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 끝자락, 경희궁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 이용원, 사진관, 오락실이 차례로 보인다. 정겨운 골목 풍경을 바라보다 어린 시절이 떠올라 잠시 추억에 잠겼다. 잊고 있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곳은 올해 4월부터 ‘근현대 100년, 기억의 보관소’로 새로 단장한 ‘돈의문박물관마을’이다. 서울 사대문 가운데 하나이자 ‘서대문’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돈의문’(敦義門) 안 첫 동네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살려 마을 전체를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꾸민 역사문화 공간이다.
이 마을이 있는 종로구 신문로2가 일대는 서울을 생활권으로 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종로구에서 직장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점심시간 또는 저녁 회식으로 한번쯤 가봤을 식당 골목으로 기억되고, 1960년대 서울에서 고교 입시를 준비했던 어르신들에게는 인근 명문고 입학을 위해 찾던 과외방 밀집 지역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서울의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2003년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전면 철거될 뻔했지만, 2015년 서울시가 삶과 기억이 보존된 마을 그 자체를 재생하기로 하면서 박물관 마을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올해 ‘살아 있는 박물관 마을’이라는 조성 취지와 정체성을 살린 공간으로 전면 재정비해 본격 운영을 시작했다.
특히 이 마을은 전면 철거 뒤 개발하는 도시재생이 아닌, 잘 보존된 근현대 건축물과 도시형 한옥, 옛 정서가 살아 있는 골목길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꾸몄다. 마을의 골목길 한 벽면에는 철거민들의 애환을 담은 벽화와 함께 이곳에 자리했던 식당들의 상호가 그려진 연탄 모형도 전시해 전면 철거 뒤 개발하는 도시재생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공간인 이 마을이 현재를 살아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시는 30여 개 동의 건물과 골목길에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1956년에 지은 가정집을 개조해 독립운동가의 방을 재현했고, 경성 시대 이 동네에 살았다고 알려진 프랑스 상인 ‘부래상’과 조선 최초 자동차 딜러 ‘테일러’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 6080년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가정집·오락실·사진관 등 체험형 전시관이 들어섰다. 또 1984년부터 2013년까지 29년 동안 여관으로 운영되었던 ‘서대문여관’은 외관을 그대로 보존한 전시관이 되었으며, 이 외에 시민 수집가의 소장품 전시, 서울의 기억을 주제로 한 입주 작가들의 전시 체험 공간도 마련돼 있다.
최근 새로 단장한 돈의문박물관마을. 서울시 제공
앞으로 돈의문박물관마을은 과거가 박제된 공간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살아 있는 박물관 마을’로 시민들과 함께 마을 곳곳을 채워갈 계획이다. 시는 시민들의 기억을 소환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시민들은 마을 속 공간에 어울리는 오래된 소장품이나 그 공간에 얽힌 자신만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등의 방식으로 시민참여로 완성되는 역사문화 공간이 되고자 한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최근 유행하는 ‘뉴트로’ 열풍에 편승한 인위적인 공간으로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 마을에는 좁은 골목길과 근현대 건축물 등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시는 이러한 흔적을 보존하고 활용해 많은 시민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현재진행형’ 마을이 되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로 서술하지는 않습니다. 그 과거의 기억들이 거리의 모퉁이에, 창문의 창살에, 계단의 난간에, (중략) 그리고 모든 부분부분에 흠집으로 각인되고 무늬같이 새겨져 마치 손에 그려진 손금과도 같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마을의 역사를 전시한 ‘돈의문전시관’의 벽면에 새겨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저서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한 구절처럼 돈의문박물관마을의 건물들이, 골목길이, 계단 하나하나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새롭게 쌓여갈 기억을 포함하는 기억의 보관소로 시민 여러분과 오래 함께하기를 기대한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