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조선의 심장서 만나는 고려의 전설
관악구 강감찬 장군 생가터 낙성대
등록 : 2018-11-08 15:00
귀주대첩의 주인공 강감찬 장군
늦깎이로 장원급제, 고려의 명재상
생가터 낙성대는 공원과는 별도
찾아가는 길 ‘강감찬 마케팅’ 천지
74년 박정희 지시로 안국사 사당을
낙성대공원에 지으며 생가터에 있던
낙성대 3층 석탑도 옮겨 가
장군, 설화와 전설로 역사에 남아
관악구 봉천동 218의 14, 강감찬(948~1031) 장군의 생가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생가터가 낙성대(落星垈)다. 낙성대란 북두칠성 중 네 번째 별이자 문운(文運·학문이나 예술이 번성하는 기세)을 관장하는 문곡성(文曲星)이 떨어진 상서로운 집터를 이른다. 전설이기는 하나 장군의 집에 떨어진 별이 무운(武運·무인의 운수)을 뜻하는 여섯 번째 별 무곡성(武曲星)이 아니라는 점이 특이하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대첩 중 하나인 귀주대첩의 주인공 강감찬은 35세 늦깎이로 과거에 장원급제, 최고 관직 문하시중에 오른 고려의 명재상이다.
생가터인 낙성대와 안국사 사당이 있는 낙성대공원을 헛갈리면 안 된다. 낙성대공원은 생가터에서 400여m 떨어진 관악구 봉천동 228에 있다. 서울에 남아 있는 공(公)의 사적이 두 집 살림을 차리다보니 찾아가는 길도 두 갈래다.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로 나와서 생가터를 들렀다가 낙성대공원으로 가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낙성대역에서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서울영어마을 관악캠퍼스와 관악구민 종합체육센터 옆 낙성대공원을 먼저 둘러보고 생가터로 향하는 방법이 있다. 주택가 한가운데 숨어 있는 생가터는 찾기가 어렵고 휑한 반면, 큰길가의 낙성대공원은 상대적으로 찾기 쉽고 고대광실이라 볼 게 많다. 취향에 맞게 골라잡으면 그만이다.
푯돌 순례자는 전자를 택했다. 후세의 필요 때문에 인위적으로 성역화한 공원보다 생가터에서 천 년 전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생가터 가는 길은 낙성대역 4번 출구 앞 주유소를 끼고 좌회전한 뒤 길을 건너 낙성대역4길을 따라가면 10여 분 걸린다. 낙성대 가는 길은 길 잃을 염려가 없다. 공과 관계 있는 이름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기 때문이다. ‘낙성대 동원아파트’와 ‘낙성대 왕곱창’을 지나면 ‘인헌초등학교’(‘인헌’은 강감찬의 호) 후문이 나온다. ‘강감찬하우스’와 ‘낙성철물점’도 근처에 있다. 공의 아명 ‘은천’을 따서 ‘은천동’이라는 동명과 ‘은천로’라는 도로명도 생겼다.
주택가 골목길 중앙에 1차선 도로 크기로 큼지막하게 쓴 ‘낙성대역4길’이라는 바닥 글씨와 ‘강감찬 생가터’라는 표시에서 걸음을 멈추면 생가터에 도달한 것이다. 낙성대는 인헌초등학교 후문 쪽에 있고, 낙성대공원은 인헌초등학교 정문 쪽에 있다는 점을 유념하면 길 찾기에 도움이 된다. 인헌 초·중·고를 비롯해 인헌동, 인헌시장 등등 낙성대 주변 지역은 온통 ‘강감찬 마케팅’이다.
별이 떨어진 곳엔 빌라와 단독주택이 빽빽하게 둘러싼 손바닥만 한 소나무 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곳이 ‘진짜 낙성대’이고, 서울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돼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탄생지에는 ‘강감찬장군낙성대유허비’ 한 점이 놓여 있을 뿐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4호 ‘낙성대 3층석탑’이 있었다.
1974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안국사(安國祠) 사당을 관악산 기슭 현재의 낙성대공원에 으리으리하게 지으면서 석탑이 옮겨간 빈자리에 유허비를 세워 메웠다. 박 전 대통령은 그때 안국사 건립을 기념하고자 ‘낙성대’라는 휘호를 내렸는데, 현재 안국사 경내 큰 바윗돌에 글씨가 남아 있다. 휘호석 아래에는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휘호를 하사하시었다. 서울특별시는 그 뜻을 받들어… 오늘의 낙성대를 조성하였다”라는 내용의 시대에 역행하는 푯돌이 서 있다. 공식 푯돌은 아니다.
왜 생가터에 사당을 짓지 않았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중국의 사신이 문곡성에 비유할 정도로 큰 인물이 태어난 땅에 사당을 지어야 기념이 되지 않을까. 인연도 없는 관악산 기슭 넓은 곳에 호화판 사당을 지은 것을 장군은 반길까? 생가터를 기리고자 세운 탑마저 새집에 옮겨버린 것은 심했다.
낙성대공원으로 옮겨진 3층 석탑은 절이 아닌 사람의 집에 세워진 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희귀하다. 불탑을 닮은 이 석탑 때문에 더러 안국사를 사찰로 착각하곤 한다. 13세기에 높이 4.5m의 화강암으로 지은 3층 석탑은 임진왜란 때 탑 꼭대기 장식이 훼손돼 남아 있지 않다. 주인을 혼동하지 않도록 1층 탑신에 ‘강감찬 낙성대’라는 명문을 새겨놓았다. 현재 보수 공사 중이어서 가림막에 들어가 있다.
왜 비석이 아닌 탑을 세웠을까.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는 현재의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시흥동 일대는 고려 시대 옛 금주(금천) 지역에 뿌리내린 금천 강씨의 세력권이었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었던 부친 강궁진에 이어 나라를 구한 안국(安國)공신을 기리는 가문의 기념물로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둘째는 불교 왕국 고려답게 비석이 아닌 석탑을 세웠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생가터 유허비 옆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장군과 함께 자랐고, 이후 천 년 동안 집을 지켰다는 ‘강감찬 향나무’는 1968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이듬해 고사했다. 높이 17m에 둘레 4.2m의 향나무는 살아생전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 중 하나였다. 생가터의 주인이 바뀌면서 잘려나갔으나, 2004년 수소문 끝에 두 갈래 밑동 중 하나를 찾아 안국사 경내 강감찬전시관에 전시 중이다.
생가터에 있는 향나무는 1996년 관악구청에서 150년 묵은 나무를 가져다가 심은 후계목이다.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패망시킨 조선 500년 내내 고려 장군의 생가터가 잊히지 않고 남은 이유는 3층 석탑과 향나무 때문이 아니었을까. 석탑도, 향나무도 사라진 낙성대 생가터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네 고양이 4~5마리가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강감찬은 신라의 김유신, 고려의 윤관·최영, 조선의 남이·임경업 장군과 함께 탄생 설화와 전설, 전기소설 등으로 영웅화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또 금천 호족 출신답게 남경(고려 시대의 서울)을 다스리면서 호환을 일으키는 호랑이를 쫓아내는 등 전국에 걸쳐 화려한 설화를 남기고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사략> <동국여지비고> <동사강목> <승정원일기> <신증동국여지승람> <일성록> <조선왕조실록> 등 고려와 조선의 주요 역사책과 <동국이상국집> <동문선> <목은집> <백호전서> <상촌집> <성호사설> <연려실기술> <연행록> <용재총화> <우계집> <임하필기> <청장관전서> <총재전서> 등 각종 문집에서 앞을 다퉈 출생부터 벼슬길, 업적, 설화를 소상하게 전한다. 공이 남긴 흔적은 지우려 해도 지울 수가 없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문헌에 따르면 공은 체구가 작고 외모가 못생겨 볼품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간 설화에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었다는 기술과 함께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현재 낙성대공원 안국사에 모셔진 공의 영정은 설화와 달리 용맹한 무장의 기운이 역력하다. 이는 모사화(어떤 그림을 본보기로 해 베낀 그림)이다. 1974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표준 영정은 1998년 1월10일 도난당한 뒤 행방이 묘연하다. 문화재청은 도난당한 가로 110㎝, 세로 200㎝ 규격의 영정을 도난 문화재로 공시 중이다. 관악구청은 도난 직후 장 화백에게 영정을 다시 그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나이가 들어 힘에 부친다”며 거절하자, 관악구에 사는 금광복이라는 화가에게 부탁해 영정을 그렸다고 한다. 딱한 일이다.
조선의 심장 서울에서, 몇 점 남지 않은 고려의 유산을 만나는 것은 대단한 감흥을 준다. 그것도 고려의 전설,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가 아닌가. 낙성대 생가터는 서울시 기념물 3호이고, 생가터를 증명하는 3층 석탑이 4호인 것만 봐도 ‘진짜 낙성대’의 존재감을 알 만하다. 낙성대 생가터는 유허비 하나만으로도 대접받을 가치가 차고 넘친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낙성대공원 안 강감찬 장군을 모신 사당인 안국사가 가을 단풍에 물들었다. 3층 석탑과 전시관 등이 있다.
강감찬 장군이 중국 고사를 인용한 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낙성대 생가터를 기념하기 위해 13세기에 세웠으나 지금은 낙성대공원 안국사 뜰로 옮겨진 3층 석탑.
고사한 강감찬 향나무의 밑동. 낙성대공원에 전시 중이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낙성대공원 안국사에 모신 강감찬 장군의 영정. 진품은 도난당한 뒤 행방이 묘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