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나이 앞에 겸손하겠지만 무릎 꿇진 않겠다
신년 증후군을 피하기 위하여
등록 : 2019-01-03 15:07
50살이 된 후배의 심각한 고민 토로
“인생의 방향을 확 수정하고 싶어요”
나이 먹는 건 내 탓이 아니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내 소관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호를 보낸다. 관심과 애정을 전하는 뜨거운 눈빛이 있는 반면, 도와달라는 애절한 구조 신호도 있으며,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의 몸짓도 있다. 그 신호의 동작이 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민한 사람만이 포착할 수 있는 매우 작고도 미묘한 신호로 보내 올 때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신호 포착이란 게 어디 쉬운가? 말과 글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감정이 섞인 의사 전달은 대개의 경우 말과 글이 아닌 사소한 표정이나 몸동작 하나로 전해온다.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비언어적 표현이라 말하는 그런 신호다. 애정을 가진 부모나 친구, 눈썰미 있는 리더만이 뭔가 다른 낌새를 느낄 뿐이며, 소통이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쾌활하던 평소와 달리 무척 억울한 표정이었다.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한 잔 들이켜더니 느닷없이 불쑥 이렇게 한마디 던졌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습니다. 새해에는 몸도 눈도 머리도 마음도 조금 쉬려고 합니다, 하하하!” 달콤함 뒤에 불쑥 쓴맛이 몰려오는 마키아토처럼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하마터면’이란 표현이 자학적인 블랙코미디처럼 들렸다. 요즘 마음 상태가 편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였다. 이럴 때 너무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불쑥 들어가서도 안 된다. 자칫 충고를 하려 든다거나 혹은 개입하려 든다는 느낌이 들면 마음의 문을 닫아걸기 때문이다.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신 뒤 그는 얘기를 이어갔다. “선배님은 요즘 행복하시죠? 일하는 게 재미있잖아요. 저는 매일 소모되는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아요. 억울해 죽겠어요. 제 전성기가 지난 것 같다는 느낌도 들구요. 그래서 올해는 인생의 방향을 과감하게 확 틀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방심하고 있다가 얼굴에 강한 훅 한 방 맞은 권투 선수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나는 그에 의해서 갑자기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안에 뭔가 부족한 것, 결핍이 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그의 눈에 비친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 원고지 밑에 얼마나 많은 삶의 신산함이 배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어른의 마음속에도 어린아이가 산다. 나이를 먹었어도 힘들 때면 누구든 어린아이처럼 보호받고 싶고 기대고 싶다. 다만 들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는 억울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열심히 사는 것과 가치 있는 삶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불만 때문인지 모른다. 평소 쾌활하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진지해진 것은 나이 때문이었다. 신년 증후군이었다. 해가 바뀌면 누구나 새로운 결심도 하고 긍정적인 기운도 있지만, 때론 주눅이 들기도 한다. 더구나 자신의 나이 앞자리 숫자가 3, 4, 5, 6으로 바뀔 때면 울렁증이 심해진다. 때로는 우주가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이 오기도 한다. 그는 올해 ‘4학년’에서 ‘5학년’으로 한 학년 올라가 50대로 접어들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내일이 마침내 오늘이 된 것이다. 베를린 미테 지역에 걸려 있는 유명한 벽화 제목이 떠오른다. “How Long is Now?”(지금은 얼마나 긴 것일까?) 통일 직후 전위적인 예술가 그룹 ‘타헬레스’( ‘자기 주장이나 견해를 분명하게 말한다’라는 뜻의 유대어)가 벽에 남겨놓고 떠난, 자기 암시적이고도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베를린을 현대미술의 메카로 만들었다. 그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해가 바뀌면 많은 이들이 조급해진다. 지나가는 소중한 시간, 오늘이라는 이름의 그 시간 앞에서 조급해진다. 내일(來日)이란 단어를 풀이해보면 앞으로 오는 날이란 뜻이고, 미래(未來)란 말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이지만, 해가 바뀌어 그 낯선 내일과 미래가 지금 눈앞에 현재로 와 있다. 꿈과 희망의 느낌 대신 불안과 불만이 자리를 잡기도 한다. 나이를 먹는 것은 분명 내 탓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대하는 태도는 내 소관이다. 힘든 까닭은 처음 경험하기 때문이다. 서른을 처음 경험하듯이 마흔과 쉰과 환갑을 처음 경험한다. 그래서 당황스럽다. 옛 소련 출신으로 지금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인구학자 세르게이 셰르보프 박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늙는다는 것은 물론 육체적 변화지만,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젊고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똑똑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낮다. 왜 그런가? 자꾸 비교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뒤처지는 기분이 들고. 불공평한 세상이지만, 세상에 가장 공평한 것은 시간이다. 동창회에서 잘난 척하던 동창생의 목과 얼굴에도 주름이 생긴다. 행복의 비결이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듯이 나 자신을 과거의 어느 시점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생활인은 그 자체로 위대하니까. 자신을 그만 들볶자. “꿈이 없다면 우리는 분명 훨씬 빨리 늙으리라!” 낭만주의 시대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의 말이다. 우리는 결심한 만큼 행복해진다. 분명 인생은 짧지만, 그렇다고 시간에 구속당하면, 나이에 갇혀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급하다고 서두른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 앞에 겸허해지겠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지는 않겠다. 시간과 함께 와인처럼 익어갈 것이다. 그것이 신년 ‘나 사용법’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습니다. 새해에는 몸도 눈도 머리도 마음도 조금 쉬려고 합니다, 하하하!” 달콤함 뒤에 불쑥 쓴맛이 몰려오는 마키아토처럼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하마터면’이란 표현이 자학적인 블랙코미디처럼 들렸다. 요즘 마음 상태가 편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였다. 이럴 때 너무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불쑥 들어가서도 안 된다. 자칫 충고를 하려 든다거나 혹은 개입하려 든다는 느낌이 들면 마음의 문을 닫아걸기 때문이다.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신 뒤 그는 얘기를 이어갔다. “선배님은 요즘 행복하시죠? 일하는 게 재미있잖아요. 저는 매일 소모되는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아요. 억울해 죽겠어요. 제 전성기가 지난 것 같다는 느낌도 들구요. 그래서 올해는 인생의 방향을 과감하게 확 틀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방심하고 있다가 얼굴에 강한 훅 한 방 맞은 권투 선수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나는 그에 의해서 갑자기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안에 뭔가 부족한 것, 결핍이 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그의 눈에 비친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 원고지 밑에 얼마나 많은 삶의 신산함이 배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어른의 마음속에도 어린아이가 산다. 나이를 먹었어도 힘들 때면 누구든 어린아이처럼 보호받고 싶고 기대고 싶다. 다만 들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는 억울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열심히 사는 것과 가치 있는 삶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불만 때문인지 모른다. 평소 쾌활하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진지해진 것은 나이 때문이었다. 신년 증후군이었다. 해가 바뀌면 누구나 새로운 결심도 하고 긍정적인 기운도 있지만, 때론 주눅이 들기도 한다. 더구나 자신의 나이 앞자리 숫자가 3, 4, 5, 6으로 바뀔 때면 울렁증이 심해진다. 때로는 우주가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이 오기도 한다. 그는 올해 ‘4학년’에서 ‘5학년’으로 한 학년 올라가 50대로 접어들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내일이 마침내 오늘이 된 것이다. 베를린 미테 지역에 걸려 있는 유명한 벽화 제목이 떠오른다. “How Long is Now?”(지금은 얼마나 긴 것일까?) 통일 직후 전위적인 예술가 그룹 ‘타헬레스’( ‘자기 주장이나 견해를 분명하게 말한다’라는 뜻의 유대어)가 벽에 남겨놓고 떠난, 자기 암시적이고도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베를린을 현대미술의 메카로 만들었다. 그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해가 바뀌면 많은 이들이 조급해진다. 지나가는 소중한 시간, 오늘이라는 이름의 그 시간 앞에서 조급해진다. 내일(來日)이란 단어를 풀이해보면 앞으로 오는 날이란 뜻이고, 미래(未來)란 말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이지만, 해가 바뀌어 그 낯선 내일과 미래가 지금 눈앞에 현재로 와 있다. 꿈과 희망의 느낌 대신 불안과 불만이 자리를 잡기도 한다. 나이를 먹는 것은 분명 내 탓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대하는 태도는 내 소관이다. 힘든 까닭은 처음 경험하기 때문이다. 서른을 처음 경험하듯이 마흔과 쉰과 환갑을 처음 경험한다. 그래서 당황스럽다. 옛 소련 출신으로 지금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인구학자 세르게이 셰르보프 박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늙는다는 것은 물론 육체적 변화지만,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젊고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똑똑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낮다. 왜 그런가? 자꾸 비교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뒤처지는 기분이 들고. 불공평한 세상이지만, 세상에 가장 공평한 것은 시간이다. 동창회에서 잘난 척하던 동창생의 목과 얼굴에도 주름이 생긴다. 행복의 비결이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듯이 나 자신을 과거의 어느 시점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생활인은 그 자체로 위대하니까. 자신을 그만 들볶자. “꿈이 없다면 우리는 분명 훨씬 빨리 늙으리라!” 낭만주의 시대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의 말이다. 우리는 결심한 만큼 행복해진다. 분명 인생은 짧지만, 그렇다고 시간에 구속당하면, 나이에 갇혀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급하다고 서두른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 앞에 겸허해지겠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지는 않겠다. 시간과 함께 와인처럼 익어갈 것이다. 그것이 신년 ‘나 사용법’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