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70년대 금지곡 시대가 ‘빽판’ 양산 일조

‘빽판’의 시대, ‘빽판’의 추억 下

등록 : 2018-11-01 15:02
혼성 그룹 이럽션의 ‘원 웨이 티켓’

무도장 인기 타고 100만 장 판매 소문

조악한 재킷 탓에 원판 수요도 높아

75년 대마초 파동 뒤 가요곡까지 확대

팝송 원판 재킷과 배신감을 안겨준 해적판 재킷들.

유통 규모 비대해진 1970년대, ‘빽판’의 단속

1970년대 들어 음반 산업계에 피해를 줄 정도로 ‘빽판’의 유통 규모가 비대해지면서 음반협회가 매달 강력한 전수조사에 나섰다. 청계천의 도매상과 전국의 소매상들은 단속에 걸려 빽판들을 압수당하고 벌금을 맞는 과정에서 칼부림까지 벌여, 경찰서에 불러가 조사를 받거나 구속되는 사례가 빈번했다고 한다. 하지만 “돈을 가마니에 쓸어담을 정도로 빽판이 팔렸다”는 증언처럼 빽판 업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장사를 계속할 만큼 충분한 호황을 누렸다.

당시 팝 애호가들은 희귀하고 묵직한 음악성을 자랑했던 대도레코드사에서 제작한 빽판들을 선호했다. 70년대 무도장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출신의 혼성그룹 이럽션의 커버곡 ‘원 웨이 티켓’(ONE WAT TICKET)이 대박을 터뜨렸다. 전설적인 ‘스튜디오54’(미국 뉴욕의 나이트클럽)에서 제작한 이 노래의 빽판은 “100만 장이 팔려나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배신감을 안겨준 팝송 빽판 재킷

이태원의 태평극장 주변에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각종 미제 물품과 양담배, 원판을 판매했던 ‘태평아줌마’가 유명했다. 비싼 값을 주며 원판을 구하는 것은 음질의 차이도 중요했지만, 빽판과 원판의 커버가 너무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존 레넌과 그의 연인 오노 요코의 중요 부분을 신문으로 가리는 변형 디자인의 빽판과는 달리, 성기가 그대로 노출된 파격적인 누드 사진으로 장식된 원판은 충격이었다. 롤링 스톤스의 1971년작 <스티키 핑거스>(Sticky Fingers) 앨범의 원판은 흑백 청바지 사진에 지퍼가 진짜로 달려 있었다. 유라이어 힙의 1971년작 <룩 앳 유어셀프>(Look at yourslf)의 원판은 빽판과 라이선스 음반과 달리 타이틀처럼 자기 모습을 거울로 볼 수 있어, 소비자에게 배신감의 극치를 느끼게 했다.

금지 문화의 벽을 넘어섰던 빽판

빽판이 동시대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것은 저렴한 가격 말고도 문화적인 이유가 있었다. 군사정권 시절에 불온과 퇴폐로 낙인찍힌 금지곡은 라이선스 음반에서는 가차 없이 삭제되었다. 젊은 세대가 선호했던 포크와 록 그리고 메탈 음악은 금지의 철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금지된 노래를 듣고 싶은 젊은 세대는 금지곡이 수록된 빽판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찾아야 했다. 1975년 유신정권에 의해 시행된 가요 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 사건은 금지곡의 양산을 불러왔다. 이에 빽판은 해외 음악에서 가요로 영역이 확대된다.

금지 가요 빽판들

통제가 극심했던 1970년대에 공식 석상에서 강제로 퇴장당한 일부 대중가요 음반들이 빽판 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신중현의 노래가 담긴 김추자 음반과 김민기의 노래가 수록된 양희은 음반, 검열에 걸렸던 영화 OST(오에스티·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음반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발매된 송창식·김연자의 해적판들까지 등장했다. 양희은 3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며 ‘현실 부정적’이란 이유로 금지곡이 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제목이 ‘사전에 없는 단어’라는 이유로 금지된 ‘불나무’로 인해 해적판으로 재탄생했다.

영화 <별들의 고향> OST 음반은 영화 속 정사 장면을 쓴 재킷 사진이 ‘야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어 해적판이 은밀하게 나돌았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OST 음반은 장발 단속 장면에서 나왔던 송창식의 ‘왜 불러’와 자살 장면에서 절규하듯 흐르는 ‘고래사냥’이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꼬투리 잡혀 레코드 가게의 진열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주제가로 떠오른 노래들은 다양한 해적판으로 되살아났다.

영화<바보들의 행진> <별들의 고향> , 양희은·김추자·송창식·김연자·이장희 등 각종 70년대 가요 해적판 음반.

금지되어 라이선스 음반에선 삭제된 팝송

70~80년대에 발매된 라이선스 음반 중에서 과격한 노랫말이 쓰인 노래들은 금지곡으로 묶였다. 열 곡 중에 두세 곡이 지워진 라이선스 음반을 사느니 음질과 재킷을 포기하더라도 해적판을 사는 편이 나을 때도 있었다. 또한 7분짜리 대곡이 3분으로 축약돼 발매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금지되어 삭제된 채로 발매된 비틀스, 핑크 플로이드, 퀸, 메탈리카, 오지 오즈번의 라이선스 음반 덕분에 금지곡이 수록된 빽판은 더욱 인기리에 팔려나갔다.

1980~90년대의 빽판

증언에 따르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나온 빽판은 음반 하나당 800장에서 1500장 정도를 찍었다고 한다. 조악한 커버와 라벨 그리고 알판은 하루 200~300장 정도가 제작되었다. 그 시절 제작된 빽판 중에는 같은 음반인데 유독 커버 인쇄가 조악한 음반들이 많이 보인다. 업자들 사이에서 ‘복복사’라 했던 빽판이다. 빽판을 가져다 다시 복사한 최악의 빽판이다.

빽판의 영어 제목에는 오·탈자도 넘쳐났다. 에서 ‘Stairway’가 ‘Star way’로 바뀌어도 빽판이라 그러려니 이해했다.

청계천의 노점 손수레와 흔들거렸던 구름다리 육교 바닥에는 마이클 잭슨, 듀란 듀란, 데이비드 보위, 마돈나, 왬, 컬처 클럽 등의 히트 앨범이 어김없이 빽판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80년대는 음반협회의 불시 단속이 더욱 강화되어 동네 음반 가게들도 빽판을 내놓고 팔지 못했다. 그래서 숨겨두었다가 단골이 오면 그들에게만 은밀히 팔곤 했다. 이후 금지곡이 줄어들고 어지간한 음반들은 라이선스 음반으로 발매되면서 빽판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양하게 재발매된 듀엣 바카라와 레이프 개릿 원판과 빽판.

빽판의 현주소와 존재 가치

90년대의 팝송 해적판은 라이선스 음반과 구분이 힘든 준라이선스 음반으로 지속되었다. 디지털 음원 시대가 되면서 빽판은 국내 대중에게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지만 국내에서 제작한 비틀스나 엘비스 프레슬리, 80~90년대 메탈 밴드의 빽판은 외국의 수집가들이 선호하는 아이템으로 둔갑했다.

불법 제작돼 음성적으로 유통된 빽판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선명하지만, 국내에 팝송을 보급하고 침체 일로의 한국 음반 시장에 회생의 기운을 불어넣었던 긍정적 측면도 있다. 추억의 산물이 되어버린 빽판은 뒤늦게 한국 팝 문화의 역사를 증언하는 자료로 그 가치가 재평가되는 분위기도 있다.

1970년대 인기 해외 가수들의 팝송 해적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