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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보다 축구” 80대 할배들의 남다른 75분

등록 : 2016-05-19 14:08 수정 : 2016-05-19 16:49
‘서울 80대 축구단’ 회원이 되려면 80대의 나이가 필요조건, 75분 이상 뛸 수 있는 체력이 충분조건이다. 청팀 강한석 선수(왼쪽)가 지난 9일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연습경기에서 홍팀 채을묵 선수와 공을 다투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서울 80대 축구단’의 경기 현장, 25분씩 3쿼터 지친 기색 없어

여기 ‘놀라운’ 할아버지들이 있다. 32명 모두의 나이를 더하니 2607살, 평균 81살이다. 막내가 일흔아홉이고, 제일 어른이 아흔셋이다. 흔히 하는 말로, ‘집에서 손주 재롱이나 보며 지낼’ 연배다. 그런데 할아버지들이 뛴다. 그것도 거친 숨소리와 함께 굵은 땀을 흘리며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축구를 한다. ‘서울 80대 축구단’이다.

5월9일 낮 12시 서울 효창운동장. 가벼운 달리기와 관절풀기 운동, 6인조 공뺏기 연습, 슈팅 연습 등으로 30분쯤 몸을 푼 뒤 할아버지들은 청팀과 홍팀으로 나눠 경기를 시작했다. 전체 운동장의 3분의 2를 이용해 25분씩 3쿼터를 하는 경기다. 햇살이 너무 따가워 지켜보는 마음에 슬그머니 불안감이 생긴다.

“슛을 해야지, 슈웃! 그게 아니지!” “야, 그렇게 거칠면 어떡해!”

게임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20대 젊은이들만큼 격렬하지는 않아도 몸싸움으로 부딪치고 넘어진다. 고성까지 오간다. 이거 ‘장난’이 아니다.

1쿼터 12분께, 홍팀의 왼쪽 공격수 장남진 선수가 청팀 중앙을 파고들며 수비수 2명을 제쳤다. 나머지 수비수들이 그에게 달려든다. 그 순간 오른쪽을 맴돌던 강한석 선수가 “여기이!”라며 크게 외친다. 정확한 패스, 그리고 슈팅. 홍팀 김광희 골키퍼가 손을 치켜들었지만,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왼쪽 모서리에 정확하게 꽂혔다. 첫 골이다.

이날의 주인공은 축구단 단장을 맡고 있는 강한석 선수였다. 오른쪽 공격 자리를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엿보다 골문 앞 다툼에서 흘러나온 공, 깊은 공간패스로 찬스가 생긴 공 등을 ‘넙죽넙죽’ 골로 연결시켰다. 해트트릭(한 선수가 한 경기에 세 골 이상을 넣는 것)이다. 강 선수의 맹활약으로 경기는 청팀의 4대 3 승리로 끝났다.

2쿼터가 끝난 뒤 라커룸에서 양팀이 함께하는 짧은 휴식시간. 강 단장이 지갑을 들어 보이며 말한다. “어제가 어버이날이라 회원들께 막걸리라도 한잔 대접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해트트릭까지 했으니, 오늘은 제가 쏩니다!” 일제히 박수와 환호성이 터진다. 김오득 선수가 “80대 경기에서 해트트릭은 처음이야, 처음”이라며 추임새를 넣는다.


한달에 4~5차례 할아버지들은 함께 모여 땀을 흘린다. 2014년 9월 ‘9988축구단’을 창단하면서부터다. 노년층의 생활체육이 활성화되면서 70대 이상이 뛰는 축구단이 많아지자, 80대 선수들이 ‘99살까지 팔팔하게 운동하자’는 뜻으로 새 팀을 만들었다. 70대 후배들한테서 은근히 ‘노인네’ 취급을 받으며 벤치 신세가 된 것도 이유가 됐다. 그러다 “9988이 뭔 말이야?”라는 물음들이 많아지자, 지난 3월 ‘서울 80대 축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축구단은 주로 두편으로 나눠 연습경기를 하지만, 가끔은 은평여자축구단이나 ‘송파 70대 축구단’ 등 외부 팀과 친선경기도 한다. 장수축구전국대회처럼 여러 팀이 나오는 대회에서 시범경기를 할 때도 있다. 팀 이름에 ‘서울’이 들어가지만 거주지 제한은 없다. 우리 나이로 79살부터 가입할 수 있다. 의정부, 일산, 분당 등 서울 근교는 물론이고, 멀리는 대전 등에서도 선수들이 참여해 날씨를 가리지 않고 운동을 한다. 우산을 써도 옷이 젖을 만큼 비가 많이 내린 5월3일에도 할아버지들은 효창운동장에서 뜨거운 수중전을 벌였다.

75분을 뛰어도 크게 지치지 않을 정도로 할아버지들은 체력이 탄탄하다. 남부럽지 않은 축구 경력을 바탕으로 건강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광희 선수는 1959~1965년 실업팀 대한중석의 수문장을 지냈고, 유현철 선수는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실업팀 한국전력을 35년 동안 지휘했다. 1997년 독일에서 지도자 자격을 받은 문종희 선수, 사단법인 한국장수축구협의회 회장인 김길문 선수, 국민생활체육 전국축구연합회 회장인 최현낙 선수 등도 한가락하는 선수들이다. 강한석 단장은 “경로당에서 10원짜리 화투를 치는 대신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니 우리가 나라의 보배”라며 자부심을 내비쳤다.

경기가 끝난 뒤 운동장 근처 식당에서 닭볶음탕과 함께하는 막걸리 잔치가 이어졌다. 술이 한두잔 돌자 누군가 “우리도 광고 한번 찍고 전용구장 가져보자”고 목소리를 냈다. “맞아, 우리만큼 건강한 사람들이 어디 있어.” “건강음료 광고하면 되겠네.” 여기저기서 웃음 섞인 화답이 터져나온다. 축구단 사무국장인 문종희 선수는 “효창운동장 사용료 50%를 할인받는 것 말고는 별다른 외부 지원이 없어, 회비로만 축구단 살림을 운영하기가 빠듯하다”고 귀띔했다. 가끔 친선경기를 하는 은평여성축구단의 전용구장이 제일 부럽다고 한다.

할아버지들에게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언제나 ‘청춘’인 ‘서울 80대 축구단’의 선수는 최낙현(81), 유현철(80), 홍영표(84), 조남명(81), 강한석(81), 이성기(82), 이기필(81), 김오득(82), 이흥우(81), 정복헌(81), 문종희(79), 김광희(82), 조영섭(81), 오진영(93), 장남진(84), 서효창(83), 김민근(82), 진기선(81), 채을묵(81), 손만지(81), 김순배(81), 방철선(89), 문병석(80), 박찬주(80), 이찬우(79), 장규복(81), 조광호(79), 오덕희(79), 김택수(79), 김길문(81), 한성원(79), 김춘환(79)씨다.

청팀과 홍팀으로 나뉜 축구단 선수들이 75분 동안 펼칠 연습경기를 앞두고 함께 힘을 북돋우고 있다. 장철규 기자

김정엽 기자, 정재권 선임기자 pkjy@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