조금 큰 정도지만 지구력과 체력, 적응력이 뛰어났다. 다리가 짧아서 산길을 오르내리기에 적합했다. 고구려군은 만주 말을 탔지만, 이후 원나라에서 들어온 몽골 말이 주를 이뤘다.
조선은 전국에 159개의 국영 목장을 설치해 최대 4만 마리의 말을 길렀다. 사육사와 수의사, 목동도 양성했다. 늘 군마의 조달이 문제였다. 말은 크게 전투용 말과 수송용 말로 구분되는데, 전투용 군마 한 필 값이 쌀 30가마가 넘었다. 남자 노비 6~7명 값이고, 자영농의 1.5~2년 치 생산량에 맞먹었다. 국영 목장 제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을 거치면서 제주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쇠퇴했다. 조선 말기엔 5천마리 정도 남았다. 유목민이 토착민화한 것이다.
광진구 화양동 122 화양정에는 세종과 단종 그리고 명성황후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화양정 옛터는 화양동주민센터 앞 느티나무공원 안이다. 어린이대공원역 4번 출구에서 300m, 건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900m쯤 떨어져 있다. 능동로 17길로 접어들어 화양동주민센터를 찾아가면 된다. 700년 묵은 느티나무 거목이 반긴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호, 높이는 28m, 둘레는 7.5m이다.
화양정은 100칸짜리 왕의 행궁이었다. ‘화양’이란 세종이 목초지에서 떼 지어 돌아오는 군마의 모습을 보고 <주서>의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말을 화산 남쪽으로 돌려보낸다)에서 ‘화’자와 ‘양’자를 따서 직접 지은 이름이다.
세종의 손자 단종이 영월 유배길의 첫날밤을 이곳에서 지낸 뒤, 정자 이름을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회행정’(回行亭)이라고 지었지만 돌아오지 못했다는 설과 단종과 마지막 밤을 보낸 정순왕후 송씨가 “꼭 돌아오라(回行)”며 남긴 마지막 인사말이라는 얘기도 있다.
여기에 1882년 임오군란 통에 장호원으로 피신하던 명성황후가 변복하고 화양정에서 쉬고 있을 때 몰려든 동네 아낙들이 “민비라는 못된 왕비 탓에 피난 가나?”라고 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화양정의 모습은 1678년 사복시 제조 허목이 그린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에 나온다. 그림 속에 살곶이다리와 두모포(성동구 옥수동의 한강변 옛 지명)도 그려져 있다. 목장 안에는 화양정과 말을 치료하거나 관리하는 장소가 표시돼 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42면의 채색 필사본으로 한 폭, 한 면마다 군명(郡名·군 이름)과 이정표가 씌어 있다. 전국의 목장 위치와 소와 말, 그리고 목장의 면적까지 쓰여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목장 지도는 보물 제1595호-1호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청, 군마를 키우지 못하게 해
서울 광진구 화양동 122 화양동주민센터 앞에 수령 700년의 느티나무가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세종과 단종 그리고 명성황후에 얽힌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한양대 앞 살곶이 다리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다. 왕실목장 살곶이벌의 상징이다.
17세기에 제작된 진헌마정색도는 화양정과 전국 목장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