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구중궁궐은 1923년 사라졌다…서십자각 철거와 함께
종로구 서십자각 터
등록 : 2018-09-06 15:10 수정 : 2018-09-07 14:28
경복궁 서쪽에 있던 망루가 서십자각
‘궁’은 임금 거처, ‘궐’은 궁 출입문의 망루
1923년 전차 부설 공사하면서 철거돼
서십자각의 부재는 곧 궐의 부재
일제는 서십자각 철거 앞서
경복궁서 엑스포 열어 해체 시작
서십자각 복원은 경복궁 회복의 핵심
국립고궁박물관 일부 이전 등 맞물려
복원은 지난한 작업
서울 종로구 효자로 12 서십자각 터(西十字閣 址)를 찾아 길을 떠난다. 서십자각 터 푯돌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효자로 건널목에 서면 보인다. 길을 건너 국립고궁박물관 뮤지엄숍으로 들어가는 쪽문 옆 길가에 서 있다. 푯돌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청와대 길이고, 푯돌 정면에는 정부서울청사가 위용을 뽐내고 있다. 마주 보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광화문과 동십자각이 겹쳐 보이는 바로 그 지점이다.
푯돌에는 “서십자각은 경복궁 서쪽에 있던 망루이다. 원래 궁궐의 ‘궁’은 임금의 거처를 말하고, ‘궐’은 출입문 좌우에 설치된 망루를 뜻한다. 1923년 전차 부설 공사를 하면서 철거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 푯돌은 2001년 처음 설치했다가 2016년에 고쳤다. 2001년 푯돌에는 “…설치된 망루를 뜻한다. 이에 따라 경복궁 궁궐 담장의 양 끝에 궁 내외를 감시할 수 있도록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설치했는데 지금은 동십자각만이 궁궐 담장과 분리된 채 남아 있다”라는 다소 긴 설명이 적혀 있었다. 2016년 새 푯돌로 바꾸면서 “…1923년 전차 부설 공사를 하면서 철거되었다”라는 문구가 새로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옛 푯돌은 동십자각에 관한 설명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어서 바꾼 듯하다. 유형은 벽돌 기둥형이다. 검은색 벽돌을 층층이 쌓아올린 벽돌 기둥형 푯돌이 판석형보다 무게감이 있고, 눈에 잘 띄어서 존재감이 두드러져 보인다. 높이가 낮은 판석형은 눈에 잘 띄지 않을뿐더러 문안을 읽기도 어렵다. 앞으로 교체하는 푯돌은 벽돌 기둥형을 위주로 설치했으면 한다.
철거된 옛 푯돌은 경복궁이나 동십자각과의 관련성을 설명하다보니 철거 과정이 빠졌고, 새 푯돌은 철거 이유를 적느라 경복궁이나 동십자각과의 관련성을 빠뜨린 것이 흠이다. 두 개의 푯돌 내용을 종합해보면 서십자각은 삼청동 초입에 외딴섬처럼 놓여 있는 동십자각과 한 쌍을 이룬 경복궁의 서쪽 망루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두 개의 망루는 궁장(궁궐의 성벽)으로 서로 연결돼 있었다. 높이 15m에 이르는 동서쪽 십자각루가 광화문과 이어져 경복궁을 에워싼 광경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남아 있는 사진으로도 위엄이 느껴진다.
궁궐(宮闕)에서 궁(宮)과 궐(闕)을 분리하는 게 무슨 의미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그렇지 않다. 궐과 궁은 다르다. 전각이 가득 찬 경복궁이 ‘왕의 집’ 궁이라면, 동십자각과 서십자각 2채의 각루(閣樓)를 갖춘 궐은 ‘나라의 집’이다. 동십자각을 동궐대, 서십자각을 서궐대라고 했고, 합쳐서 궐대라고 호칭했다. 궐대는 망루에서 궁을 수호하는 군사 초소의 기능과 함께 사헌부 관리들이 상주, 궁궐을 드나드는 관원을 감찰하는 감시대의 역할도 했다.
서십자각의 부재는 궐의 부재를 의미한다. 서울은 궁궐의 도시이다. 5개의 궁이 사대문 안을 채우고 있는 도시에서 궐의 부재는 아프다. 1395년 경복궁을 창건하고, 3년 뒤 정문인 광화문과 동·서십자각을 함께 세워 대궐이 완성됐다. 조선에서 궁궐 혹은 대궐은 경복궁밖에 없었다. 나머지 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은 궁일 뿐 궐은 아니라는 얘기다.
역사소설이나 사극에 등장하는 구중궁궐은 1923년 서십자각의 철거와 함께 역사소설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경복궁은 엑스포 전시장이었다. 경복궁 해체는 수순에 따라 진행됐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면서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홍례문을 헐어낸 뒤 전시관을 짓고, 잔디를 깔았다. 50여 일 동안 열린 전시회에 무려 117만 6천여 명이 동원됐다.
조선부업품공진회, 조선가금공진회, 조선박람회, 조선산업박람회까지 각종 명목으로 모두 6차례의 엑스포가 경복궁을 휩쓸었다. 방해되는 경복궁 전각과 문, 누정이 철거된 뒤 경매를 통해 요정과 별장으로 팔려나갔다. 500개 동이 넘던 경복궁 전각의 90% 이상이 사라졌다. 1927년 조선총독부가 완공되자 총독부를 가린다며 광화문을 지금의 건춘문 자리로 쫓아냈다.
서십자각 철거의 직접적 원인이 된 전차 선로 부설은 ‘궐 파괴 공작’의 다른 이름이었다. 경복궁 안은 엑스포장을 꾸민다면서 뭉개고, 경복궁 밖은 전차 선로를 놓는다면서 뭉갰다. 근대의 유물 전차는 왕조의 유물을 지우는 비상 장치로 쓰였다. 이때 광화문의 월대, 궁궐 담장, 서십자각, 영추문, 해태상이 희생당했다. 뜯겨나가거나 붕괴되거나 옮겨지거나 사라졌다. 사대문 중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은 전찻길로 좁다면서 성곽을 헐어냈고, 돈의문(서대문)은 아예 없앴다.
광화문을 경유하는 경복궁 주변 전차 노선은 1917년 황토현(광화문사거리)~광화문 간 노선이 개통된 뒤 1929년 총독부 앞~안국동 노선이 놓일 때까지 모두 6개 선로가 경복궁을 포위한 채 촘촘하게 깔렸다. 엑스포장으로 관람객을 실어나르는 교통수단이었다. 1923년 10월3일 개통한 영추문 노선은 조선부업품공진회용 노선이었다. 서십자각과 연결된 궁장이 헐려나갔고, 곡선 구간에 해당하는 서십자각이 철거됐다. 3년 뒤 육중한 전차의 왕래를 이겨내지 못하고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이 무너졌다. 1929년 조선박람회를 계기로 안국동 노선이 개설됐는데 경복궁의 동문 건춘문의 궁장은 뜯겼지만 동십자각은 살아남았다. 다행히 노선이 안국동 쪽으로 직선화됐기 때문이다.
경복궁 서남쪽 모퉁이에 서 있던 서십자각의 위치는 현재 효자로 2차선에 걸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십자각 관련 자료는 몇 건 없어서 동십자각과 비교로 추측할 수 있다. 흔히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생각하지만, 1920년대 전후의 사진이나 고증 조사 결과 몇 가지 차이점이 뚜렷했다.
동십자각의 육축(장대석)은 7단이지만 서십자각은 지대가 낮았는지 1단 더 높게 쌓았다. 나머지 지대석(바닥돌)과 석누조(배수구 물받이) 등은 동일한 모습으로 판단됐다. 담과 목조도 동일했다. 다만 지붕의 경우 동십자각은 사모지붕에 겹처마를 갖추고 잡상과 용두도 있고 추녀마루에 잡상 7개(현재 5개)가 있는 반면, 서십자각에는 잡상이 없는 점이 달랐다. 꼭대기 절병통의 형태도 동십자각은 원통이지만 서십자각은 창살 모양을 하고 있다. 잡상은 본래 없었는지 아니면 훼손됐는지 확실하지 않다. 창건과 중건 당시 서십자각의 모습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절병통의 형태는 완전히 달라서 두 건물이 똑같은 형태였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서십자각은 복원될 수 있을까. 얼마 전 새로운 광화문광장 확대 조성사업이 막을 올리면서 광화문 앞 월대와 해태상, 그리고 서십자각, 경복궁 궁성 복원이 화두로 떠올랐다. 서십자각 복원은 경복궁 궁성 전면부 회복의 핵심이기도 하다. 경복궁 전체 궁성 2469m에서 서십자각~광화문~동십자각 구간 412m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서십자각을 세우려면 4차선 효자로가 2차선으로 축소되는 등 큰 교통 불편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광화문 앞 율곡로와 사직로에 이어 효자로까지 줄어드는 것이다. 서십자각 터를 차지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일부 시설 이전도 불가피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청와대 이전과도 맞물려 있다. 한번 틀어진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 새삼 느낀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복원은 지난한 작업
서십자각 복원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경복궁 서쪽 모퉁이 효자로 초입에 서 있던 서십자각은 삼청동 초입 동십자각과 함께 국내 유일의 대궐을 구성하는 서궐대였다. 사진은 정부서울청사 쪽에서 서십자각이 서 있던 국립고궁박물관 쪽을 비스듬히 바라본 장면이다.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을 중심으로 정문인 광화문과 왼쪽 서십자각, 오른쪽 동십자각이 일렬로 도열하듯 늘어선 1920년대 사진.
1920년대 서십자각. 1923년 전차 노선 부설을 이유로 뜯겨나가기 직전 사람과 인력거가 왕래하는 모습이 담겼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