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름 모를 강직한 성품의 선비가 살았을까. 쪽머리를 한 마나님이 반듯하게 앉아 수를 놓았을까. 마당을 바삐 비질하는 행랑아범 옆에선 작은 새 한 마리 조잘조잘 지저귀었을까. 한 번도 살아본 적 없어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오래전 한옥의 하루를 상상한다. 번잡했던 마음에 고요함이 깃들고, 저 열린 문 안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뎌본다.
상촌재(사진)는 종로구가 오랫동안 방치됐던 경찰청 소유의 한옥 폐가를 정성 들여 복원하고 2017년 6월 개관한 전통 한옥이다. 단원 김홍도에서 남정 박노수에 이르기까지 걸출한 예술가들이 활동한 경복궁 서쪽 세종마을의 옛 명칭 ‘웃대’(상촌·上村)에서 이름을 따왔다. 도심지 개발과 상업화로 점차 사라져가는 한옥 문화 보존에 기여하고 있으며, 전통 한식 목구조로 시공하고 자칫 버려질 뻔한 옛집 자재를 재사용해 특별함을 더하는 장소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기둥 너머, 서까래 틈 사이로 켜켜이 쌓인 비밀스러운 사연과 한때는 어떤 이의 희로애락으로 충만했을 모습을 연상케 한다.
소박한 멋이 있는 외관을 보면 알 수 있듯 내부 또한 화려하진 않지만 격조 있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사랑채, 안채, 별채 3개 동으로 구성돼 있다.
사랑채는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 기술인 온돌의 구조와 원리를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상부는 투명한 강화 유리로 되어 있어 상촌재를 방문하는 누구나 온돌 내부를 볼 수 있고, 지역에서 발굴한 구들을 재현해 생생함을 더한다. 요즘처럼 추운 때에는 직접 장작과 숯을 가지고 온돌에 불까지 지필 수 있으니 서울에서 온돌 문화를 가장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별채는 세종대왕 탄신지인 세종마을의 역사성을 고려해 한글과 관련된 전시 시설로 운영한다. 한글 창제의 목적과 원리, 세계 석학들의 한글 예찬을 담은 영상 등을 전시해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안채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스며든 공간이다. 조선 시대 후기 부엌을 재현해 불과 온기가 있는 난방 문화를 소개하고, 한식 문화가 시작된 부엌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다.
사랑마당과 안마당 사이의 누마루도 주목할 만하다. 문을 닫으면 벽이나 다름없지만 문을 열면 안채에서 사랑채까지를 두루 살필 수 있는 닫힌 듯 열린 듯, 채우고 또 비워내야 하는 인생의 단면을 담고 있다.
눈을 감으면 다정한 시선이 머문다. 이름 모를 옛 여인은 아궁이 앞에 쪼그린 채 불을 지피곤 이내 분주해진다. 본 적 없지만 눈앞에 선명하고, 들어본 적 없지만 귓가에 또렷한 풍경. 구들장의 온기를 느끼며 게으름 부리는 내 앞으로 그네는 정갈하게 차린 밥상을 가만 내민다. 우연히 주변을 맴돌다 온대도 좋고, 온돌의 따스함과 지혜를 엿보러 와도 좋소. 지난한 삶일랑 잠시 내려놓고 쉬러 와도 환영이고 고아한 한옥의 멋에 취하고 싶대도 환영이오.
그렇게 어느 마음 적적한 날, 일상의 편린들이 속삭인다. 지금 이 순간, 상촌재로 훌쩍 떠나지 않겠느냐고.
이혜민 종로구청 홍보전산과 주무관, 사진 종로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