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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대신 카메라 든 노숙인들

서울시 노숙인 사진 교육과정 ‘희망아카데미’ 동행기, 50대 노숙인 여성 “수업 전날, 잠 설쳐…사진은 운명”

등록 : 2018-09-06 16:01 수정 : 2018-09-06 17:55

“새벽 4시에 일어났어요. 오늘 수업 올 생각에 설레고 잠이 안 와서….”

8월2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가회동 백인제 가옥에서 만난 ㅈ씨(54)는 발이 바빴다. 대문간채를 지나 안채로, 다시 사랑채에서 중문간채로 내달았다. 주변에선 그를 “에이스”라 했다. “대단한 아줌마” “무서운 여자”라고도 했다. “(자신의) 별명을 아세요?” 물으니 ㅈ씨가 수줍게 웃었다.

“학기에서 1등 하면 카메라를 상으로 준대요. 난 카메라가 갖고 싶어서….”

서울 노숙인들의 ‘백인제 가옥’ 여행

‘홈리스 대학’으로 알려진 ‘조세현의 희망아카데미’가 올해 세 번째 기수를 맞이했다. 정원은 35명이었지만 40명이 넘는 지원자가 찾아왔다. 지난 6월25일 첫 수업을 시작한 뒤로 11월까지, 매주 목요일 열리는 총 20회의 야간 수업. 5개월 동안의 긴 학기가 시작됐다.

희망아카데미는 사단법인 ‘조세현의 희망프레임’(이사장 조세현)의 중급 사진반이다. 조세현의 희망프레임은 서울시와 함께하는 사진 교육과정으로 2012년 노숙인 자활프로그램으로 시작해 지난 상반기까지 19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백인제 가옥 정원은 햇볕에 한껏 달아올라 후끈거렸다. 서울은 111년 만의 기록적인 폭염으로 경보음이 울리기 직전이었다. 조세현 작가가 그늘로 사람들을 모았다.

“다들 수업에서 배운 것 기억하시죠? 수평과 수직! 지붕과 기둥이 바르게. 너무 큰 걸 담기보다 작은 것, 미세한 것들을 잘 보세요. 점, 선, 면, 문고리, 고무신. 아름다움이 많지요. 더우면 참지 말고, 에어컨 있는 방으로… 알겠지요?” 생수병 두세 개씩 가방에 챙긴 노숙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이스’ ㅈ씨가 수업 노트를 펼쳐 보여줬다. 근로기준법, 아동 학대, 노인 학대, 성폭력, 성희롱 등 법과 범죄 정의를 또박또박 적었다. “초상권이 있으니 사람 얼굴 함부로 찍지 않아요. 그런 것도 다 배워요. 사진은 언어래요. 잠이 안 와요. 자는 사이 아름다운 걸 놓칠까봐요.”

조 작가가 설명했다. “물론 모든 학생이 극적인 결과를 얻진 못하죠. 학기 도중에 말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지난 3년 동안 어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이 밝고 순수하고 열정이 굉장해요. 세상에서 소외되고 자신감 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자기표현을 배우고, 참 열심히 합니다. 사진예술을 대하는 마음에 차이가 없어요.”

조 작가는 이전 기수 수료생 가운데 전문 사진가로 성장해 첫 사진집을 낸 이도 있고, 묵묵히 신입생들을 돕는 이도 있다고 했다.

“이 현장이 우리의 내일을 만들 거예요”

노숙인들의 ‘제2의 꿈’은 앞서 7월26일 용산구 한남동 스튜디오에서 열린 수업에서 이미 확인됐다. 수업은 오후 5시30분에 시작했지만, 맨 앞자리를 앉은 이들은 2시부터 왔다.


삶의 벼랑에서 만난 설렘, 그건 사진이었다


“우주를 떠도는 기분이었는데…”

수업 진행될수록 차림 말쑥해져

조세현 사진작가의 말을 경청하는 학생들.

“인생은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아니죠. 오히려 들쭉날쭉한 선의 조합에 가까워요. 어딘가 구부러진 곳, 이를 결점이라고 하는데….” 이날 수업을 담당한 오은 시인의 말에 “그게 도약의 기회일 수도 있죠”라고 한 노숙인이 고개를 숙인 채로 나직이 읊조렸다.

같은날 수업은 ‘거리에서 희망 찾기’ 현장과제로 이어졌다. 반 시간 동안 한남동 뜨거운 골목을 훑고 돌아온 학생들의 사진은 솔직했다. 볼이 붉은 조씨는 골목 속 낡은 세탁소를 카메라에 담았다. “누군가는 첫 출근을 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해요. 세탁소가 그들을 위해 옷을 깨끗이 다려줘요. 내일의 더 큰 소망을 위해 희망을 다림질하는 거예요. 내 인생도 그렇게 될까요?” 웃음 많은 전씨는 “허물어진 인생이지만, 미래에 맛집전문 사진사가 되고 싶다”며 식당 간판을 내보였다. 투박한 조씨는 영정사진이 찍는 것이 목표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분들이 주변에 많거든요. 그런 어르신들 마지막 모습을 내가 찍어드리고 싶은데….”

2년 6개월 만에 비로소 쉼터에서 나온다는 이씨가 말을 이었다. “주변에 쌍시옷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많잖아요! 말이 마술 같아요. 긍정적인 말을 쓰는 것도 ‘희망’같아요.” 옆에 선 이가 한마디 보탰다. “지금 여기가 우리의 현장이잖아요. 이 현장이 우리의 내일을 만들 거예요.”

8월28일 폭우 속 종로구 종묘. 기자가 수강생들의 수업 현장을 세 번째 찾은 날이다. 기자와 눈 마주치기를 꺼렸던 수강생들이 전과 달리 먼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한 달 사이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였다. 김씨(50)는 허리와 어깨를 곧게 폈다.

“자세가 변하셨네요.” 말을 건네자 “사진찍는 자세가 멋져야 사진도 잘 나와요”라며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옷이 반인 것 같다니까요. 허름하게 입으면 나도 허름하게 되는데, 귀한 카메라를 어깨에 메면 내가 멋있게 행동해요.” 희망아카데미 백송이 팀장은 당연한 변화라는 듯 웃으며 말한다. “수업 회차가 늘수록 수강생들이 말끔해져요.기수마다 있는 풍경이에요. 옷차림에 마음가짐이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노숙인들의 활동을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직원 심건(27)씨도 “처음과 비교해 많이 밝아지셨다”며 공감했다.

다시 만난 ‘에이스’ ㅈ씨는 더 격정적으로 빗속을 날아다녔다. “내가 사실 백내장 수술을 해서, 앞을 보거나 글씨 읽는 게 힘들어요. 그저 내 눈을 잠깐이라도 편하게 만드는 풍경이 있으면, 수직과 수평을 맞추고 셔터를 눌러요. 그러면 조세현 선생님이 ‘잘 찍었다’ 하시지요.”

ㅈ씨에게 사진은 ‘운명’ 같다고 했다. 삶의 벼랑에서 만난 설렘이었다. “난 내 어린 시절, 엄마 아빠랑 행복했던 시절의 풍경을 찾나봐요. 세상 물정 모르는 서울 여자애가 먼 타지로 시집가고, 너무 모질게 대우받다가 내쳐졌어요. 사람들이 손가락질했어요.돈도 없고, 세상에 설 자리가 없었어요. 난 항상 우주를 떠도는 기분이었어요….”

ㅈ씨는 지난해부터 한 행인의 권유로 쪽방상담소와 만나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진을 만나고 나서 꿈이 생겼다고 했다. “처음엔 많은 이들이 ‘네 주제를 알라’고 핀잔을 주었어요. 하지만 나도 다시 공부하고 싶어요. 누군가와 어울리는 일도, 사회로 나와 무언가 해보는 일도 난 지금이 처음이에요. 얼마 전엔 누가 쓰레기통에 책을 이만큼 버렸어요. 사진책이 되게 많더라고요. 끙끙거리며 이고서 돌아왔어요. 그걸 밤새 읽고 있어요. 가만히 있으면 슬퍼요. 사진 찍을 땐 그걸 뛰어넘는거예요. 마치 약을 먹은 것처럼. (웃음) 내 맘 아세요?”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