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미 ‘햇님’ 듣고 눈물 흘렸어요”

한국 가요 LP 수집가 미국인 청년 맥스 발혼

2011년 방한, 중앙대 박사 과정
1970년대 한국 가요 음반 집중 수집
정성조 음반 가장 선호해 다수 보유
탄압 직전 1974~75년 음반 황금기

등록 : 2019-02-21 16:45 수정 : 2019-02-22 09:53
1970년대 한국 가요 LP 수집가인 미국인 청년 맥스 발혼(30)이 71년 작곡가 겸 기타연주자인 김희갑이 신중현 곡을 연주한 앨범 을 자랑스럽게 들어보인다. 왼쪽에 있는 앨범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정성조의 사운드트랙 앨범인 , 맨 오른쪽은 조영남 초기작 ‘최진사댁 셋째딸’이 수록된 앨범이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내가 맥스씨에게 또 놀란 건 음반에 대한 그의 열정이었다. 몇 시간을 디깅(LP 음반을 고르는 일)하는 동안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즐거워하며, ‘득템’했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내게도 과연 저만 한열정과 애정이 있는가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대구시에서 음반 가게 ‘올드레코드’를 운영하는 엄경희(53)씨는 지난 11일 블로그에 가게를 찾은 맥스 발혼이라는 30살 미국 청년의 한국 가요 LP 사랑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14일 <서울&>과 인터뷰하기 위해 마포구 공덕동의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하면서 그가 가져온 LP판의 면면을 보니, 깜짝 놀랄 정도의 희귀 명반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한마디로 한국 가요 음반 컬렉터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는 사진기자가 포즈를 요청하자 작곡가 겸 기타연주자 김희갑의 <고고사운드vol 1> 음반(1971년 출반)을 꺼내들었다. 그는 “100만원에 팔렸다는 소문도 있는 희귀판인데 20만원에 득템했다”고 자랑을 잊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떠나야 할 그 사람’ ‘커피 한잔’ ‘님아’ ‘봄비’ 등 신중현의 1970년대 명곡을 당대의 기타 명인인 김희갑이 자신의 밴드와 함께 연주한 이색 음반이다. 그는 “신중현과 김희갑이 함께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가치 있는 판”이라며 “8분이 넘는 긴 곡이 있는 등 1970년대로서는 자유분방하고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가장 좋아하고 많이 찾는 한국 대중가요음반이 무엇이냐고 묻자 작곡가 겸 색소폰 연주자 정성조(1946~2014)의 음반을 꼽았다. 그러고보니 정성조가 배경음악을 맡았던 영화 <어제 내린 비>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음반도 그가 가져온 음반 7장 안에 들어 있었다. 정성조는 <어제 내린 비> 이외에도 <영자의 전성시대> <깊고 푸른 밤> 등 주로 영화음악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음악인이다.

“정성조는 내가 좋아하는 퀸시 존스랑 비슷한 느낌이 난다. 멜로디 작곡이 굉장히 뛰어나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많은 히트곡을 냈을 것이다. 한국 가요에서 재즈의 냄새가 나는 것은 드문데, 그의 음악은 재즈랑 록을 섞어서 굉장히 쿨한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그는 2011년 한국어를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나라에 왔지만 8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1년간 계명대 한국어학당에서 공부한 뒤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석사를 거쳐 2017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년 만인 지난해 8월 다시 한국에와서 현재 중앙대 문화연구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틈틈이 한국 가요 음반을 모아 현재 350장 정도 수집했다 한다. 특히 70년대 한국 포크와 록 음반을 집중적으로 뒤지고 있다. 70년대 중에서도 대마초 파동을 빌미로 유신 정권이 대중음악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직전인 1974~75년을 “가장 좋은 음반이 나온 시기”라고 믿고 있다. 그 시기 가요 전성시대가 열렸는데, 그 뒤에는 인위적으로 끊겼다며 안타까워 했다.


그 증표로 신중현과 김정미를 꼽았다.

“신중현은 유신 체제 속에서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창의적이고 야심 찬 곡을 많이 만든 점을 높이 평가한다. 신중현 곡을 듣다 보면 울컥해진다.” 사이키델릭 여제로 알려진 김정미도 “그의 곡 ‘햇님’을 들어보면 외국 사람들도 압도된다. 정말 다시 듣고 싶게 하는 매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재미 교포 친구가 한국에 왔을 때 바에서 김정미의 ‘햇님’을 듣고 같이 울 정도로 감동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신중현과 김정미의 초반은 워낙 희귀하고 고가여서 재발매반으로 갖고 있다며 아쉬워한다. 그가 구하고 싶은 70년대 판들은 대개 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판 가격도 해마다 오른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경제활동이 없어 벼룩시장이나 지방 등에 발품을 팔며 가서 꼭 필요한 판만 한 달에 한 장 정도 구한다는 그는 신중현과 정성조 곡이 동시에 들어 있는 70년대 포크 듀오 쉐그린의 <최신 앨범 VOL 1>(1971년)은 꼭 구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70년대 한국 음반을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한국 역사와 사회를 더 공부해야지라는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고 말했다.

학교에 다닐 때 종묘 근처 벼룩시장 등지에서 빈티지 물건을 사러다녔는데, LP가 이 보여 턴테이블을 사서 하나둘 사모으게 됐다고 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인터넷에서 신중현과 김정미에 대한 영어 자료를 견하고 한국 대중음악에 흥미가 깊어졌다고 했다. 신현준씨 등이 쓴 <한국의 팝의고고학 1970년>(한길사)이란 책을 읽고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이나 명반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듯싶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1985~87년 충남대에서 영어 교수로 일한 경험이 있어 집 안 벽에 한국 그림이 걸려 있었고, 국악 카세트테이프가 있는 등 “어릴 때부터 한국에 대해 아련한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제2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한국 음반을 수집하고 박사과정까지 밟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음반 수집 외에도 한국의 대표적 음반 수집가 5명을 만나 인터뷰했는데, 기회가 되면 출판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에게 한국 음반 수집은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 “한국 역사랑 엮이는 작업”이다. “방송하지 못하도록 스크래치를 내거나 금지곡 표시를 한 음반을 발견할 때나, 곡 진행 자체는 불온한데 가사는 반대로 밝고 경쾌한 산울림의 노래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금지 문화 특징을 본다.”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