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구 여성문화회관 도로변에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가 서 있다. 1.7m 높이의 이 비석은 각진 기둥 모양으로 전쟁으로 입은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송파구에 백제가 도읍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단, 이 비석이 백제 역사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을축년 대홍수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7~8월에 중부 지역에 큰 장맛비가 내려 생긴 홍수 사태를 말한다. 이 중 7월16~18일에는 서울에 300㎜ 이상의 비가 내려 한강이 흘러넘치고 민가 273채가 떠내려가는 등, 현재 잠실 일대에 많은 재산 피해가 난 최대의 홍수로 알려져 있다.
이 비는 홍수 피해를 가장 크게 당한, 잠실 일대(석촌호수 남쪽) 송파나루터에 살았던 피해 주민들이 자연재해에 대한 기록과 경각심을 갖고자 1926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사무소에 세웠고, 몇 차례 이전하다 지금 위치에 자리잡았다. 비석 앞면에는 ‘을축7월18일 대홍수기념’(乙丑七月十八日大洪水紀念), 옆면에 ‘증수사십팔척(增水四十八尺), 유실이칠삼호(流失二七三戶)'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홍수는 백제 역사 연구에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당시 일제는 우리 민족을 강압 통치하기 위해 전국에 걸쳐 문화재 조사를 했는데, 1916년 조선총독부는 이 일대 토성의 위치와 규모를 간단하게 보고했고 단순한 토성지로 기록했다.
그러다가 홍수 직후인 8월,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송파구 풍납동 일대 한강변 모래톱 사이(현재 천호대교 남단 광나루공원)에서 ‘큰항아리’와 그 안에 보관된 ‘청동 초두’(긴 자루가 달린 다리 셋의 작은 솥)를 거두어서 정리하고, 홍수로 서북면 성벽이 떠내려갔다는 기록을 남겨 백제의 유물이 최초로 드러났다. 조선총독부는 추가 조사를 벌여 1936년 조선 고적 27호로 지정했고, 해방 이후 1963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11호로 지정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을축년 대홍수로 촉발된 백제왕성의 실체에 대한 논란은 역사·고고학계의 백제왕성의 위치 지정 문제로 이어졌고, 다양한 논의 끝에 현재는 풍납동 토성이 백제의 왕성으로 인정된다.
대홍수로 무너졌다는 서성벽은 최근 그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송파구는 풍납동 토성 복원 사업을 하고 있는데, 2017년부터 시작한 서성벽 복원 정비사업 발굴 결과 을축년 대홍수 당시 떠내려갔다는 서쪽 성벽이 지하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2월28일 대법원에서 삼표레미콘 공장 터 강제 수용 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백제왕성은 조만간 을축년 대홍수로 무너지기 이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송파구의 풍납동 토성 복원 사업은 이러한 백제 역사를 복원함과 동시에 지역 주민과 공존하는 문화재로서 가치를 되찾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을축년 대홍수로 시작된 백제 역사 연구의 전환점은, 강력한 해상 왕국을 건설했던 백제가 송파구에 도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 500년 수도 서울이 아닌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2천 년 수도 서울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이학림 송파구 홍보담당관 언론팀 주무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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