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오늘날 종로구청 격…한성판윤은 어전회의도 참석
종로구 한성부 북부관아 터
등록 : 2018-08-23 14:33
한성부의 5개 부 중 하나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드나들던
건춘문 길 건너편에 위치
한성부, 이조와 호조 사이 위치
한성부, 6조 중앙부처와 동등한 존재
부의 책임자는 현감보다 높은 종5품
관아를 움직인 것은 말단 아전들
<조선왕조실록> 아전 언급 1004건
신분은 미미했지만 세력은 존엄
서울 종로구 사간동 70번지 한성부 북부관아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나 안국역 1번 출구에서 경복궁사거리 쪽으로 걸어가다가 동십자각을 바라보고 삼청동길을 따라 올라가면 갤러리 현대~법륜사~금호미술관을 지나서 주한폴란드대사관 앞 화단에 있다. 안국역에서 출발하는 편이 걷기엔 좀더 가깝다. 푯돌 앞에 서면 길 건너편에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이 비스듬히 보인다.
화단에 파묻혀 시선을 끌지 못하는 푯돌에는 ‘한성부 북부 관아터(漢城府 北部 官衙址) 조선 시대 5백여 년간 서울 북쪽 지역의 주민행정을 담당하던 관아 터’라고 새겨져 있다. 이 길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행인, 관광객 중 이 푯돌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서울에 남아 있는 수많은 표석 중 하나이거나, 궁궐 주변에 자리한 숱한 기관 중 하나를 알리는 표식이라고 여길 것이다.
오늘의 서울을 있게 한 경복궁 뒤 백악산(북악산)의 이름을 모르는 서울 시민이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으로 범위를 넓히면 이 산의 이름을 아는 국민을 수소문하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한성부’라는 도시명도 낯설지만 ‘북부관아’라는 관청명은 더 어렵다. 제목은 옛 기관명 그대로 ‘한성부 북부관아 터’라고 적더라도 설명은 ‘한성부 소속 집행 관청’이라고 풀어주는 게 이해의 폭을 넓힌다. 또 조선 시대 한성(한양)보다 10배 이상 확장된 서울의 영역을, 헤아리기 어려운 ‘서울 북쪽 지역’이라는 표현 대신 ‘오늘의 종로구 일대’라는 식으로 친절하게 알려줄 순 없을까?
한성부 북부관아를 하고많은 관청 중 한 곳이라고 넘기기엔 찜찜하다. 경복궁의 남문(정문) 광화문이 왕이 드나들던 문이라면, 경복궁 동문 건춘문은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출입하던 문이다. 효자동 쪽 경복궁 서문 영추문은 내시, 궁녀, 별감 같은 하급 잡직의 출입구였다. 경복궁을 둘러싸고 흐르는 백운동천과 삼청동천 두 개의 물길이 해자의 역할을 했다. 건춘문은 수양대군이 황보인 등 정승들을 건춘문으로 불러 호위무사를 무장해제한 뒤 처단한 문이다. 벼슬아치들은 삼청동천이 흐르던 동십자각 옆에 놓인 십자교를 건너 건춘문으로 들어갔다.
사간동이라는 동명이 말해주듯 북부관아 옆 62번지에 사간원이 있었다. 사헌부와 함께 대간(臺諫) 혹은 양사(兩司)라고 불리며 왕의 전횡을 견제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사간원 옆, 건춘문 코앞에 북부관아가 자리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한성이 오늘의 서울특별시라면, 한성부는 서울특별시청이다. 북부관아는 오늘의 종로구청 격이다. 인구 1천만 명 시대 서울은 25개 구청이 꾸려가지만, 인구 10만~30만 명이던 조선 시대 한성에는 5개의 구청이 있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한성은 5개의 부로 이뤄졌는데 지금의 종로는 북부였다. 북악산 아랫마을이라고 하여 ‘북촌’이라고도 했다. ‘남부’ 혹은 ‘남촌’은 남산 아랫마을이고, ‘동부’ 또는 ‘동촌’은 낙산 아랫마을, ‘서부’ 혹은 ‘서촌’은 서소문 안쪽, ‘중촌’은 개천(청계천) 주변이다.
요즘 인왕산 아랫마을을 ‘서촌’이라고 이르는 것은 조선 고유의 행정 체계를 알 리 없는 어느 외국인 학자가 경복궁 북쪽 마을이 북촌이니까, 서쪽 마을은 서촌이라고 즉흥적으로 붙인 걸 우리가 수용한 결과다. 북촌에는 문반 중 북인과 노론이, 남촌에는 무반과 남인이 섞여 살았으며 동촌과 서촌에는 동인 소북과 서인 소론이 각각 거주했다. 중부 혹은 중촌에는 의관(의사), 역관(통역관), 율관(법률가), 산관(예비 관리), 화원(화가) 같은 중인과 시전 상인, 아전과 서리(관아의 말단 행정 실무자), 대전별감(궁전에서 임금의 심부름을 하던 관리), 무감(무예별감·임금의 호위관), 내시, 군인들이 살았다. 이들 중 일부가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인왕산 아래 웃대에 진출했다. 오늘의 서울 중구청은 옛 중부와 남부를 합친 영역이다.
한성부는 광화문광장 KT본사 빌딩 근처 이조와 호조 사이에 있었다. 북부관아는 삼청동길, 중부관아는 종묘 앞 세운상가, 동부관아는 혜화경찰서 옆, 서부관아는 청계천 모전교 앞, 남부관아는 을지로입구역 7번과 8번 출구 사이에 각각 있다. 5개 관아의 위치를 보면 사대문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선 시대 한양의 얼개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시대 한성부는 지방관청이 아니라 육조(이·호·예·병·형·공조)와 동등한 장관급(정2품) 중앙관청이었다. 한성부의 수장인 한성판윤이 어전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지금도 서울시장이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수도의 인구와 가구를 조사하고, 시장과 토지, 도로, 다리, 하천을 관리했다. 도성 치안용 경찰권이 부여됐고, 소송에 대한 사법권을 가진 점이 특이하다.
한성부 관아의 규모는 총172간이었고, 인원도 130여 명에 이르는 등 다른 관청보다 방대했다. 흥미로운 점은 양주, 고양 등 경기감영 관할지도 한성부에 속했다는 점이다. 한성부 소속 52개 방(坊, 오늘날의 동(洞)과 비슷함) 중 성안 마을은 46개 방이고, 나머지 6개 방은 성저십리(성밖 십리)라 하여 오늘의 서대문, 동대문, 용산, 성동, 성북, 은평구 지역이다. 심지어 서대문 밖 경기감영도 한성부의 행정권역에 속했다. 1개 방은 7~8개의 계(契)로 세분했는데, 영조 때 기록에 보면 한양 46개 방 아래 모두 328개의 계가 있었다.
5개의 관아는 어떻게 운영됐을까. <경국대전>에 따르면 5부의 책임자는 군현 사또인 현감(종6품)보다 높은 종5품 관령(管領) 또는 영(令)이 맡았고 종9품인 도사(都事) 1명이 보좌했다. 그 아래 서원(書員) 4명, 사령(使令) 8명, 대청직 1명, 군사 2명이 아전이다. 부 아래 단계인 방에는 잡직으로 9품인 대장(隊長)이나 대부(隊副)를 뒀는데 오늘로 치면 동장 격이다. 조선의 행정 시스템이 그물처럼 촘촘함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아전(衙前)이다. 아전이란 말 그대로 ‘관아 앞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무급 말단 행정직이자 세습직 중인 아전이 관아를 움직였다. ‘조선은 아전의 나라이며, 아전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한성부처럼 중앙 관아에 속한 아전을 경(京)아전이라고 했다. 아전 세계에서도 육조와 마찬가지로 동반(문반)과 서반(무반)으로 나누고, 이·호·예·병·형·공으로 나눴다. 동반 경아전은 주사, 녹사, 서리(이서·이속·이배)라는 호칭으로, 서반 경아전은 제원, 조예, 나장이라고 불렸다. 지방이나 기술직 잡역으로 가면 호장, 구사, 소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양반 사대부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해결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신부 클로드 샤를 다예는 <조선교회사서론>에서 “…각 고을 아전 6~7명은 국왕 아래 판서들이 가지는 관명과 비슷한 직함을 가지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똑같은 성격의 직능을 담당한다. …이들을 하인으로 취급하는 수령보다도 더 많은 권한을 가지기도 한다. …그들이 가진 근본적인 좌우명은 고을 사또를 속이고 지방 사무의 운영을 될 수 있는 한 불가능하게 하여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박종성은 <아전과 내시>에서 “<조선왕조실록>에 아전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1004건이 등장하는데 이는 27명의 조선 왕 1인당 평균 37건에 이른다”면서 왕조 내내 지속된 아전 문제의 심각성을 분석했다.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에는 각급 서리의 정원을 1400명 정도로 규정하고 있는데,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신라 때 지방 호족, 고려 때 지방의 세력가였다가 조선 들어 중인 신분으로 급전직하한 아전들의 신분은 하찮았지만 세력은 존엄했다. 특히 서울 중앙관서를 장악한 경아전들은 18세기 이후 인왕산 아래 시문학동인 모임 송석원시사를 결성해 사대부 못지않은 뒷골목 문화를 꽃피웠다. 한성부 북부관아를 허투루 여기면 큰코다친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신분은 미미했지만 세력은 존엄
한성부 북부관아 터 푯돌이 있는 삼청동길 주한 폴란드 대사관 건너편 건춘문 앞을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지나가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광화문 옛 육조거리의 이조와 호조 사이에 있었던 한성부 관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기념사진. 노주석 제공
한성부가 옛 경기감영(현 서울적십자병원) 자리로 이전한 고종 때 사진. 솟을대문에 한성부라고 적힌 편액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