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을 세상에 알린 미국 AP통신사 통신원의 집이었던 딜쿠샤는 하우스뮤지엄으로 복원돼 2020년 개관할 예정이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삼일절 100주년을 앞두고 종로구 행촌동1의88 ‘딜쿠샤’(DILKUSHA)를 찾아 길을 떠난다. 딜쿠샤는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 거사를 미국에 가장 먼저 알린 앨버트 W. 테일러(1875~1948)와 부인 메리 L. 테일러(1889~1982) 부부가 1924년부터 1942년까지 18년 동안 살던 집이다.
미국 네바다주 출신 앨버트 테일러는 광산 기술자인 부친 조지 테일러를 따라 동생 윌리엄 테일러와 함께 입국해, 금광을 운영했다. 광산업자 앨버트 테일러는 약소국 조선이 독립의 열기로 들끓자 미국 UP통신(UPI통신의 전신)과 AP통신의 임시 통신원을 맡아 3·1 만세운동과 고종 국장, 제암리 학살사건, 의암 손병희 재판 등을 보도한 의혈남아였다.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을 가진 딜쿠샤는 암울했던 근대의 황혼과 격동의 현대를 온몸으로 지켜본 건물이다. 테일러 부부가 신혼여행지 인도 북부 러크나우에서 감명 깊게 본 ‘딜쿠샤 궁전’의 외관과 이름을 따서 지었다.
딜쿠샤 가는 길은 경희궁 옆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하거나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때마침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이 오래되고 낡은 집의 사연과 유물을 소개하는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전시가 다음달 10일까지 열리므로 전시를 보고 나서 현장을 방문하면 효과 만점일 듯하다. 역순으로 딜쿠샤를 먼저 보고 나서 관람해도 무방하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출발한다면 강북삼성병원과 서울시교육청 사이 길을 따라 올라가서 홍난파 가옥, 권율 장군 집터를 지나면 쇠락한 붉은 이층 벽돌집을 만날 수 있다.
이 집이 자리한 행촌동(杏村洞)은 1914년 동명을 정하면서, 서부 반송방 은행동의 행(杏)자와 신촌동의 촌(村)자를 합쳐 지은 합성 지명이다. 은행동은 권율 장군 집터에 우뚝 솟은 500년 묵은 은행나무에서 유래했다.
은행나무는 이 일대를 지키는 신목(神木·신성한 나무)으로 떠받들었다. 신촌동은 교북동 1번지에 ‘새로 생긴 마을’을 뜻하는 새말을 한자로 옮긴 지명이다. 새말은 지금 대신중·고등학교가 들어선 어수우물골과 곡정동을 중심으로 새로 형성된 아랫마을이다.
권율 장군이 정원수로 심었다는 500년 묵은 은행나무. yongil@hani.co.kr
딜쿠샤의 푯돌은 벽면 모퉁이 화강암에 두 줄로 새겨진 머릿돌이다. 첫 줄엔 큰 글씨로 ‘DILKUSHA 1923’이라는 영문 알파벳과 숫자가, 아래 줄엔 ‘PSALM CXXⅦ-Ⅰ’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DILKUSHA’란 이 집의 이름(택호)이고, ‘1923’이란 건축 연도를 말한다. PSALM CXXⅦ-Ⅰ은 “여호아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아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는 <성경> 시편 127편 1절 구절이다.
지금은 알려진 내용이지만, 비밀의 문이 열리기 전에는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처럼 여겨졌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항일구국신문인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영국인 베델의 집이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귀신 나오는 집’‘은행나무집’이라고도 했다. 한때 서울 최대 규모의 저택이었던 이 집의 비밀은 불과 13년 전인 2006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이자 딜쿠샤에서 태어난 브루스 T. 테일러(1919~2015)가 서울로 찾아오면서 풀렸다. 그전까지는 단서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머릿돌 앞에 주민들이 장독들을 놓으면서 단서는 가려졌고 그렇게 60년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1924년 딜쿠샤가 건립됐을 때 풍경. 노주석 제공
엄밀하게 말하면 딜쿠샤와 3·1만세 보도는 연관성이 없다. 오히려 브루스의 출생과 얽혀 있다. 브루스는 3·1만세운동 하루 전날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부는 지금의 서대문구 충정로 7길(죽첨정 2정목 187번지) 벽난로가 설치된 작은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아들 브루스가 1992년에 출간한, 어머니 메리 테일러의 자서전 <호박목걸이>에 독립선언서 보도에 따른 비화가 소개돼 있다.
“총성이 때때로 들렸다. …그것은 바로 ‘만세’ ‘만세’ 소리였다. …남편은 아이를 안다가 내 침대 밑에 숨겨져 있던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이건 독립선언서잖아’ 그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장담컨대 그날 밤 신참 특파원은 자기 후계자, 첫아들이 태어난 것보다 독립선언서를 발견한 일에 더 흥분하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밤 동생 빌에게 독립선언서 사본을 구두 뒤축에 숨기고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가게 했다.”
앨버트 W. 테일러의 젊은 시절. 노주석 제공
이것이 식민지 조선의 독립선언문이 즉각 세계에 알려진 전말이다. 당시 세브란스병원에서 등사돼 외국인 병실에 숨겨둔 독립선언서를 미국 통신사의 임시 통신원인 앨버트 테일러가 우연찮게 입수한 것이 단초였다.
그때 앨버트는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할 기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UP통신원 자리에 지원해 명함을 받은 직후였다. 가족 사업인 광산 일이 자리를 잡자 젊은 혈기에 식민지 조선을 돕고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앨버트는 “…지원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 AP통신사의 한국통신원으로 임명됐었습니다. …마지막 왕의 국장에 참석하였으며,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살피고 그에 대한 기사를 썼습니다”라는 편지를 3월7일 영국의 장모에게 보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했고, 환자들의 침상에 숨겼다는 전 세브란스 병원장 이용설의 증언과 메모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는 내용의 기사는 AP통신 발로 <뉴욕타임스> 1919년 3월13일자에 실렸다. 외신들은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 독립을 선포하다.” “전체 한국이 움직인다.” “한국인이 평화적으로 저항한다”라고 3·1운동을 보도했다.
또 <동아일보> 1920년 7월13일자에 실린 손병희 등 독립운동가의 재판참관기인 ‘법정잡관(法廷雜觀) 제1일’ 기사에서 “AP통신원 테일러가 서양 사람 중 처음으로 취재를 한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앨버트는 1919년 4월15일 일본 군경이 만세운동을 벌인 수원(지금의 화성시) 제암리에 들이닥쳐 주민 수십 명을 무차별 학살한 소식이 들려오자 현장으로 달려가 취재했다.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에게 찾아가 항의해 재발 방지 약속까지 받아냈다. 앨버트가 취재한 제암리 학살 사건은 1919년 4월24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앨버트가 찍은 진귀한 고종 국장과 서울 사진도 여러 장 남아 있다.
딜쿠샤만큼 갖가지 사연과 곡절을 간직한 집도 드물다. 은행나무가 앨버트 부부를 불렀다. 부부는 한양도성을 따라 돌다가 은행나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곳에 집을 짓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행촌동 1번지 4752평의 소유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E.A. 엘리엇이었다.
<호박목걸이>에는 “‘은행나무 땅 주인이 죽었다는군. 땅이 매물로 나왔어.’ 앨버트와 나는 건축업자와 함께 은행나무까지 가파른 언덕을 헉헉대며 올라갔다. 우리는 잠시 멈춰서 숨을 좀 고르며 새집을 지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집터 언덕 뒤로는 웅장한 북한산이 버티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페이킹 패스(북경으로 가는 길, 의주로)와 독립문이 보이며, 동쪽 계곡 아래로는 서울의 옛 성곽(한양도성)과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또한 오래된 은행나무가 황금빛 호박색으로 물드는 곳이었다”라고 딜쿠샤를 둘러싼 풍광이 잘 묘사돼 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은행나무는 딜쿠샤 정원에 속해 있고, 저택은 한양도성 성벽과 맞닿아 있었다. 성벽과 은행나무 이외에 시야를 가리는 그 무엇도 없었다. 딜쿠샤에서 서대문형무소 안까지 보였다. 메리는 <호박목걸이>에 “머릿돌에 우리 집 이름을 새겼다. 나는 인
도에서 딜쿠샤 궁전을 본 순간부터 우리 집에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을 꿈꿔 왔다”라고 썼다. 메리는 양화진 묘역 아버지 옆에 묻어달라는 앨버트의 유언을 지켰다.
2006년 64년 만에 서울을 찾은 브루스 테일러는 딸 제니퍼 테일러와 함께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옛집을 찾은 브루스의 기억에 남은 것은 은행나무와 한양도성밖에 없었다.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의 딜쿠샤를 본 소감을 묻자 “집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제니퍼는 부모가 남긴 딜쿠샤 관련 자료 30여 건을 기증한 데 이어 테일러 가문의 자료와 유물 1026건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딜쿠샤는 2017년 8월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됐다. 딜쿠샤는 내년 중으로 하우스뮤지엄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생전에 브루스는 딜쿠샤와 테일러 가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서울 전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