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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 열자 50만 점의 사진·필름이 눈앞에

근현대 사진기록물 ‘보고’ 청암사진연구소에 가보니

등록 : 2018-06-21 15:46 수정 : 2018-06-28 15:00
임인식 호를 따서 40년 전 문 열어

평균 70년 세월에 일부 사진 삭는 중

80여 년 3대 사진, 보관·기억전쟁 중

한국전쟁 기록, 전쟁기념관보다 많아

2대 임정의씨와 3대 임준영씨는 건축전문사진작가다. 아버지는 도시의 변화에 초점을 둔 다큐멘터리 작품을 지향했다면 아들은 건축사진에 예술을 입히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임정의 작가가 1990년 판문점 평화의 집 내부 공간을 찍은 미공개 사진.

“김구 선생도 삭아가는군.” 지난 5월의 마지막 날 오후, 사진첩을 정리하던 임정의(73) 작가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는 바스락 부서질 듯한 사진을 상자에서 몇 장 더 꺼내 보였다. 1948년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한창인 해방 공간의 서울부터 1953년 한국전쟁 전쟁 포로들 교환까지, 교과서나 박물관에서도 본 적 없는 역사의 순간들이 풍화하고 있었다.

서울 광진구 외곽 골목 깊숙한 곳에 청암사진연구소가 있다. 작은 간판을 달고 수십 년째 묵묵한 바위처럼 동네를 지켰다. 겉보기엔 여덟 평 남짓으로 아담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숨은 방이 몇 개 이어지고, 캐비닛과 낡은 상자들이 낯선 손님을 맞는다. 이곳에 1940년대부터 대를 이어 찍은 50만 점 가까운 흑백·컬러 사진과 필름이 잠들어 있다.

사진을 관리하는 이는 임정의 건축전문사진작가다. 그의 아버지도 사진을 했고, 그의 아들도 사진을 한다.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이었던 종군기자, 1대 고 임인식(1920~1998)에 이어 2대 임정의 작가를 거쳐 3대 임준영(42) 건축전문사진작가까지, 80여 년의 업을 잇는 동안 청암사진연구소는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기록물을 차곡차곡 쌓게 됐다.


임정의 작가가 1990년 서초동 법원청사 준공 당시 찍은 미공개 사진.

“내가 참 돌덩이를 짊어지고 살아요. 참 한심하고 억울한 일이야.” 임 작가가 지난해 겨울, 녹아버린 35㎜ 필름을 몇 개 골라 연구소 칠판에 붙였다. ‘썩어가는 걸 경각하기 위해서’라며 한숨을 쉬었다. 설립 40년째인 청암사진연구소는 올해 들어서 더 치열해진 ‘기억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온도와 습도에 예민한 필름과 사진 손상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도 그렇지만, 증언의 주체였던 임 작가의 기억도 희미해진 것이다. 공들여 인화한 사진 1장은 평균 50년, 좋은 재료를 쓰면 100년까지도 간다. 그 후 점차 빛이 바래다가 끝내 백지가 된다. 해방 공간부터 한국전쟁까지 아우르는 청암사진연구소의 사진은 평균 70년차에 접어들었다.

현재 청암사진연구소가 보유한 사진과 필름은 총 50만 점, 그 가운데 한국전쟁과 관련된 사진과 필름은 약 4만5천 점으로 확인됐다. 이는 용산 전쟁기념관이 보유한 총 유물 수(3만3638점)를 가뿐히 넘는 규모다. 임 작가는 “그동안 미국대사관과 일본 현지에서 온 교수들이 사진을 팔라고 하거나 연구하고 싶다며 찾아온 적이 있어요. 한국은 관에서 몇 번 찾아온 적은 있지만, 서로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한국 자체기록물 보유 연구에 소홀해요” 하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한국전쟁만 봐도 그래요. 현재 미국 등 열강이 기록한 사진은 많지만, 한국인이 한국인의 시선으로 기록한 사진은 잘 없어요.” 임 작가는 우리가 기록한 우리 기록물과 타인의 시선으로 기록한 우리 기록물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1951년 국방부 정훈국 임인식 사진대장이 찍은 서울의 모습. 종로로 추정된다. 임정의 제공

근 100년을 압축 성장해온 한국은 동아시아 나라 가운데서도 ‘문화유산 아카이브 연구’가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진기록물은 값을 책정하는 방법부터 제각각이고, 관리 매뉴얼이 없어 소유자 개인이 재량껏 관리하는데,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소실 중인 자료가 늘고 있어요”라며 임 작가는 사진기록물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이해를 부탁했다.

3대 사진가 임준영씨가 찍은 예술 사진 ‘도시의 초상’. 여러장의 건물사진을 합성해 만들었다.

2020년이면 청암 임인식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임 작가는 때를 맞춰 3대의 사진을 바탕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보는 사진 특별전을 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