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향 기자가 다니는 집

비 오는 날이면, 녹두누룩 막걸리

얼쑤

등록 : 2016-05-19 15:55 수정 : 2016-05-20 11:18
얼쑤 해물야채지짐
올해는 독일의 빌헬름 4세가 ‘맥주순수령’을 선포한 지 500년이 된 해다. 물과 홉, 맥아(보리의 싹) 등 세 원료로만 맥주를 만들게 한 이 칙령은 당시 맥주 원료였던 밀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 불만이 많았던 제빵사들을 다독거리는 동시에, 식량 안정화라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맥주 생산과 유통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측면도 있어서 독일을 맥주 강국으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

간혹 수입 맥주의 판매율이 가파르게 오른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아프다. 만약 우리에게도 ‘맥주순수령’과 비슷한 법령이 있었다면, 일제의 가양주 말살 정책에 맥없이 당하지만 않았다면, 지금 우리 술상은 달랐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모양새가 천상 ‘그릭 요거트’처럼 생겨 떠먹는 술인 ‘이화주’도 있었다고 하니 말문이 막힌다. 하지만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세상사다.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주세법 시행령(전통주 면허의 설비 기준을 5㎘에서 1㎘로 완화)이 바뀌어 작은 규모의 술집에서도 직접 만든 전통주를 팔 수 있게 됐다. 정부가 ‘막걸리순수령’까지 발표할 예정이라는 소식마저 들린다. 실험 정신이 투철한 젊은 알코올 연금술사들의 길이 열렸다. 7~8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막걸리 열풍을 타고 허시명 선생의 막걸리학교나 경기대에서 운영하는 ‘수수보리아카데미’, 박록담 선생의 ‘한국전통주연구소’ 등에 젊은 양조인들이 몰려들었다.

서울 서교동의 술집 ‘얼쑤’의 주인 조성주(32)씨도 그런 젊은 양조인들 중 한명이다. 얼쑤를 연 지는 이제 3년째. 얼쑤에 들어가면 재미있는 일을 경험할 수 있다. 흔히 노포(오래된 가게)에서나 구경하는 ‘메뉴판에 없는 메뉴’를 맛볼 수 있다. 그는 손님의 낯색을 살펴 새로운 세상에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된 이에게만 그가 직접 담근 술을 건넨다. 지금도 이따금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면 그가 ‘녹두누룩’으로 발효시킨 향 진한 술이 생각난다. 우리 전통 누룩은 거의 사라지고 제조에 편리한 입국(일본식 누룩)이 누룩 시장을 거의 점령하다시피 한 게 현실이다.

막걸리 열풍은 부리부리한 큰 눈을 자랑하는 청년 조씨가 우리 술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소주나 사케를 좋아했는데, 막걸리 인기를 보고 우리 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푹 빠져 유명한 양조장까지 찾아다녔다. 그는 <막걸리 수첩>의 저자이자 한국가양주연구소 소장인 류인수 선생께 막걸리를 배워 전통주 양조인이 됐다.

그는 요즘도 한달에 세번 술을 빚는다. 최근에 빚은 술은 이화주, 삼해주, 석탄주다. 모두 고문헌에 언급된 술이다. ‘얼쑤’에는 푸짐한 안주도 있다. 그는 술을 배우고 나니 와인의 세계처럼 ‘마리아주’(음식과 술의 궁합)가 궁금해졌다. 유명한 와인바에서 일하면서 배운 한식 경험을 바탕으로 ‘보쌈’, ‘해물야채지짐’(사진) 등을 만들었다. 개업 초창기에는 “맛이 없다”는 평도 들었으나 이제는 안주 때문에 찾아오는 이가 있을 정도다. 마치 시카고식 피자처럼 두꺼운 ‘해물야채지짐’이 인기다.

대학은 가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어요. 구태여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필요하면 나중에 가면 되죠.” (마포구 서교동 331-13/02-333-8897/안주 1만6000~4만원)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음식·요리 담당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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