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마흔, 나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는 시기
나이 40 이야기하며 2부 리그로 강등된 축구 선수 표정 짓는 그녀에게
등록 : 2018-06-14 14:41
그 고비로 고꾸라지거나 상승하거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시기
인생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은
그 시기가 지나야…인생의 아이러니
처음은 언제나 낯설고 어렵다. 낯설고 익숙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가 호칭이다.
얼마 전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함께 탔는데, 경로석은 만석이었고 일반석에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에 집중하거나 눈을 감고 있을 뿐 아무도 양보할 기미가 없었다. 눈이 마주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어린아이와 함께 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쑥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자리를 양보받으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자, 인사해봐, 저 할아버지에게!”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졸지에 아저씨에서 할아버지로 호칭이 바뀐 것이다. 게다가 내 자식들은 결혼하려면 한참 시간이 남았으니 벌써 할아버지로 강제 승격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했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가르침 그대로, 어린아이는 나를 뻔히 보며 생글생글 이렇게 외쳤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아, 그것은 ‘의문의 1패’였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느닷없이 물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 계속 서 있기 민망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척 다른 전통차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그 여파는 컸다. 그날 강연장에서 나는 계속 말이 겉돌았다. 여러 번 같은 주제로 강연했기에 평소 같으면 물 흐르듯 진행할 수 있었지만, 그날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고, 이야기 흐름이 종종 끊겼다. 뭔지 모르게 과녁에서 살짝 벗어난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바로 ‘할아버지’란 낯선 호칭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호칭은 민감한 영역이다. 한 번 사장은 영원한 사장, 본부장은 영원한 본부장이다. 많은 이들이 퇴직한 다음에도 최후의 직급으로 불러주길 희망한다. 교수들은 퇴직 후에도 교수님이고,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져도 의원님이라 불러줘야 한다. 그보다 낮다고 생각되는 다른 호칭을 불러주면 섭섭해한다. 그런 것처럼 아가씨는 영원한 아가씨, 청년은 영원한 청년으로 머물고 싶어 한다. 아가씨에서 아줌마, 청년에서 아저씨로 호칭이 바뀐다는 것은 한 사람의 우주가 바뀌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젠가부터 아가씨, 아줌마 호칭 대신 언니, 이모가 자리잡았다. 여성들의 민감도가 더욱 큰 것 같다. “남자들은 여자 나이 40살이 된다는 기분을 알 수 있어요?” 어떤 모임에서 위로받기 위해 그 화제를 꺼냈던 내가 오히려 머쓱해졌다. 그녀는 흡사 1부 리그에 있다가 2부 리그로 강등이 확정된 프로축구팀 선수 같았다. 아니면 벚꽃이 지고 난 직후의 쓸쓸한 분위기랄까. 그녀는 더 이상 기분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마흔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40대란 인생의 전성기를 지나고 하강곡선의 시작점인가? 혹은 본격적인 전성기의 출발점인가? 그 기분은 국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순전히 통계로만 본다면 마흔은 이제 더 이상 중년이 아니다. <100세 인생>의 저자인 경제학자 앤드루 스콧 같은 전문가는 지금 마흔 살인 사람은 95세까지 살 확률이 50%나 된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니까. 피가 뜨거운 20대와 30대의 질풍노도 시대를 거쳐, 조금은 차분해진 계절, 여전히 청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돌이켜보니 나와 내 친구들은 그 나이를 기점으로 마치 피벗 게임을 하는 듯했다. 인생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한 구간을 지나 극적인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 무척 활발하고 씩씩하던 한 친구는 직장을 바꾸고 이혼을 하고 그러면서 태엽 풀린 장난감 비행기처럼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반면에 평범하기 짝이 없던 다른 친구는 엄청난 에너지로 40대를 온전히 자기의 시기로 만들었다.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고 부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자기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는 시기다. 비로소 자기 삶을 발견하는 시기다. 마치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작가 자신을 몸 밖으로 끌어내듯이,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확인하는 때다. 무엇이 되었건 익숙했던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예술가들은 그것을 가리켜 창작의 고통이라고 한다. 그러니 인생이라는 이름의 창작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랑질이나 열등감 모두 잠시 옆으로 제쳐놓고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날을 생각할 때다. 누구나 자기 인생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스무 살은 스무 살대로, 서른에 진입한 사람은 그 사람대로 고통스러워한다. 40대, 50대 모두 마찬가지다. 인생이란 객관식이 아니고 주관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야 그 시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것이 인생의 패러독스다. 서른 살이 얼마나 인생의 아름다웠던 시기였는지는 마흔이 되어보아야 안다. 그렇듯 마흔이 얼마나 인생의 황금기인지는 50살이 되어보아야 안다. 마흔, 인생의 전성기인가? 험난한 지옥의 레이스에 접어든 걸까?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새로운 나이테에 접어들 때마다 주저하고 투덜거리는 사람과 과감히 떨쳐버리고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 인생은 그렇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마흔 살에 투덜거리는 사람은 50이 되어서는 더욱더 투덜거릴 확률이 높다. 나이와 행복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식물과 동물, 심지어 물건도 관심과 애정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게 자라서 나와 친구가 되고 내 편이 되어준다. 마흔 살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미워하지 말자. 40대를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졸지에 아저씨에서 할아버지로 호칭이 바뀐 것이다. 게다가 내 자식들은 결혼하려면 한참 시간이 남았으니 벌써 할아버지로 강제 승격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했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가르침 그대로, 어린아이는 나를 뻔히 보며 생글생글 이렇게 외쳤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아, 그것은 ‘의문의 1패’였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느닷없이 물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 계속 서 있기 민망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척 다른 전통차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그 여파는 컸다. 그날 강연장에서 나는 계속 말이 겉돌았다. 여러 번 같은 주제로 강연했기에 평소 같으면 물 흐르듯 진행할 수 있었지만, 그날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고, 이야기 흐름이 종종 끊겼다. 뭔지 모르게 과녁에서 살짝 벗어난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바로 ‘할아버지’란 낯선 호칭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호칭은 민감한 영역이다. 한 번 사장은 영원한 사장, 본부장은 영원한 본부장이다. 많은 이들이 퇴직한 다음에도 최후의 직급으로 불러주길 희망한다. 교수들은 퇴직 후에도 교수님이고,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져도 의원님이라 불러줘야 한다. 그보다 낮다고 생각되는 다른 호칭을 불러주면 섭섭해한다. 그런 것처럼 아가씨는 영원한 아가씨, 청년은 영원한 청년으로 머물고 싶어 한다. 아가씨에서 아줌마, 청년에서 아저씨로 호칭이 바뀐다는 것은 한 사람의 우주가 바뀌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젠가부터 아가씨, 아줌마 호칭 대신 언니, 이모가 자리잡았다. 여성들의 민감도가 더욱 큰 것 같다. “남자들은 여자 나이 40살이 된다는 기분을 알 수 있어요?” 어떤 모임에서 위로받기 위해 그 화제를 꺼냈던 내가 오히려 머쓱해졌다. 그녀는 흡사 1부 리그에 있다가 2부 리그로 강등이 확정된 프로축구팀 선수 같았다. 아니면 벚꽃이 지고 난 직후의 쓸쓸한 분위기랄까. 그녀는 더 이상 기분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마흔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40대란 인생의 전성기를 지나고 하강곡선의 시작점인가? 혹은 본격적인 전성기의 출발점인가? 그 기분은 국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순전히 통계로만 본다면 마흔은 이제 더 이상 중년이 아니다. <100세 인생>의 저자인 경제학자 앤드루 스콧 같은 전문가는 지금 마흔 살인 사람은 95세까지 살 확률이 50%나 된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니까. 피가 뜨거운 20대와 30대의 질풍노도 시대를 거쳐, 조금은 차분해진 계절, 여전히 청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돌이켜보니 나와 내 친구들은 그 나이를 기점으로 마치 피벗 게임을 하는 듯했다. 인생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한 구간을 지나 극적인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 무척 활발하고 씩씩하던 한 친구는 직장을 바꾸고 이혼을 하고 그러면서 태엽 풀린 장난감 비행기처럼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반면에 평범하기 짝이 없던 다른 친구는 엄청난 에너지로 40대를 온전히 자기의 시기로 만들었다.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고 부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자기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는 시기다. 비로소 자기 삶을 발견하는 시기다. 마치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작가 자신을 몸 밖으로 끌어내듯이,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확인하는 때다. 무엇이 되었건 익숙했던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예술가들은 그것을 가리켜 창작의 고통이라고 한다. 그러니 인생이라는 이름의 창작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랑질이나 열등감 모두 잠시 옆으로 제쳐놓고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날을 생각할 때다. 누구나 자기 인생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스무 살은 스무 살대로, 서른에 진입한 사람은 그 사람대로 고통스러워한다. 40대, 50대 모두 마찬가지다. 인생이란 객관식이 아니고 주관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야 그 시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것이 인생의 패러독스다. 서른 살이 얼마나 인생의 아름다웠던 시기였는지는 마흔이 되어보아야 안다. 그렇듯 마흔이 얼마나 인생의 황금기인지는 50살이 되어보아야 안다. 마흔, 인생의 전성기인가? 험난한 지옥의 레이스에 접어든 걸까?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새로운 나이테에 접어들 때마다 주저하고 투덜거리는 사람과 과감히 떨쳐버리고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 인생은 그렇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마흔 살에 투덜거리는 사람은 50이 되어서는 더욱더 투덜거릴 확률이 높다. 나이와 행복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식물과 동물, 심지어 물건도 관심과 애정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게 자라서 나와 친구가 되고 내 편이 되어준다. 마흔 살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미워하지 말자. 40대를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