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글을 써서 생계 꾸리기, 그 가혹함을 사랑함

‘글로생활자’의 삶에 대하여

등록 : 2019-01-17 15:30
연초부터 지독한 감기 몸살에도

여러 건의 원고를 쓰다 붉은 코피

직장생활 힘들지만 밖은 더 험난

다만 내 일을 사랑하는 게 우선

황금 돼지해라고 잔뜩 기대를 걸었으나 연초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지독한 몸살 감기다. 코와 귀가 모두 막히고, 침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목에서는 고통이 심했다. 코가 막히면 산소 공급이 제대로 안 되니 두통은 계속되고, 입과 입술은 오랜 가뭄 뒤의 논밭처럼 쩍쩍 말라갔다. 그동안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스승이 있어, 그것을 잃어보아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문장이 떠오르는 악몽 같은 며칠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스승이란 재산, 직장, 그리고 건강을 잃었을 때를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봐야 진정한 자기 자신과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 초반부터 나는 그 세 명의 스승 가운데 한 명과 만난 것이다.


아프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잠시 정지 상태가 된다. 한동안 외면했던 나 자신을 바라보고,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는 좀처럼 돌아보기 힘든 시간이다. 그동안 자유직업인으로 살면서 내 힘의 끝까지 도전해보겠다고 했지만, 내 육체적 능력의 한계, 더 나아가 인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이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해왔던 것은 아닌지 눈을 돌리게 된다. 가끔 이런 문자를 보냈던 후배들이 생각난다.

“선배, 언제 저녁 한번 사주세요!”

그 행간의 의미를 안다. 여기서 밥은 위의 공복감을 채워주는 단순한 한 끼의 음식이 아니다. 저녁 사달라는 말과 술 한잔하고 싶다는 제안은 곧 ‘제가 요즘 힘들어요!’라는 말의 동의어일 테니까. 사람 관계와 의사소통에도 적절한 타이밍이란 것이 존재하여 그 때를 놓치면 안 된다. 힘들 때 나누는 밥 한 끼와 차 한 잔은 평범할 때의 그것과 너무도 다르다. 도무지 승복하기 힘든 직장 내의 인사 결과가 발표되거나, 조직의 장래가 암담하게 보이는 날이면 조용히 사무실 구석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구조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40~50대 직장인이 세 명 이상 모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화의 주제가 뭔지 아세요? 그것은 ‘도대체 나가서 뭘 할 수 있을까?’란 질문입니다. 그냥 답답해요.”

그렇다. 요즘 직장인들의 마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답답함, 그것이다. 누구나 가끔 불안한 미래와 마주 앉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라지만, 중년의 아픔은 쉽사리 드러내고 말하기 어렵다. 자기의 삶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시선은 멀리 향하는 법이다. 가끔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자리가 실제 이상으로 커 보일 때도 있다. 혹시나 그들에게 내가 하는 일이 실제 이상으로 미화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글과 강연을 통해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나는 자칭 ‘글로생활자’라 명명해왔다. 낭만적인 어감을 가진 ‘글’과 매우 현실적인 ‘생활자’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이뤄진 조어(造語)다. 나는 생활이라는 후자에 방점을 찍었지만, 듣는 이에 따라서는 글이라는 전자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듯싶다. 어감이 낭만적이기는 하여도 실상은 날마다 막노동으로 연명하는 ‘근로자’ 못지않게 고단한 삶이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 시행되고 있지만 나에게는 예외다.

새벽 3시 원고를 쓰다 붉은 코피를 흘리기도 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휴지통에 휴지를 수북이 쌓아놓고 몸에는 두꺼운 담요를 두른 채 쓰고 있다. 직장을 다니는 이들은 몸이 아프면 잠시 병가를 내고 쉴 수 있지만 글로생활자는 그럴 수가 없다. 글로생활자에게 글을 실어줄 매체란 존재의 근거다. 영어의 ‘데드라인’이란 말이 그러하듯 마감 시간은 직업의 생과 사를 가르는 선과 같다. 나이 드신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의 중환자실 한 모퉁이에서도 노트북을 두드려야 했으며, 입대한 아들의 외출 면회하러 간 날에도 글을 써야 했다. 그게 엄정한 현실이다.

화려해 보이는 것과 달리 강연자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경우 강연자로서 내 업(일)의 본질은 지식, 경험, 기술, 정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감성노동자다. 강연과 강의를 듣는 청중과 수강생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먼저다. 만약 강연장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그것은 마음과 귀가 닫혔다는 의미다.

소통, 공감, 리더십,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지만 실제로 작동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많은 기관에 가보면 기관장이나 책임자의 언어가 현장에서는 다르게 이해되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언어는 상상력이 상상력을 부르고, 오해가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 그럴 때 강연자로서 내 역할은 통역이다. 그것은 외국어 통역보다 더 어렵다. 공감해주고 감정을 통역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두 정신없이 즐겁게 떠들 때도 정신의 피뢰침을 잔뜩 곤두세운다. 글감을 찾고 강연의 주제를 얻기 위해서다. 사회적 동물이면서도 고독한 표범처럼 지내야 한다. 가끔은 자신을 주변과 완전히 고립시킬 필요도 있다.

직장인들의 삶이 고달프지만, 프리랜서의 삶은 몇 배 더 가혹하다. 그런데도 이 일을 왜 하는가? 내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글 쓰고 강연한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그 일에 따르는 고통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이 없으면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가족을 위해, 나를 의지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내 일을 사랑하는 게 먼저다. 그래야 내일이 찾아온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