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정조의 사도세자 참배길 배다리 놓는 관아 터

동작구 주교사 터

등록 : 2018-06-28 14:32
전화박스에 가려 푯돌 잘 안 보여

푯돌 내용도 이해하기 어려워

정조가 머물렀던 용양봉저정

공공건물에 가려져 있어

큰 배 80척·작은 배 400~500척

징발해 널판 1천여 장 깔아 설치

노량진, 유속 평온 수심 깊어

배다리 설치하기 적당한 곳


서울 동작구 노량진 장로교회 옥상 위에서 바라본 한강대교. 옛 노들나루에 배다리를 놓았던 그 자리이다. 정조는 배다리를 건너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에 12차례 다녀갔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서울 동작구 본동 주교사(舟橋司) 터를 찾아떠난다. 서울에서 푯돌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네이버 지도에 물어봐도 ‘주교사 터’는 감감무소식이다. 주교사로 가려면 동작구 본동을 지번으로 가진 용양봉저정을 찾거나 노량진1동 현장민원실이나 ‘본동 작은도서관’을 찾는 편이 낫다. 행정기관 간판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지하철 9호선 노들역 2번 출구에서 한강 쪽으로 160m 떨어진 곳이다. 막상 찾아도 공중전화 박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푯돌은 늘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다.

마침내 발견한 푯돌에는 ‘주교사는 임금이 행차할 때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는 일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조운(漕運)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정조 13년(1789)에 설치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후 업무가 금위영(禁衛營)에 이관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2002년에 설치된 이 푯돌은 다른 푯돌보다 설명이 길다. 두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주교사의 역할과 기능을 이해할 이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요령부득이다. 서울에 설치된 316개 푯돌 대부분은 별도 해설이 필요하다.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문장 해독을 위해 과외 공부를 해야 할 판이다.

‘한강에 배다리(舟橋) 놓는 일을 맡은 관아. 조선 22대 왕 정조가 노들나루(노량진)를 건너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경기도 화성 현륭원에 참배 가려고 설치했다’라고 써야 하지 않을까. 주교사 터 푯돌은 관아의 기능을 알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배다리(작은 배를 한 줄로 여러 척 띄워놓고 그 위에 널판을 건너질러 깐 다리)를 놓은 이유를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했다. 배다리라는 듣기 좋고,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을 썼다면 쉽게 풀릴 일이었다.

정조대왕 초상.

서울 시내 대부분의 푯돌은 문구 하나로 장소의 내력을 읽어내야 하는데, 주교사는 다행히 용양봉저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호)이라는 백만 대군을 원군으로 뒀다. 정자와 주교사는 동전의 양면이다. 문제는 이 정자의 존재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렸다. 푯돌과 정자 둘 다 볼 수 있다면 성공이다. 그러나 푯돌도 정자도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식이다. 정자는 노량진1동 현장민원실이나 본동 작은도서관이라는 간판이 걸린 공공건물 뒤에 있다. 앞으로는 태극기 휘날리는 공공건물이 가리고, 뒤로는 노량진 장로교회의 육중한 십자가 종탑이 누르는 형국이다. 그뿐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폐가가 담을 맞대고 있다.

배다리를 건넌 정조가 이름 붙인 ‘용이 꿈틀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의 용양봉저정은 지금은 사방을 둘러싼 건물에 갇힌 섬이 되었다. 본래 노량나루 건너편 언덕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왕이 참배용으로 머무는 곳이기에 정자를 읊은 시나 노래는 없다. 1791년에 지은 정자의 공식 명칭은 ‘노량행궁’이다. 왕이 점심을 들었다고 하여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했다. 정면 6칸, 측면 2칸, 50평 규모의 건물 한 채가 남았다.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양원의 별장으로 쓰였으며, 주교사를 폐한 고종이 <서유견문기>를 쓴 유길준에게 하사했다. 일본 강점기에 이케다라는 일본인이 일대 5300여 평에 온천욕장, 운동장, 음식점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이름도 용봉정이라고 멋대로 고쳐 붙였다. 광복 후 환수해 오락시설은 철거했다.

왕이 머물면서 점심을 먹던 용양봉저정은 노량행궁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음식점으로 쓰였다.

주교사는 처음에 큰 배 80척과 작은 배 400~500척을 징발해 그 위에 긴 널판 1천여 장을 깔고, 양쪽에 난간을 설치했다. 난간에는 깃대를 꽂고 배다리 양쪽 끝과 중앙에 3개의 홍살문을 세웠다. 정조 재위 24년 중 총 66회의 행차가 있었고 현륭원 참배는 12회 있었다.

그중 1795년 을묘능행이 장엄했다. 회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잔치 행렬이었다. 을묘능행을 담은 정조능행도 8폭 병풍 중 ‘노량주교도섭도’ 상단에 용양봉저정이 나온다. 부속 건물을 갖춘 당당한 행궁이었다. 마을 곳곳에 버들나무가 늘어선 노들나루의 멋들어진 풍광과 꽃이 만발한 동산, 구경 나온 군중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1795년 을묘능행 행차를 담은 노량주교도섭도. 상단에 용양봉저정과 나루터 풍경이 그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95년 음력 2월9일 첫날 새벽 6시45분, 1779명의 일행을 거느리고 창덕궁을 떠난 정조가 노량진에 가설된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11시30분 출발, 장승배기를 거쳐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적혀 있다. 둘째 날 화성행궁 도착, 넷째 날 현륭원 참배…. 마지막 여덟째 날인 음력 2월16일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고 배다리를 건너 환궁했다는 7박8일 행차 일정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배다리를 만드느라 징발된 배들은 한강을 오르내리면서 조세곡을 실어 나르거나 장사를 하는 배들이었으므로 행차가 있을 때마다 폐단이 컸다. 정조는 배다리를 짧은 기간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건설하는 방법을 연구해 친히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지었다. 주교사에서는 ‘주교사절목’(舟橋司節目)을 제정했다. 배다리는 왕의 강남 행사 때 비용을 줄이면서 안정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다산 정약용이 작성한 ‘자찬묘지명’ 등에 다산이 배다리를 설계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공식 문서에 다산의 이름은 보이지 않아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고많은 나루 중에 하필이면 왜 노들나루였을까. 한강은 강폭이 넓어서 배를 타고 건너기도 쉽지 않았다. 돌다리를 만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노량진은 강 양쪽에 높은 언덕이 있어서 영구적 선창을 만들기에 적당했다. 강의 유속이 평온하고 수심이 깊어 배다리를 설치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80척 중 36척은 배다리 몸체를 만들었고, 나머지는 좌우에서 다리를 고정하거나 호위 군사가 탔다. 배다리의 정중앙에 오는 배의 높이가 가장 높고 양쪽으로 갈수록 낮아져서 멀리서 보면 홍예(무지개 모양)가 되도록 했다. 정조는 배가 몇 척이나 필요한지 알기 위해 노들나루 양쪽의 거리를 정확하게 쟀는데, 요즘 길이로 약 336m 정도였다. 따라서 한강을 직선으로 잇는 데 필요한 배는 모두 36척을 사용했다. 나머지 작은 배들을 배다리의 왼쪽과 오른쪽에 나누어 세워서 배다리를 끈으로 잡아매거나 호위토록 했다. 연산군 때 배다리 건설에 800척의 배가 들어간 것에 비하면 매우 경제적이었다. 배다리 건설에 사용되는 재료는 보관했다가 재활용했다.

용양봉저정과 주교사 터에서 보면 옛 노량나루(노량진)가 한눈에 들어온다.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죽었다 깨도 못 볼 장관이다. 노량나루를 대체한 한강대교는 한강철교와 동작대교 사이, 노들섬 위에 얹혀 있다. 다리 건너편에는 이촌동이 용산의 고층 숲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강북에서 다리를 건너 한강대교 남단교차로를 지나면 만나는 노들로 위에 걸린 노량북고가차도가 잠시 시야를 가리지만 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인도교, 1917년에 세워진 제1한강교의 위용마저 가리진 못한다. 다리를 건너오면 노들나루공원과 사육신공원의 푸른 숲이 맞는다. 100여 년 전 서울-노량진-인천을 잇는 최초의 한강다리가 배다리 자리에 놓인 까닭을 다시 생각한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