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7일 성북구 정릉동 도전숙 4호점에 사는 창업자 허경환 ‘패션맵‘ 대표의 집 거실에서 허 대표가 아들 신이를 보살피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우유를 먹은 신이가 아빠의 품에 안겼다. 태어난 지 70일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이다. 허경환(33)씨는 아들 신이가 트림을 하도록 등을 쓰다듬어준다. 신이가 감고 있는 눈을 살짝 떠 아빠를 빤히 쳐다본다. “깼어?” 신이가 옅게 웃자 그의 입꼬리도 절로 올라간다. 거실에 아기 이불을 펴고 신이를 눕힌다. 그리고 허씨는 다시 업무를 보러 작은 방 책상에 앉는다.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신이 가족의 보금자리는 ‘도전숙’ 4호점이다. 신이는 도전숙에서 태어난 두 번째 아이다. 도전숙은 청년 창업자와 예비 창업자를 위한 맞춤형 공공임대주택이다. ‘도전하는 사람들의 꿈을 응원하는 집’이라는 뜻의 도전숙은 업무와 거주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도전숙은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고, 서울지방중소벤처기업청과 자치구가 대상 기업을 찾아 선정하고 사후 관리를 맡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서울시는 사업 예산을 적극 지원한다. 성북구는 2014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전숙 사업을 시작했다. 2017년까지 정릉동에 1~6호점, 보문동에 7호점을 공급했고, 올해는 장위동에 8·9호점을 마련했다. 10월 보문동에 10호점이 열리면 모두 144가구가 살게 된다. 성북구는 이 사업으로 지방자치 정책 대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허씨는 자신에게 도전숙은 우산이라고 말한다. 비가 내려도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도와준다는 뜻이다. 2013년 인천대 창업지원단의 도움을 받아 패션 정보 큐레이션(콘텐츠를 목적에 따라 분류하고 나누는 일) 모바일 앱으로 지역 기반의 패션 정보 공유 서비스를 하려 했다. 지도를 이용해 유행하는 패션 정보를 찾고 쇼핑 경험을 실시간 올려 정보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창업진흥원의 육성사업 지원금을 받아 앱 개발을 추진했는데, 상용화에 이르지 못했다. 지원금이 떨어지자 개발자들도 떠났다. “앱 만들기는 쉽지만, 사람들이 사용하기까지는 어렵다는 걸 경험했어요.” 소비자뿐만 아니라 의류 제조업체가 원하는 점도 좀더 잘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그가 꿈을 포기하지 않게 도전숙이 큰 힘이 되어줬다. 허경환씨는 청년창업 지원 정보를 찾아 성북구 1인창조기업지원센터에 입주했다. 최승철 센터장이 도전숙 정보를 알려줬다. 사업계획서 심사를 거쳐 1호점에 입주해 2년 가까이 살았다. 사무 공간과 주거 공간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어 사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청년 창업자인 그는 현재 ‘패션맵’의 대표다. ‘패션맵 스토어’ 쇼핑몰을 열어 국내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 중소 의류브랜드 온라인 위탁판매를 하고 있다. 주로 20~30대 남녀 의류와 패션 잡화를 판다.
결혼을 하니 4평의 도전숙에서 아내와 함께 살기는 힘들었다. 2015년 9월 도전숙을 나왔다. 보증금 5천만원에 월세 80만원을 내고 살았다. 학원강사인 아내와 같이 벌었지만 적잖게 부담이 되었다. 도전숙 부부동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서를 냈다. 전용면적 54.05~59.09㎡(18평, 방 3개)에 월 임대료는 19만~35만원, 임대보증금은 1500만~2700만원이었다. 다행히 심사를 거쳐 입주 기회가 생겼다. “주거비 부담이 확 줄어드니 생활이 안정되었어요. 아기 출산 계획도 세울 수 있었지요.”
실제 도전숙 4호점 부부동에는 8가구가 입주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도전숙에 살다 결혼한 가구가 3가구, 결혼해 도전숙에 들어와 아이를 낳은 가구는 2가구다.
(왼쪽부터) 성북구 도전숙의 첫 부부동인 4호점 거주 8가구 가운데 4가구가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사진은 4호점 입구에 늘어서 있는 유모차 모습. 허경환 ‘패션맵‘ 대표가 작은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최승철 센터장은 “청년이 주거비 걱정 없이 도전하고 사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자, 도전숙에 살며 결혼하고 출산도 했다. 도전숙이 단순히 청년 창업자를 위한 업무·주거 공간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3월엔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몇 차례 간담회와 관련 기관의 검토를 거쳐 도전숙 최대 거주 기간이 6년으로 연장된 것이다.
허경환 대표는 창업하고 난 뒤 3~7년차에 겪게 되는 ‘죽음의 계곡’(데스 밸리)을 무사히 넘기는 데 큰 힘이 될 거라 기대한다. “사업하다보니 한번씩 어려움이 오는데, 임대료와 주거비 부담이 적으면 한결 수월하죠. 고비를 잘 넘기고 사업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꿈도 펼쳐갈 수 있어요.”
도전숙에 사는 데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이가 자라면 놀 수 있는 놀이터나 공원이 주변에 마땅히 없다. 아이가 있다보니 업무 공간도 문제다. 집에서 일하기가 어려울 때도 생긴다. 디자이너와 개발자들과 협업해야 할 때는 좀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4호점엔 전용 공유업무 공간이 없어 다른 도전숙의 공용회의실을 이용해야 한다.
그래도 허경환 대표에게 도전숙은 좋은 사업 파트너다. 자신처럼 다른 청년 창업자들도 혜택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도전숙 덕분에 제가 창업의 꿈을 펼쳐가며 결혼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었어요. 도전숙을 넘어 도전타운이 만들어져 청년 창업가들이 함께하면 더 큰 변화가 생길 거라 기대합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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