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백내장 고글 쓰고 85살 할머니 체험했어요”
어르신 복지시설 위한 안전 디자인 ‘소방사우’ 개발한 신윤선씨
등록 : 2019-04-18 15:42
서울시 ‘디자인 거버넌스’에 제안
취업 미루고 팀 매니저까지 맡아
고령 체험 뒤 개발…복지관에 설치
“부모님도, 나이 들 저도 편하겠죠”
2017년 대학원 과제를 위해 인천의료원에서 환자를 관찰하던 신윤선(26)씨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는 어르신이 많음을 알게 됐다. 검사실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층별 안내물 등이 어르신 눈에는 너무 작거나 잘 보이지 않는 색상이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디자인전문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서울시의 ‘디자인 거버넌스’ 사업에 ‘어르신을 위해 병원·보건소 디자인을 개선하자’고 제안했다. 디자인 거버넌스(design.seoul.go.kr)는 서울시에 아이디어를 내면 시민이 투표해 선정한 뒤 시민, 전문가, 디자이너, 기업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해 디자인으로 해결하는 사업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도 디자인 거버넌스에 제안하고 싶었지만 짬이 안 나서 못 했거든요. 휴학 한 번 안 하고 쉴 새 없이 달려왔는데, 졸업한 뒤 1년 동안 하고 싶은 걸 한 뒤 취업하고 싶었어요. 아이디어가 선정된 뒤에는 프로젝트팀 매니저까지 맡았죠.”
프로젝트팀에 자원한 10명의 시민은 30대 초반 2명을 빼면 모두 20대로, 지난해 디자인 거버넌스 5개 팀 가운데 가장 어렸다. “젊은 저희가 어르신을 공감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이 정도 글자 크기면 충분히 보일 것 같고 서체도 충분히 굵다고 생각했는데, 전문가는 녹내장이 있으면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고 지적하시더라고요.”
팀원들은 지난해 6월 경기도 성남고령친화종합체험관을 찾아 각종 보조 장구를 입고 85살의 노인을 체험했다. 백내장과 녹내장 고글을 써보니 어르신용 제품들이 왜 단색 계열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움직임이 생각보다 훨씬 불편했고 시야각도 예상과 달랐다. “눈앞이 노랗고 뿌옇게 보이고, 시야는 10원짜리 동전만 하게 좁아졌어요. 처음에는 어르신이니까 바닥에 동선을 깔아서 따라가게 하는 것이 편할 줄 같았는데, 시선이 너무 아래쪽으로는 안 가더라고요.”
인터뷰한 소방관들은 재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도록 하고, 비상구와 소화기의 위치를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빠르게 대피하기 어려운 노약자들은 연기가 차면 호흡이 딸리기 때문에 구조 손수건을 비상구 옆에 두기로 결정했다. “저희가 생각한 걸 어르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 여러 노인복지관을 방문해 이야기 들었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불이 나면 코와 입을 막으려고 늘 갖고 다닌다’며 꺼내 보여주신 비닐봉지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최종적으로 △비상문과 층수를 강조한 디자인 △화재 때 사용할 수 있는 구조 손수건함 △엘리베이터 이용 금지 표시 △공간마다 층수와 방 이름을 붙여놓은 ‘내 위치 표시 디자인’ 등 네 가지를 디자인한 뒤 ‘소방사우’라 이름 붙였다. 어르신 소방안전에 필요한 네 벗이란 의미다.
지난 2월 소방사우를 설치한 강남구 삼성동 강남노인종합복지관의 황명선 대리는 “그전에는 비상문과 화장실 문 모두 회색이었는데, 비상 상황이 벌어지면 엉겁결에 화장실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전문가 지적에 놀랐다”며 “4층 비상문은 노란색, 5층은 파란색, 6층은 녹색 등 층마다 다른 색으로 칠하고 화살표와 그림도 크게 표시해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엘리베이터 문과 입구 바닥에는 ‘화재 시 엘리베이터 사용 금지’라는 문구를 붙였다. 한번 들은 어르신도 위급해지면 깜빡하고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릴 때마다 보고 각인될 수 있게 해달라’는 복지관 쪽 요청에 따른 것이다. 복지관 시설 지도와 스티커로 구성된 ‘안전교육 키트’도 제작했다. 복지관은 2월부터 매달 신입 회원 오리엔테이션에서 이 키트를 활용해 교육하고 있다.
황 대리는 “어르신들께 지도와 스티커를 나눠드리고 비상구, 소화기, 구조 손수건, 엘리베이터 스티커를 정확한 위치에 붙이도록 안내하는데, 지도에 스티커 붙이는 걸 어르신들이 의외로 재미있어하셔서 교육 효과가 크다”고 했다. 신씨는 “복지관에서 소방안전 교육을 정기적으로 하는데, 어르신들이 지루해한다고 해서 비상구와 소화기 위치를 재미있게 익힐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스탬프 투어’처럼 각 지점에 가서 설치된 도장을 찍는 방식으로 디자인했다가 공간적 제약으로 지도와 스티커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현재 디자인 기획이나 경험전략(UX)디자인 쪽으로 취업을 준비하는 그는 석사 논문을 ‘공공자전거의 사용성 향상을 위한 디자인 개선’에 대해 썼다. “국내 주요 도시의 공공자전거를 조사해보니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결제하는 방식이라 어르신들은 이용하기 힘들어하셨어요. 우리 사회에서 어르신과 노약자를 위한 배려가 너무 없는데, 어르신까지 고려한 디자인이 잘 자리잡는다면 부모님도 편하실 테고, 나이 먹을 저도 편하지 않을까요?”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지난 1일 신윤선씨가 강남구 삼성동 강남노인종합복지관을 찾았다. 픽토그램과 층수가 커다랗게 그려진 파란 비상문은 개선 전까지 옆 화장실과 같은 회색이었다.
층수와 방 이름을 붙여놓은 ‘내 위치표시 디자인’.
비상문 옆에 있는 구조 손수건함.
엘리베이터에 붙여 놓은 ‘화재시 사용 금지’ 표시.