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나는 걷는다, 삶의 권태를 날리며
자신과 만나기 좋은 11월을 맞이하며
등록 : 2018-11-08 15:04 수정 : 2018-11-22 16:06
11월은 발바닥 철학자의 계절
걸으면 행복한 감정 되찾을 수도
제일 두려운 것은 삶의 권태
구름처럼 혼자 왔다 혼자 가야
지난밤 영혼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술자리가 길어져 과음하게 되었다면, 나는 다음날 아침 해장국집이 아닌 공원이나 숲속으로 향한다. 그곳에 최고의 해장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노란 낙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코를 지나 허파 깊숙한 곳까지 전해지는 짙은 낙엽 냄새를 맡으며 걷는다. 그러다보면 이 계절이 아니면 절대로 즐길 수 없는 차갑고도 상쾌한 기분이 든다. 나무들의 모양이 ‘활엽수’에서 ‘침엽수’로 바뀌는 이 시간은 눈과 귀, 코와 입, 그리고 발바닥의 촉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 오감으로 즐기기에 너무도 좋은 계절이다.
11월은 그런 점에서 ‘발바닥 철학자’의 계절이다. 걸으며 사유한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의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대표적인 발바닥 철학자다. 그는 저서 <걷기 예찬>에서 사람들은 발로 걸으면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을 되찾는다고 강조했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 동안 똑같은 신발을 신은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대의 도시인에게 운동화란 곧 자유와 개성을 뜻한다. 언제든지 걸을 태세가 갖춰져 있다. 공원 산책자이건 도시 산책자이건 상관없다. 걷기를 통해 육체의 허파뿐 아니라 정신의 허파를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하다. 저마다 신고 있는 운동화가 다르듯 나만의 삶을 열망한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두 가지가 진정한 ‘나’를 정의한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다고 믿을 때의 교만함의 정도,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인내심과 품위의 정도다. 도심 근처에 있는 야산의 숲속을 걷다 가끔 다치는 사람을 본다. 대부분 올라갈 때가 아니라 내려올 때다. 내리막길에서 젖은 낙엽에 미끄러지는 것을 더 조심하라지만, 맘먹은 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다. 먼저 허물어지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다. 활엽수에서 잎이 떨어지듯, 하루가 다르게 머리카락이 빠져나가고, 우리의 손안에서 소중한 것들이 빠져나간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돈, 권력, 체력, 명성, 피부의 탄력 같은 것들이다. 삶의 활력을 잃기 쉽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이렇게 말했던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빈곤도 걱정도 질병도 슬픔도 아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권태다.” 그렇다. 가장 두려운 것은 권태와 삶의 무료함이다. 그럴 때 이국적인 음악이 묘약이다. 차가운 날씨에는 하모니카 소리가 제격이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신선한 커피콩을 갈아서 아로마 향이 풍기는 커피 한잔 준비하는 동안 지그문트 그로븐의 하모니카 연주로 ‘솔베이지의 노래’를 듣는다. 박제화되어버린 지금의 시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여인 솔베이지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듯하다. 이 곡을 작곡한 그리그와 연주자 지그문트 그로븐, 그리고 이곡의 배경인 <페르 귄트>라는 극을 쓴 극작가 입센 모두 북유럽 노르웨이 출신이다.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 구브란스달렌 지방의 민담을 기초로 한, 방랑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삶을 마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 가운데 ‘솔베이지의 노래’는 극의 마지막에 노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페르 귄트를 품에 안은,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된 여인 솔베이지가 사랑하던 사람을 향해 부르는 노래다. “아마도 겨울이 가고 봄도 가겠지, 겨울 가고 봄도/ 그런 후에 오는 여름도 가고 한 해 전부도, 한 해 전부도/ 그러나 언젠가 너는 올 거야, 난 확실히 알아, 확실히 난 알아/ 그리고 난 분명히 기다릴 거야, 전에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우리는 살면서 참으로 많은 약속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약속도 있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약속을 하고 또 잊어버린다. 하지만 누군가는 솔베이지라는 여인처럼 끝까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11은 10보다는 크고 12보다는 작기 때문에 환영받는 숫자는 아니었다. 10과 12라는 중요한 두 숫자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바로 11이다. 하지만 11은 완성수 12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숫자이기도 하다. 11을 인간의 불완전성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르네 그농이라는 학자가 그중 한 사람으로, 11은 5(2+3)와 6(2×3), 즉 지상과 천상이 결합된 수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가장 인간다운 숫자라는 뜻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완전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는 시기가 바로 11월이다. 계획을 세웠지만 못다 한 일들을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 이 노래와 이야기가 만들어진 노르웨이의 11월은 위도가 높은 탓에 서울보다 훨씬 어둡고 춥다. 비나 진눈깨비가 자주 내린다. 비록 날씨는 점차 나빠지지만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만나기에 알맞은 계절이다. 화려한 자연에 눈을 돌리는 대신 자신의 내면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월은 우주의 신비를 체험하는 계절이다. 수확을 위해 씨를 뿌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대한 작업인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반면에 잎이 떨어져 또 다른 탄생의 밑거름이 되는 것처럼, 나 역시 언젠가는 세상의 거름이 되어야 한다. 구름처럼 혼자 왔다가 혼자 가야 한다. 홀로 걷지 못하면 함께 걸어도 외롭다. 외로워본 사람만이 외로운 사람의 맘을 이해한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솔베이지에게 찾아갈 시간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 동안 똑같은 신발을 신은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대의 도시인에게 운동화란 곧 자유와 개성을 뜻한다. 언제든지 걸을 태세가 갖춰져 있다. 공원 산책자이건 도시 산책자이건 상관없다. 걷기를 통해 육체의 허파뿐 아니라 정신의 허파를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하다. 저마다 신고 있는 운동화가 다르듯 나만의 삶을 열망한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두 가지가 진정한 ‘나’를 정의한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다고 믿을 때의 교만함의 정도,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인내심과 품위의 정도다. 도심 근처에 있는 야산의 숲속을 걷다 가끔 다치는 사람을 본다. 대부분 올라갈 때가 아니라 내려올 때다. 내리막길에서 젖은 낙엽에 미끄러지는 것을 더 조심하라지만, 맘먹은 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다. 먼저 허물어지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다. 활엽수에서 잎이 떨어지듯, 하루가 다르게 머리카락이 빠져나가고, 우리의 손안에서 소중한 것들이 빠져나간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돈, 권력, 체력, 명성, 피부의 탄력 같은 것들이다. 삶의 활력을 잃기 쉽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이렇게 말했던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빈곤도 걱정도 질병도 슬픔도 아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권태다.” 그렇다. 가장 두려운 것은 권태와 삶의 무료함이다. 그럴 때 이국적인 음악이 묘약이다. 차가운 날씨에는 하모니카 소리가 제격이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신선한 커피콩을 갈아서 아로마 향이 풍기는 커피 한잔 준비하는 동안 지그문트 그로븐의 하모니카 연주로 ‘솔베이지의 노래’를 듣는다. 박제화되어버린 지금의 시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여인 솔베이지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듯하다. 이 곡을 작곡한 그리그와 연주자 지그문트 그로븐, 그리고 이곡의 배경인 <페르 귄트>라는 극을 쓴 극작가 입센 모두 북유럽 노르웨이 출신이다.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 구브란스달렌 지방의 민담을 기초로 한, 방랑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삶을 마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 가운데 ‘솔베이지의 노래’는 극의 마지막에 노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페르 귄트를 품에 안은,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된 여인 솔베이지가 사랑하던 사람을 향해 부르는 노래다. “아마도 겨울이 가고 봄도 가겠지, 겨울 가고 봄도/ 그런 후에 오는 여름도 가고 한 해 전부도, 한 해 전부도/ 그러나 언젠가 너는 올 거야, 난 확실히 알아, 확실히 난 알아/ 그리고 난 분명히 기다릴 거야, 전에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우리는 살면서 참으로 많은 약속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약속도 있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약속을 하고 또 잊어버린다. 하지만 누군가는 솔베이지라는 여인처럼 끝까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11은 10보다는 크고 12보다는 작기 때문에 환영받는 숫자는 아니었다. 10과 12라는 중요한 두 숫자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바로 11이다. 하지만 11은 완성수 12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숫자이기도 하다. 11을 인간의 불완전성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르네 그농이라는 학자가 그중 한 사람으로, 11은 5(2+3)와 6(2×3), 즉 지상과 천상이 결합된 수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가장 인간다운 숫자라는 뜻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완전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는 시기가 바로 11월이다. 계획을 세웠지만 못다 한 일들을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 이 노래와 이야기가 만들어진 노르웨이의 11월은 위도가 높은 탓에 서울보다 훨씬 어둡고 춥다. 비나 진눈깨비가 자주 내린다. 비록 날씨는 점차 나빠지지만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만나기에 알맞은 계절이다. 화려한 자연에 눈을 돌리는 대신 자신의 내면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월은 우주의 신비를 체험하는 계절이다. 수확을 위해 씨를 뿌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대한 작업인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반면에 잎이 떨어져 또 다른 탄생의 밑거름이 되는 것처럼, 나 역시 언젠가는 세상의 거름이 되어야 한다. 구름처럼 혼자 왔다가 혼자 가야 한다. 홀로 걷지 못하면 함께 걸어도 외롭다. 외로워본 사람만이 외로운 사람의 맘을 이해한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솔베이지에게 찾아갈 시간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