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노마드를 꿈꾼다면, 밥은 잠시 잊어도 좋습니다

밥과 따뜻한 음식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등록 : 2018-09-06 15:19
결혼식장서 오랫만에 만난 지인

밥 먹자는 공수표 또 남발

유목민의 삶은 따뜻한 밥과 거리

하루에 강연 세 번 뛰면서

차가운 샌드위치와 커피로 만족

“요즘 너무 바쁘신 것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시간 좀 주세요. 언제 식사 한번 하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지난 주말 결혼식장에 갔다가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환한 표정으로 악수와 함께 그런 인사말을 남기고 다음 장소로 떠났다. 이 바쁜 세상에 시간을 내주고 더군다나 식사 초대까지 하겠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참으로 정 많고 세심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그와 헤어진 뒤 곰곰이 생각해보았더니 그로부터 벌써 세 번이나 똑같은 제안을 듣게 되었으니 말이다.

거의 공식에 가까웠다. 웃음과 큰 동작의 포옹, 그리고 시원시원한 제안, 5년 전도 그러하였고, 2년 전에 만났을 때도 그러하였다. 마치 찍어낸 인쇄물처럼 이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곧 연락드리겠다’는 말은 한 달이 지나, 아니 1년이 지나도 실행되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5년 전에 그러하였고, 2년 전에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공연히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직장을 그만둔 내가 지금 밥을 못 먹는 지경으로 그의 눈에 비친 것인가? 왜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밥을 사겠다고 하고, 또 몇 년이 지나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하는 걸까?’

그렇다고 그가 무슨 특별히 악의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단지 달콤한 말을 습관처럼 달고 다니는 허언(빈말)에 익숙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자신조차 기억 못할 정도로 약속을 남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마치 풍각쟁이 같다. 이보다 가볍긴 하지만 종종 이런 말들도 나눈다.

“언제 한번 식사하시죠?”

하지만 구체적인 시간이 들어가지 않은 이런 제안은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안다. 지키지 않을 식사 제안은 외국인에게도 유쾌하지 않은 경험인 듯싶다. 내가 잠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 한 중국인 유학생이 털어놓은 사연도 그중 하나다.

“처음에 서울에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동료 학생들이 너무 친절한 거예요. 낯선 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고, 언제 함께 밥 먹자고 해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가도 정말로 같이 밥 먹자고 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어요.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따뜻한 것 같았는데, 다가가려고 하니까 거리를 두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왜 습관처럼 밥 먹자는 제안을 남발하는 걸까? 여기서 말하는 ‘식사’ 혹은 ‘밥’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위장을 채우기 위한 의미만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 함께한다는 공동체 의식도 내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밥 먹고 합시다!”라는 말 속에 푸근함과 정겨움이 함께 묻어 있다. ‘언제 함께 밥 먹자’는 말은 따라서 심각한 뜻이 아닌, 영어의 ‘하우 아 유?'(How are You?)처럼 그냥 가벼운 인사말일 때도 많은 것이다.

밥과 따뜻한 음식이 우리의 문화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크다. 밥은 원초적 욕망을 넘어선 행복감의 원천이다. 따뜻한 밥은 가족이나 소중한 공동체를 의미한다. 우리 민족을 가리켜 북방 문화와 기마민족의 후예라 주장하는 분들이 적지 않지만, 이렇듯 우리 생활과 의식 깊숙이 뿌리내린 유전자는 농경문화다.

반면에 기마민족이나 유목민의 특성은 간편식이다. 늘 동물과 함께 움직여야 하고, 야외에서 생활하는 그들에게 일일이 끓이고, 볶고, 지지고 할 여유가 없다. 특별히 잔치나, 저녁 시간이 아니라면 간단히 먹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따뜻함이 아니라 차가운 음식에 적응되어 있다. 간편식이란 요즘 말로 하면 패스트푸드다. 요즘 많은 한국의 도시인들이 ‘노마드’(유목민)의 생활을 꿈꾼다. 말과 양을 끌고 다니며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의 삶은 하나의 로망처럼 비친다. 글을 쓰고 강연하는 내 모습을 보며 가끔 이런 말을 하는 분을 본다.

“참 부럽습니다. 원하는 시간에 스스로 계획에 맞춰 일하시니 자유로운 영혼 아닌가요? 그렇더라도 식사는 꼭 잘 챙겨 드시기 바랍니다. 반찬도 골고루 섭취하시고, 밥의 힘으로 더 멀리 달려가셔야죠!”

고마운 관심이고 힘이 되는 응원이다. 하지만 자유직업을 원하고 노마드적인 인생을 꿈꾼다면 한 가지는 잠시 잊는 게 좋다. 밥과 따뜻한 음식에 대한 집착이다. 점심 한 끼를 거르거나 늦어지기라도 하면 야단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바쁜데 샌드위치나 햄버거로 대용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면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깟 맛없는 빵 쪼가리 먹고는 일 못합니다. 구수한 된장찌개 한 그릇 정도는 먹어줘야지 힘이 나죠. 다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식사는 취향이다. 미각은 사람마다 달라서 뭐라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점심시간까지 한 상 가득 반찬이 놓이고 찌개가 끓는 식단을 고집한다면 도시의 유목민으로 생존하기 힘들다. 점심때 고기 구워 먹으며 회식하는 문화가 있는 나라, 한국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어제 나는 강연장 세 곳을 뛰어다녀야 했다. 장소도 강남과 강북, 그리고 일산이어 제시간을 맞추려면 식당에서 느긋하게 식사할 짬이 없었다. 모든 일정이 끝난 뒤 늦은 밤 차 안에서 차가운 샌드위치와 커피 한잔으로 허기와 갈증을 달랬다. 그게 도시적인 유목민의 현실이다. 화장을 걷어낸 맨얼굴이다. 만약 이런 생활이 싫다면 디지털 노마드는 포기하는 게 좋다. 밥인가, 자유인가? 이제 선택할 시기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