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지적장애 1급 딸·시어머니 돌보듯 정성 다해 찾아가는 복지행정 구현
신영자 동대문구 휘경2동 맞춤형복지팀장
등록 : 2019-03-21 15:42
2012년부터 ‘격무’ 복지팀장 자원
거동 힘든 시어머니 23년 모시듯
홀몸어르신 만나 마음의 문 열어
“장애인 보면 이쁘다 웃어주세요”
2012년 동대문구 민원처리팀장이었던 신영자 휘경2동 맞춤형복지팀장은 업무 부담이 커 다들 기피하는 복지팀장을 자원했다. 1985년부터 줄곧 행정만 해온 그가 전혀 안 해본 업무에 도전하게 된 이유에는 시어머니와 딸에게 있었다.
23살에 결혼한 그는 남편이 사 남매의 막내였지만 함께 살기를 원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동네에서 완고하고 무서운 분으로 소문난 시어머니는 혈압이 높은데다 허리 수술까지 받아 집 밖으로 거동이 힘들었다. 신 팀장은 집안 제사를 해마다 6차례 준비해 치러야 했다.
1985년 태어난 딸은 백일이 지나면서 열이 자주 올랐고 그때마다 경기를 했다. 세 살이 넘어 받은 정밀검사에서 고열에 뇌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더는 발달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12살까지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결혼하고 나서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새벽 5시에 일어나 전날 벗어놓은 옷들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 지어놓고 출근해요. 퇴근한 뒤 직원들과 어울리는 건 생각하기도 어려웠죠. 이른바 ‘땡순이’처럼 바로 집으로 와 저녁 한 뒤에는 어머님 허리 찜질해드리며 말벗을 해드렸어요. 말 못하는 딸을 보시느라 어머님도 온종일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밤 10시가 넘어서야 제 방으로 올 수 있었어요.” 지적장애 1급인 딸을 특수학교에 보낸 적도 있지만, 언제 뒤로 넘어갈지 모른다는 이유로 헬멧을 쓴 채 수업하는 걸 본 뒤로 보내지 않았다. 대신 교사 한 명이 학생 2명을 돌보는 특수학원에 보냈다. “다른 학부모님들이 싫어하시니까 ‘애들 뒤에 앉아 있게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며 학원비도 더 드렸어요. 학원에 갈 때마다 같은 반 아이들에게 과자도 많이 사줬어요. 아이들이 참 여우예요. 제가 가면 딸 옆에 붙어서 ‘언니, 오늘 뭐 했어’ 하며 친한 척하는데, 그게 여우 짓이란 걸 알면서도 고마운 거예요.” 장애인을 보는 시선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어려움이 많다. “얼마 전 ‘장애인 활동지원사’가 집에 오셨는데, 사람만 보면 좋아하는 딸이 앵기려니까 자꾸 피하시다가 다음날부터 안 오셨어요. 날마다 목욕을 시켜도 침을 흘리고, 약을 먹기 때문에 냄새가 나요. 진짜 웬만한 마음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교육을 받은 분들이잖아요. 다른 분들도 장애인을 보면 피하지 말고 조금 더 따뜻하게 ‘너 참 이쁘다’며 웃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앞날은 생각하지 못한 채 ‘오늘만 무사히’를 바라며 하루하루 보낼 때, 힘이 된 건 직장 동료들이었다. “그때 직원들이 제 손을 안 잡아줬으면 버틸 수 없었을 거예요. 병원에 들락날락할 때 누군가는 제 업무를 대신 해줘야 하잖아요. 같이 마음 아파하며 자기가 해주겠다고 할 때 큰 위로를 받았어요. 종일 장애 자녀와 같이 있는 부모 심정이라는 게 이루 말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그 생각을 잊을 수 있었고, 집에 가면 미안한 마음에 딸을 더 사랑해주고 아껴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2012년 답십리1동 복지지원팀장이 된 그는 ‘시어머니와 딸 같은 분들을 현장에서 어떻게 돌보는지 직접 겪어보고 싶어’ 홀몸어르신과 장애인 등 소외계층을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한 70대 상이군경 홀몸어르신은 고독사를 염려한 직원이 찾아가도 “아무 필요 없다”며 문전박대했다. ‘우리 어머님도 그러셨는데,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 날마다 찾아갔다. 집 앞 청소도 하며 마음의 문을 열려 애를 쓰자 어르신은 “자식이 보고 싶은데 한 번도 찾아오질 않는다. 그렇게 헌신했는데 배반당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젊은 직원들은 많은 주민을 상대해야 하잖아요. 저는 어머님 모셨던 마음으로 대하니까 결국 받아들이시더라고요. 어머님과 딸 덕에 그분들을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999년에는 동대문구 효행공무원 표창을 받았다. “어머님이 밖에 나가시면 제 자랑을 많이 하셨어요. 그 소문이 퍼져 표창까지 받은 것 같아요. 어르신들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돼간다고 하잖아요. 제 눈에는 뭘 원하시는지 그게 보였던 것 같아요.” 시어머니는 1년 동안 간암을 앓다 2007년에 돌아가셨다. 복수가 찬 시어머니를 껴안고 많이도 울었다. 그 뒤 딸과 지내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지만 아직도 못해준 게 너무 많다. “우리 딸이 ‘엄마’ ‘아빠’ ‘바다’ 이렇게 세 마디밖에 못해요. 바다를 되게 좋아하나봐요. 3년 뒤 정년퇴직하면 같이 바다도 가고, 노래도 부르러 다니고 싶어요. 노래는 잘 못해도 흥이 많아서 음악이 나오면 되게 신나 하거든요.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안 쓰고 함께 노래교실에 다니려고요.”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지난 13일 동대문구 휘경2동주민센터에서 신영자 맞춤형복지팀장이 웃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결혼하고 나서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새벽 5시에 일어나 전날 벗어놓은 옷들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 지어놓고 출근해요. 퇴근한 뒤 직원들과 어울리는 건 생각하기도 어려웠죠. 이른바 ‘땡순이’처럼 바로 집으로 와 저녁 한 뒤에는 어머님 허리 찜질해드리며 말벗을 해드렸어요. 말 못하는 딸을 보시느라 어머님도 온종일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밤 10시가 넘어서야 제 방으로 올 수 있었어요.” 지적장애 1급인 딸을 특수학교에 보낸 적도 있지만, 언제 뒤로 넘어갈지 모른다는 이유로 헬멧을 쓴 채 수업하는 걸 본 뒤로 보내지 않았다. 대신 교사 한 명이 학생 2명을 돌보는 특수학원에 보냈다. “다른 학부모님들이 싫어하시니까 ‘애들 뒤에 앉아 있게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며 학원비도 더 드렸어요. 학원에 갈 때마다 같은 반 아이들에게 과자도 많이 사줬어요. 아이들이 참 여우예요. 제가 가면 딸 옆에 붙어서 ‘언니, 오늘 뭐 했어’ 하며 친한 척하는데, 그게 여우 짓이란 걸 알면서도 고마운 거예요.” 장애인을 보는 시선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어려움이 많다. “얼마 전 ‘장애인 활동지원사’가 집에 오셨는데, 사람만 보면 좋아하는 딸이 앵기려니까 자꾸 피하시다가 다음날부터 안 오셨어요. 날마다 목욕을 시켜도 침을 흘리고, 약을 먹기 때문에 냄새가 나요. 진짜 웬만한 마음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교육을 받은 분들이잖아요. 다른 분들도 장애인을 보면 피하지 말고 조금 더 따뜻하게 ‘너 참 이쁘다’며 웃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앞날은 생각하지 못한 채 ‘오늘만 무사히’를 바라며 하루하루 보낼 때, 힘이 된 건 직장 동료들이었다. “그때 직원들이 제 손을 안 잡아줬으면 버틸 수 없었을 거예요. 병원에 들락날락할 때 누군가는 제 업무를 대신 해줘야 하잖아요. 같이 마음 아파하며 자기가 해주겠다고 할 때 큰 위로를 받았어요. 종일 장애 자녀와 같이 있는 부모 심정이라는 게 이루 말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그 생각을 잊을 수 있었고, 집에 가면 미안한 마음에 딸을 더 사랑해주고 아껴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2012년 답십리1동 복지지원팀장이 된 그는 ‘시어머니와 딸 같은 분들을 현장에서 어떻게 돌보는지 직접 겪어보고 싶어’ 홀몸어르신과 장애인 등 소외계층을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한 70대 상이군경 홀몸어르신은 고독사를 염려한 직원이 찾아가도 “아무 필요 없다”며 문전박대했다. ‘우리 어머님도 그러셨는데,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 날마다 찾아갔다. 집 앞 청소도 하며 마음의 문을 열려 애를 쓰자 어르신은 “자식이 보고 싶은데 한 번도 찾아오질 않는다. 그렇게 헌신했는데 배반당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젊은 직원들은 많은 주민을 상대해야 하잖아요. 저는 어머님 모셨던 마음으로 대하니까 결국 받아들이시더라고요. 어머님과 딸 덕에 그분들을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999년에는 동대문구 효행공무원 표창을 받았다. “어머님이 밖에 나가시면 제 자랑을 많이 하셨어요. 그 소문이 퍼져 표창까지 받은 것 같아요. 어르신들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돼간다고 하잖아요. 제 눈에는 뭘 원하시는지 그게 보였던 것 같아요.” 시어머니는 1년 동안 간암을 앓다 2007년에 돌아가셨다. 복수가 찬 시어머니를 껴안고 많이도 울었다. 그 뒤 딸과 지내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지만 아직도 못해준 게 너무 많다. “우리 딸이 ‘엄마’ ‘아빠’ ‘바다’ 이렇게 세 마디밖에 못해요. 바다를 되게 좋아하나봐요. 3년 뒤 정년퇴직하면 같이 바다도 가고, 노래도 부르러 다니고 싶어요. 노래는 잘 못해도 흥이 많아서 음악이 나오면 되게 신나 하거든요.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안 쓰고 함께 노래교실에 다니려고요.”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