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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노획한 북한 사진, 아들 “돌려주고 싶어요”

등록 : 2019-01-17 16:29 수정 : 2019-01-18 14:06
6·25 때 국방부 사진대 대장 임인식씨 유품서 김일성 일가 사진 등 270점 발굴

2대 사진가 아들 임정의씨 “김정은 위원장 서울 답방 시 전달하고 싶다”

지난 15일 오후 3시께 서울 광진구 청암사진연구소에서 임정의 사진가가 창고 깊숙한 곳에 있던 ‘밤색 종이 상자’를 열어 간직한 사진을 꺼내 보였다. 이는 임정의 사진가의 아버지이자, 6·25전쟁 때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으로 복무했던 청암 임인식 사진가가 전쟁 때 평양에서 노획한 사진이다. 손에 든 사진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상자 속 사진에 대해 편하게 얘기하게 되기까지 대를 물려 7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사진 전현주 기자 제공

“이 사진들 말입니다. 우리 남북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지난해 여름, 서울 광진구 청암사진연구소 대표인 사진가 임정의(73)씨가 밤색 종이 상자 하나를 조심스레 기자에게 보였다. <서울&> 연재물 ‘3대 사진가의 서울’(2018년 6월22일~11월2일) 준비로 창고 속 사진 발굴이 한창이었을 때였다.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영향으로 남북관계 해빙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기이기도 했다.

다른 상자들과 뒤섞여 나온 종이 상자는 덮개 겉면에 한자로 ‘괴뢰군사진’(傀儡軍寫眞)이라 희미하게 표기됐고, 옆면에 빨간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상자를 열었다. 흑백 인화지 총 270여 점과 한반도 냉전 시대 정치 풍자 삽화 10여 점, 빨간 줄이 그어진 봉투 속에서는 오래된 필름이 수십 점 나왔다. 젊은 날 김일성 주석과 그 일가의 사진이었다.

빨간 줄 그은 필름 봉투와 ‘해방 공간 평양’


김일성 일가를 비롯한 북한 고위급 인사들, 개인 일상, 국가 공식 행사 등을 찍은 사진이 서울에 있는 민간 수장고에서 발견됐다. 촬영 시기와 배경은 주로 1945년부터 1950년까지, 6·25전쟁 직전 평양과 주변 등지로 추정된다. 촬영지는 묘향산 보현사와 평양 모란봉극장 등 다양했다.

1945년 10월14일 만경대 고향 집에서 김일성과 할머니 리보익.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김일성 일가 일상, 여행, 주변 인물들과 단체 휴양, 전문 사진관에서 촬영한 초상 사진 같은 사적 사진 외에도 해방 후 백범 김구 등 남쪽 인사들의 평양 방문 모습과 평양 시가지, 군사훈련 장면 등 공적 사진이 폭넓게 포함됐다.

이는 1950년대 전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청암 임인식(1920~1998) 사진가의 유품 가운데 하나다. 장남 임정의씨가 진위를 명확히 모른 채 창고에 보관하다가, 청암사진연구소 설립 이래 처음으로 수십만 장 사진을 ‘디지타이징’(아날로그 필름이나 사진 등을 디지털화하는 작업)하는 과정에서 <서울&> 취재진과 만나 외부에 드러났다.

임씨는 “아버지는 6·25 전쟁이 벌어진 1950년 6월부터 1952년 5월까지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으로 종군하셨어요. 전쟁 중 평양 수복 당시, 현지 사진관에서 입수한 사진으로 봅니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노획 사진’이다.

“전쟁 중 양측 사진대는 무엇보다 ‘사진관 접수’가 우선이었을 겁니다. 당장 인화 장비와 화학약품이 갖춰진 현상실이 필요하니까요. 현상 후 바로 캡션(사진 설명)과 기사를 붙여 내보내야 하죠.”

임씨의 말처럼, 전장에서는 ‘전략적 사진 생산’이 총성만큼 치열했다. 전쟁 기록물 생산과 수집에 독보적 두각을 보인 주체는 미군이었다. 1952년 5월 군에서 나온 임인식 사진가는 같은 해 6월 서울 남대문로에 ‘대한사진통신사’를 설립해 운영했는데, 주로 (에이피) 통신 등 외신과 주한 미공보원(USIS)과 일을 하며 6·25 전쟁 자료 수집을 이어갔다고 한다.

김일성과 동료들.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함께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가운데 아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추정.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임씨는 “1998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종이 상자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으셨어요. 단지 ‘중요한 자료니 잘 보관해라’는 의사”를 넌지시 비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가 필름 덮개에 빨간 줄을 그어두셨어요. ‘신중히 다뤄야 하는구나’ 정도로 여겼죠. 인화지는 산화가 되기 때문에, 빈티지 사진은 상자를 되도록 열지 않아요. 이 가운데 백범 김구 선생과 김일성이 함께 있는 사진(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이하 남북연석회의) 외 몇 점만 통일원 등을 통해 알아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상자 전체를 외부에 드러내는 건 처음입니다.”

임씨가 조금 상기된 듯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훗날 세대가 바뀌면 남북이 편하게 자료 교류할 날이 오리라 보셨을 겁니다. 지금은 남북 정상회담도 다시 하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울 답방 의사를 밝히며 평화 분위기가 생기고 있으니, 언젠가 자료 교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요. 미국, 중국, 옛소련이 찍은 해방 공간과 전쟁 사진이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찍고 수집하는 시각은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1947~1950 김일성 최측근인 허가이 잔치 사진으로 추정. 맨 오른쪽 두 번째부터 김일성 김정숙 부부, 허가이와 여성, 김두봉 부부가 보인다.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김일성 일가 휴양 사진은 국가기록원에도 없는 자료”

김정일·경희 남매 어린 시절 많아

평양 등 주변 계곡서 찍은 휴양 사진과

인민복 입은 사람과 단체사진도

김일성 주석 할머니 리보익과 찍은 사진

“기존에 국내에 소개된 것과 다른 사진”

1948년 남북연석회의 사진도 10여 점

“현대사 인식하는 자료 가치 큰 편” 평가

북한도 사료 교환에 긍정적 태도 보여

북 학자 “남에 없는 사료 원본 교환 의사”

사진 보관·사료 교환 위한 노력 필요

젊은 시절 김일성과 김정일, 김경희 남매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모습.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일가 휴양 사진 등은 희귀 자료로 판단”

청암사진연구소에서 입수한 사진과 삽화 280여 점을 스캔 받아 확인해봤다. 먼저 구글 이미지 검색 서비스를 활용한 결과, 280여 점 가운데 4점(김일성 독사진, 초상 사진, 광복 3주년 기념행사 사진, 김일성 가족사진)이 미국·러시아 매체에서 2000년대 들어 소개된 경우가 있고, 2점(남북연석회의)은 국내에서 원본을 커팅·편집한 사진이 쓰이고 있었다.

미국 매체에서 소개한 김일성 초상 사진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소유다. NARA는 6·25전쟁 당시 미 정보당국이 수집한 북한 정부기관 사진과 서류 노획물을 관리하고 있다.

사진 내용은 크게 5가지로 나뉘어 보인다. 분량 순으로 김일성 일가 일상 사진, 초상 사진, 국가 공식 행사 기록물과 선전 활동, 분단 전 남북 인사들 회담, 군사훈련과 사열 모습 등이다.

김일성 독사진.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그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김일성 일가 일상 사진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여동생 김경희 남매의 유년기 시절 모습이 자주 보인다. 평양과 주변 계곡 등지에서 일상복을 입고 찍은 김일성 일가 휴양 사진, 묘향산 보현사에서 인민복을 입은 군인들과 찍은 단체 여행 사진도 마찬가지다. 격식 없는 앵글로 봐서 동행했던 가까운 지인이 스냅사진으로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 김일성 김정숙 부부, 김일성 최측근으로 알려진 김두봉 부부, 허가이 등 북쪽 주요 인사들이 함께한 회식 사진 등이 포함됐다.

19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 1946년 8월 노동법령 공포와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 공포 후 거리에서 열린 시가지 행진, ‘조소문화협회 제3차 대회’ 등 펼침막이 걸린 국가 공식 행사 사진도 보인다. 1948년 4월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정치회담 남북연석회의 사진도 10여 점 된다.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3·8선을 넘었던 백범 김구와 김일성 두 인물을 중심으로 김규식, 홍명희 등 당시 남쪽 주요 인사들과 박헌영, 김두봉, 김책, 최용건 등 북쪽 주요 인사들 활동 모습이다.

<서울&>과 만나 사진 스캔본을 일부 독해한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국가기록원 자문위원)는 “김일성 일가 휴양 사진은 쉽게 보지 못했다. 국가기록원에서도 확인하지 못한 자료”라고 말했다.

이어서 김 교수는 “현대사를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서 자료 가치는 큰 편이라 본다. 특히 냉전 시대는 철저히 외면한 채 살아온 면이 있다. 역사에서 누락된 이 시기를 ‘이데올로기적 시각으로 볼 필요 없이 ‘역사의 복원’차원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차후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라 설명했다.

1945~1950경 묘향산 보현사 등지에서 찍은 사진.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함께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곳곳에서 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인다.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일부 사진을 본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도 “몇몇 사진 속 인물은 김일성과 함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있는 것으로 볼 때,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함께한 사람들로 추정된다”고 평가했다. 북한 현대사 전문가인 김연구관은 1945년 8월15일부터 날마다 북한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정리한 편년체 사료집 <북조선실록> 30권을 지난해 10월 펴냈다. 지난 20년간 북한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모아온 김 연구관도 “처음 보는 사진이 상당히 많다”고 ‘밤색 종이 상자 속 사진’’을 평가했다. 한 예로 “김일성이 1945년 10월14일 만경대 고향집에서 할머니 리보익과 함께 찍은 사진도 그동안 국내에 알려져 있던 사진과는 각도가 다르다”고 했다.

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으로 추정된다.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국가 중요 기록물이 개인 수장고에 남은 경위

이 같은 기록물이 일찍 발견되지 않고 개인 수장고에 온전히 남은 경위는 뭘까. 임씨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때 군사정부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모진 대우를 받았어요. 은거한 채 생계를 이었고,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시면서 한국의 삶을 정리하면서 사진에 대한 기억도 묻게 된 것”이라 회고했다.

청암 임인식은 육군사관학교 8기 특2반 출신이다. “아버지는 자원한 것이 아니에요.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정부에서 엘리트 양성차원으로 정부행사 등을 기록할 수 있는 사진가를 모집해 교육하고자 했어요. 또한 해방 후 서울에서 라이카 같은 카메라를 소유하고 활동하는 사진가가 많지 않았어요. 그 가운데 평판이 좋아 추천을 받은 거예요. 1년 단기 코스를 밟았고, 곧 6·25 전쟁이 났고요. 아버지는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킬 때 동조하지 않았던 정훈국 라인 가운데 한 분이셨어요.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완전히 폐족 신세가 된 겁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서울 북촌 집과 남대문로에 있던 대한사진통신사를 정리한 청암 임인식은 창신동과 금호동 등 달동네를 전전하며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화원을 운영하거나 식용 토끼를 기르고, 사진 용품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잇다가 1987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1991년 여행비자로 고향(평북 정주) 방문 후 1998년 서울로 돌아와 그해 작고했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주변인들 제보로 국립 서울현충원에 이장된 해가 2017년이다.

임인식의 ‘밤색 종이 상자 속 사진’는 어쩌면 끊어진 남북의 역사를 잇는 작은 씨앗이다. 현재 남북은 한국 현대사는 물론이고 조선 시대 사료들조차 서로가 분점한 채 교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남북이 서로 다른 역사 해석을 낳게 하는 원초적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남북의 서로 다른 역사 해석은 냉전적 적대 의식을 온존시키는 기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청암사진연구소는 “청암 임인식 사진가의 유품 중 김일성 일가 사적 기록물을 모아, 만약 북에도 없는 자료라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서울 답방 시 (선물처럼) 전달하고 싶다”고 한다. 혼란했던 해방 공간에 관한 기록물을 교환하며 역사를 복구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가치가 있는 자료라면 단절된 시간을 이해하는 일에 도움이 되리란 기대에서다.

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으로 추정된다.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다행히 사료 교환에 대해서는 북한도 판문점 선언 이후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원로 사학자이기도 한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지난해 하반기 중국 연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한 북한 학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역사 자료 목록을 공개하면서 ‘원본 자료도 직접 교환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고 전한다. 사료 교환을 위한 남북 당국의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임정의 사진가가 당부했다.

“저는 창고에 있는 사진을 다 태워버리고 싶은 적도 많았어요.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다는 공포에 그 사진들은 삶의 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사진들을 지켜왔습니다. 오로지 후세대를 위한 일입니다. 사진은 역사를 말하는 증거고, 사진을 보관한다는 건 후세대에게 역사를 물려주는 것과 같아서요.”

그는 “새해에는 중요한 역사 자료인 사진 자료의 보관과 관련해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아요”라며 비로소 싱긋이 웃었다.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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