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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도 거뜬한 ‘산책길 150’…서울시 고산자의 고행길
등록 : 2019-02-14 15:37
4년 만에 <서울, 테마 산책길> 완간한 이동욱 서울시 주무관
서울시청에서만 팔았는데도 1권 4500부 나가는 ‘베셀’
팥배나무는 봄에는 하얀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자줏빛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팥을 닮았고 꽃은 배꽃을 닮았다 해서 팥배나무라 한다. 참나무류에 밀려 군집을 이루는 경우가 드물다.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군락지(7만3천㎡)가 은평구 봉산에 있다.
“자치구 담당자가 추천해서 2015년 가을에 처음 왔는데, 빨간색 열매가 맺혀 온 숲이 장관인 거예요. 그 사이로 난 산책길을 걸어가는 내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팥배나무 열매를 먹으려고 새들이 모여든 거죠. 서울에서 새소리를 이 정도로 들을 수 있는 숲이 흔치 않거든요. 이 길에 이름도 붙이고 이야기를 입혀서 시민들에게 알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이동욱(36) 서울시 푸른도시국 주무관은 지난달 10일 4년 만에 다시 봉산을 오르며 이름 없던 짧은 길에 ‘봉산 팥배나무길’이라 이름 붙이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새롭게 생긴 표지판을 따라 나무 데크 길로 들어서자 팥배나무 숲이 펼쳐졌다. 겨울이라 잎은 떨어져 가지는 앙상했지만, 붉은 열매들은 여전했고 겨울 양식을 찾아온 새들의 지저귐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팥배나무 군락지를 관찰하는 데크 길이 끝나자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이 나왔다. 30분 남짓한 산책 시간 동안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봉산 팥배나무길은 서울시가 2016년 발간한 <서울, 테마 산책길Ⅰ>에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테마 산책길’은 2015년 서울시에 입사한 이 주무관이 처음 맡은 업무였다. ‘서울에서 전망이 좋은 길은 어디인가요?’ ‘숲이 좋은 길은 어디인가요?’ 등 시민의 잦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서에서 테마 산책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존에 서울 둘레길이 있지만 능선을 타야 해서 초보자는 쉽지 않아요. 서울 안에서 누구나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을 추린 게 테마 산책길입니다. 가장 걷기 어려운 길이 등산로라면, 서울 둘레길이 그다음이고, 테마 산책길은 가장 쉬운 길이죠.”
처음 회의할 때는 80개의 테마 산책길을 선정하려고 했다가 직원들이 아는 길만 뽑아봐도 100개 가까이 됐다. 새로운 길을 더 찾아 150개의 길을 4권에 나눠 출간하기로 했다. “막상 시작해보니 한 해 30~40개씩 길을 선정해 책으로 출판하는 게 만만치 않았어요. 40개의 길을 추리려면 80개 정도는 검토해야 하는데, 미리 걸으며 난이도와 특징을 점검하기엔 1년이라는 시간도 빠듯하죠.”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 주무관이 답사한 내용을 선배들이 확인하면 빠뜨린 부분이 꼭 나왔다. 결국 대부분의 길을 두 번씩 가야 했다. “특히 지도를 잘 그려야 해요. 현장에서 1차로 그려본 뒤 다시 걸으며 그린 게 맞는지 확인해서 다시 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2년이 지나자 일머리가 트이기 시작했다. 2권 작업할 때 자신감이 붙었고, 3권부터 베테랑처럼 했다. “4권 작업할 때는 지도를 보면서 비었다 싶은 곳을 딱 찍어서 자치구 담당자께 ‘여기 어때요?’ ‘이 길 어떨까요?’라고 먼저 제안했어요. 담당자께서 구체화해 보내준 길을 지도에 다시 그려봐서 겹치는 길은 없는지, 거리는 적당한지 확인한 뒤에 현장에 나가는 거죠. 무작정 나가면 1년 안에 끝낼 수가 없거든요.” 서울 전역의 산길을 한눈에 바라볼 지도가 필요했다. 시중에는 서울 전도가 없어 자치구별 등산로 지도를 인쇄해 이어 붙였다. 사무실 한쪽 벽에 B4 10장 크기의 지도를 붙여놓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섰다. “벽에 붙어 서서 ‘여기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길을 표시했다가 ‘이건 아닌가’ 싶어 다시 지우고 있으면, 지나가던 다른 과 직원들이 보고 ‘뭐 하냐’며 웃기도 하죠. 저희끼리는 우스갯소리로 ‘서울의 대동여지도’를 만든다고 해요. 제가 ‘서울시의 고산자 김정호’라도 된 것 같아 뿌듯하고 재미있었어요.” 이 주무관은 테마 산책길에 근교 산자락길, 등산로 등 길을 하나씩 더 맡다 보니 지금은 서울 숲길 대부분을 담당한다. 서울시립대 조경학과를 다닐 때 시민이 쉽게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었는데 전공을 살릴 수 있어 행운이라고 여긴다. “지도 직접 그려보고 맞는지 걸어보고…” 대부분 같은 길 두 번씩 걸어 “서울시 대동여지도” 만드는 기분
“근무 시간에 산에 가서 좋은 공기 마시면서 일하니까 좋겠다고 주변 사람들이 엄청 부러워해요. 물론 좋을 때도 있지만, 나가기 싫은 날에도 나가야 하죠. 제일 힘든 건 여름철에 현장 점검 나가는 건데, 지난여름은 생각하기도 싫어요. 저만 고생한 게 아니고 우리과 직원 4명, 자문위원 3명, 자치구 담당자 20 여 명 등 다 같이 고생하셨죠. 자치구 담당자는 젊은 분들이 많아요. 시험 어렵게 통과해 들어와서 그런지 다들 열정이 있어요. 이번 일을 계기로 다른 사업을 할 때도 조금 더 고급스럽게 해보자고 의기투합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말 발간한 4권을 마지막으로 <서울, 테마 산책길> 시리즈는 완간됐다. 서울시 전자책 누리집(ebook.seoul.go.kr)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책은 서울시청 지하 1층에 있는 ‘서울책방’에서만 살 수 있다. 한 권씩 나올 때마다 서울책방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됐다. 1권은 지금까지 4쇄에 걸쳐 모두 4500부를 찍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테마 산책길은 서울 둘레길과 견줘 홍보를 많이 안 했는데, 알음알음 알려졌다는 게 뿌듯해요. 책을 사서 목차대로 길 하나씩 완주하는 분도 계세요. 책 가격은 권당 3천원인데, 최소한의 인쇄비만 받는 셈이죠. 시청에 방문하신 분들이 선물용으로 많이 사 가시더라고요.”
지난해 말에는 카카오맵에서 연락이 왔다. 콘텐츠가 좋으니 테마 산책길을 소개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서울시는 올 상반기 안에 길 정보를 재가공해 카카오맵 테마 지도로 제공할 계획이다. “목표로 했던 4권까지 끝내고 나니 시원섭섭한데, 앞으로가 고민입니다. 서울의 웬만한 산에는 테마 산책길이 있을 거예요. 산은 다 훑었어요. 이제 150개의 길 정보를 계속 업데이트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길에 포함된 사유지가 문제가 되면 코스를 수정해 다음 인쇄 때 반영하고 있습니다. 길은 계속 변하니까 제 일도 끝이 없겠죠. 사람들이 다니는 게 길이 되고, 사람이 길을 만드는 거니까요.”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이동욱 서울시 푸른도시국 주무관이 2016년 에 소개한 은평구 ‘봉산 팥배나무길’을 지난달 10일 다시 찾아 데크 길을 걷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처음 회의할 때는 80개의 테마 산책길을 선정하려고 했다가 직원들이 아는 길만 뽑아봐도 100개 가까이 됐다. 새로운 길을 더 찾아 150개의 길을 4권에 나눠 출간하기로 했다. “막상 시작해보니 한 해 30~40개씩 길을 선정해 책으로 출판하는 게 만만치 않았어요. 40개의 길을 추리려면 80개 정도는 검토해야 하는데, 미리 걸으며 난이도와 특징을 점검하기엔 1년이라는 시간도 빠듯하죠.”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 주무관이 답사한 내용을 선배들이 확인하면 빠뜨린 부분이 꼭 나왔다. 결국 대부분의 길을 두 번씩 가야 했다. “특히 지도를 잘 그려야 해요. 현장에서 1차로 그려본 뒤 다시 걸으며 그린 게 맞는지 확인해서 다시 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2년이 지나자 일머리가 트이기 시작했다. 2권 작업할 때 자신감이 붙었고, 3권부터 베테랑처럼 했다. “4권 작업할 때는 지도를 보면서 비었다 싶은 곳을 딱 찍어서 자치구 담당자께 ‘여기 어때요?’ ‘이 길 어떨까요?’라고 먼저 제안했어요. 담당자께서 구체화해 보내준 길을 지도에 다시 그려봐서 겹치는 길은 없는지, 거리는 적당한지 확인한 뒤에 현장에 나가는 거죠. 무작정 나가면 1년 안에 끝낼 수가 없거든요.” 서울 전역의 산길을 한눈에 바라볼 지도가 필요했다. 시중에는 서울 전도가 없어 자치구별 등산로 지도를 인쇄해 이어 붙였다. 사무실 한쪽 벽에 B4 10장 크기의 지도를 붙여놓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섰다. “벽에 붙어 서서 ‘여기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길을 표시했다가 ‘이건 아닌가’ 싶어 다시 지우고 있으면, 지나가던 다른 과 직원들이 보고 ‘뭐 하냐’며 웃기도 하죠. 저희끼리는 우스갯소리로 ‘서울의 대동여지도’를 만든다고 해요. 제가 ‘서울시의 고산자 김정호’라도 된 것 같아 뿌듯하고 재미있었어요.” 이 주무관은 테마 산책길에 근교 산자락길, 등산로 등 길을 하나씩 더 맡다 보니 지금은 서울 숲길 대부분을 담당한다. 서울시립대 조경학과를 다닐 때 시민이 쉽게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었는데 전공을 살릴 수 있어 행운이라고 여긴다. “지도 직접 그려보고 맞는지 걸어보고…” 대부분 같은 길 두 번씩 걸어 “서울시 대동여지도” 만드는 기분
은평구 ‘봉산 팥배나무길’에서 이동욱 주무관이 1~4권을 소개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