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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면데면하던 아들, 아버지 자서전 쓰다

진로 놓고 아버지와 갈등 빚은 신재환씨, 아버지 신영식씨 자서전 쓰면서 가까워져

등록 : 2018-08-30 15:46
지난 8월21일 동대문구 제기동 약령시장 안쪽 서울한방진흥센터 앞길에서 신재환(31·왼쪽)씨가 아버지 신영식(60)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간다. 재환씨가 최근 아버지 자서전 쓰기에 나서면서 서먹했던 두 사람의 사이가 한결 가까워졌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재환아! 이 더벅머리 스타일이 지금 네 머리 모양과 묘하게 비슷하지 않아? 어째 점점 닮아가는 것 같네. (웃음)” “그때 그런 머리 모양이 유행했나봐요. 나도 30년 뒤 아빠처럼 변하는 건가요? (웃음)”

지난 8월21일 오후 신재환(31)씨는 동대문구 경동시장 부모의 채소가게에서 가족 사진첩을 보았다. 재환씨는 아버지 신영식(60)씨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책자(손바닥 자서전)를 준비 중이다. 자서전에 넣을 사진을 고르느라 사진첩 한장 한장을 넘기면서 부자간에 이야기꽃이 핀다.

온라인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재환씨는 지난 6월 업무를 하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진행하는 ‘부모님 자서전 쓰기’ 캠페인을 알게 됐다. ‘천개의 스토리, 천권의 자서전.’ 50플러스(50~64살) 세대가 기록하는 부모 이야기, 자녀가 쓰는 50플러스 세대 이야기 등 세대별로 풀어내는 부모의 인생 이야기를 받아 선착순 1천 명에게 작은 책자를 만들어준다. ‘세대 간의 마음을 잇다’를 모토로 한 이 캠페인은 6월에 시작해 다음달 7일까지 이어진다.

재환씨가 아버지 자서전 쓰기에 나선 것은 더 늦기 전에 아버지와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외동아들이다. 커가는 과정 중 몇 차례 아버지와 불화를 겪었다. 청소년기에는 게임에 빠져 아버지를 속상하게 했다. ㅊ교대에 들어가 임용고시를 앞두고 진로를 갑자기 바꾸겠다고 해 온 집안이 뒤집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표정이나 말투에서는 교사의 길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제 선택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 답답했어요. 때론 세상의 시선처럼 저를 ‘루저’로 생각한다는 느낌마저 들었어요.” 재환씨는 아버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에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버지와 한동안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20대엔 아버지와의 불편함을 풀려고 애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독립을 했고, 1년 동안은 집에 가지도 않았다. 30대가 되었다. 온라인 마케터로 진로 방향을 잡았다. 아버지와 같이하는 시간을 좀더 갖고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얘기하면 여전히 부딪히고 마음이 상했다. 부모 자서전 쓰기 캠페인을 보고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옛이야기를 나누면 조금은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머니의 육아일기가 자신에게 특별한 것처럼, 이번에 자신이 쓰는 아버지 이야기가 훗날 그런 의미로 남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엔 아버지에게 자서전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아버지 이야기를 기록하려 한다고 했다. 한 달에 두세 번 집에서 함께 밥을 먹거나 산을 오르며 옛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의 모습이 조금씩 가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 자서전 쓰면서 큰 선물 받은 느낌”


몰랐던 집안 사정 알게 되면서

자식 사랑하는 부모 마음 이해


재환씨의 아버지는 ‘처음엔 우리 세대 사람들 살았던 것 비슷하지, 뭐 특별한 게 있겠어’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8남매가 된장국 한 그릇으로 끼니를 이어갔던 것, 고등학교 때 교복 소매가 달랑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던 것 등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차츰 변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으로 힘들었던 얘기도 처음으로 했고,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성공과 실패의 경험도 전해줬다.

“안간힘을 다하며 살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정말 대단해 보였어요. 고생했던 이야기에는 울컥하기도 했어요.” 신씨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애틋한 마음도 생겼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재미있게 살아라”는 말씀을 한 것도 전해주셨다. 부모님이 한동안 주말농장을 하며 채소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졌다는 것도 알았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집안의 재산 상태도 알게 되었다.

그간 그는 아버지의 인생관이 자신과 너무 다르다고 생각해 늘 답답했다. 자신은 ‘인생은 파도 타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안정적인 것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데 견줘, 아버지는 그가 안정된 길을 가길 기대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부모님은 늘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길을 만들어줬던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조금 편한 길을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겁니다. 제가 스스로 마음의 벽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부모의 사랑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잘 키우려 아이를 하나만 낳았고, 외동아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주기 위해 늘 고민하셨던 것도 알게 됐다. 될 수 있으면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게 하려 했는데, 게임에 너무 빠져 속상한 마음에 손찌검한 것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는 가슴 아파했다. “그땐 때린 아버지가 싫어 엄청 반항했죠. 지금은 아버지가 하실 역할을 한 거라 이해가 돼요. 부모 속을 꽤 썩였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에게 아버지 자서전 쓰기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 아버지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준 부모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됐다.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시작한 일인데, 거꾸로 저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큰 선물을 받았어요.”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